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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은 반일의 역습이다

문화사로 본 ‘혐한·반일’의 뿌리

  • 조관자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joa@snu.ac.kr

혐한은 반일의 역습이다

  • ● 한국사, 나라 잃은 책임 ‘日 침략본성’서 찾아
    ● 일본신화 콘텐츠에 ‘아시아, 한반도’ 친근감 내재
    ● 2002년부터 혐한 씨앗 본격 싹터
    ● 일본인들, 양국 호혜 부정 韓 무모함에 불신과 공포
2018년 11월 10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열린 반한 집회에서 우익 세력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과 국교를 단절하라는 문구도 보인다. [동아일보 김범석 기자]

2018년 11월 10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열린 반한 집회에서 우익 세력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와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과 국교를 단절하라는 문구도 보인다. [동아일보 김범석 기자]

일본의 혐한 감정은 근친증오(近親憎惡)에 가깝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표현에는 근친증오 감정이 어려 있다. 반일과 혐한의 감정 해소는 한일 사회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과 직결될 터이다. 

혐한과 반일의 극한 대결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역사가 말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의 신정부가 국교 수립을 위해 조선에 수차례 사절단을 보냈다. 조선은 위정척사의 논리로 메이지유신의 왕정 복고를 폄하하고 사절단을 냉대했다. 그 결과 조선이 천황과 일본을 모독했다며 정한론(征韓論)이 일었다. 그 주창자들은 기득권을 잃은 무사들을 규합해 내전까지 일으켰다. 

내전의 패잔병과 동조자들은 자유민권 이념을 흡수하며 1880년부터 아시아주의 단체로 몰렸다. 반서구적 근대 개혁파인 그들은 백인제국주의에 대한 정부의 ‘굴욕외교’를 비판하고 청일, 러일전쟁을 촉구했다. 이들에게는 청-러시아-조선의 왕권과 서구 제국이 모두 아시아의 자주독립을 저해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양이론(攘夷論)을 계승한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가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했다. 

정한론이 제기되고 37년 후 조선은 나라를 잃었다. 한국사는 그 책임을 일본의 ‘침략 본성’에서 찾는다. 개혁과 위기관리의 무능력은 벌써 잊혔다. 한국에서 일본을 몰아낸 것은 미국이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부끄러워하던 양심도 사라졌다.


진정한 사과

진정한 사과는 상대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바라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상대를 힘과 논리로 굴복시켜도 생각과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일본의 반미 민족주의자들도 1951년 점령군이 물러나자, 역사수정주의 민족담론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국이 일본을 침략 세력으로 몰아가서 또다시 ‘역사의 피해자’를 자처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그때에도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것인가? 



근친증오는 자신과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질 때 증폭한다. 일본의 우파는 한국을 한미일 동맹의 협력자로 기대했다. 한국을 군부가 독재하는 미국의 신식민지로 간주했던 일본 좌파의 ‘반한’ 프레임은 88서울올림픽과 민주화를 계기로 해체되었다. 냉전 해체 후 국지전(局地戰)이 빈발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이 ‘자주국방’과 ‘헌법개정’을 논하자 동아시아 진영 간 연대의식은 엷어졌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변화를 ‘보수화·우경화’라고 공격했다. 아시아 유일의 ‘거인’이었던 일본의 상실감과 불안증이 커졌다. 한중의 반일 시위·여론이 점증하면서 일본 내 혐한·혐중 세력도 성장했다.


기마민족설과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여명편'의 한 장면

냉철하게 본다면 국제적 경쟁 구도에서 모두 자국의 안전을 추구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나없이 과거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다시는 침략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일로 미래의 발목을 잡기보다, 현대사회의 인구·환경·노동 문제 등을 함께 해결할 지혜를 먼저 찾아야 한다. 한일이 서로의 실천을 존중할 때 과거의 잘못도 함께 반성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놓는 괄목상대할 존재로 변해야 한다. 

2012년부터 일본에서 특정 민족·인종에 대해 차별을 조장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본격화했다. 같은 해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천황 사죄를 거론한 이후다. 일본에서는 한국 대통령이 천황에게 “무릎 꿇는 사죄”를 요구했다는 가짜뉴스가 퍼지면서 혐한 분위기가 거세졌다. 한일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사과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천황 모독에 흥분했다. 정한론의 DNA를 가진 사람들이 혐한 서적을 펴내며 ‘대혐한 시대’를 연출하고자 했다. 그 척박함에서 한류가 꽃을 피웠다. K-POP의 언어와 율동이 한일의 젊은이들을 서로 친근하게 이끌었다. 새로운 한류로 증오와 무기를 녹여야 한다. 

사실 전후 일본에서 천황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근친 감정’이 존재했다. 일본 신화의 뿌리 인식에서 찾아보자. 일본인의 유래를 두고 여러 가지 시각이 인정받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홋카이도를 거치는 동북 기원, 중국 동북부(만주)와 한반도를 거치는 서북 기원,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에서 타이완과 오키나와 등지를 거치는 남방 기원 등이다. 이 중 만주와 한반도 기원은 천황가의 혈통과도 맞물려 민감하다. 

그 민감함에도 만주·한반도 기원을 두고 역사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펼친 기마민족설이 있다. 1948년 5월, ‘일본 민족문화의 기원과 일본 국가의 형성’이란 민족학회의 한 좌담회에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대 교수가 ‘기마민족 정복왕조론’을 제기했다. 부여계 기마민족 진(辰) 왕조가 남진해 한반도 남부에 진국을 세워 농경민족을 정복한 뒤, 4세기 말 5세기 초에 일본을 정복하고 야마토(大和) 왕조를 세웠다는 내용이 골자다. 

기마민족설은 일본 열도 밖에서 영웅이 탄생해 일본 열도를 통솔한다는 가설이다. 한반도 역사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만큼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도 컸다. 학계의 정설로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변주돼 1990년대 초반까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인의 무의식 속 한반도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우주소년 아톰’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인생작인 ‘불새’에 영감을 줬다. ‘불새 여명편’에서 이자나기는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불사조인 봉황의 피를 구하러 나선다. 이자나기는 영원한 생명의 피를 얻지만, 별이 지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불사조의 피를 마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남매는 섬나라로 흘러들어와 원주민들에게 아마테라스(天照) 신으로 불리며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만화에서는 기마민족의 낭만이 사라지고 원시 식인사회가 그려진다. 그 만화적 상상력이 문명사회를 모독했다고 분노할 필요는 없다. 가령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가 화상을 입어 죽자, 이자나기가 불의 신을 죽인다. 자연과 신의 차이, 신과 인간의 구별, 그리고 선악 판단이 부재하던 시대의 신화다. 

1954년부터 1987년까지 발표된 ‘불새’의 장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에서 시작해 천상의 우주적 공간까지 확대된다. 1928년생인 데즈카 자신은 어릴 때 도깨비를 보는 신비 체험을 반복했고, 오사카 공습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공습 공포 체험과 흑인 병사에게 맞았던 ‘미군’ 점령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민족과의 갈등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옹호하는 만화를 그리고자 결심했다. 반미 아시아주의는 아니었지만, 청년기의 원초적 경험에서 이민족은 미국인을 의미했다. 

1986년 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발표된 ‘불새 태양편’에서 주인공 하리마는 백제 왕족의 피를 받은 인물로 백촌강 전투에서 패해 왜(倭)로 건너온다. 만화에는 외래 종교인 불교와 토착신들 간 갈등도 엿보인다. 만화의 주인공들은 꿈을 매개로 7세기와 21세기(2009년 미래 시점)를 넘나든다. 이와 같은 교차 구성에서 각기 다른 시대의 주인공과 종교의식이 ‘불새’라는 신의 몸으로 통합된다. 이렇듯 일본 역사를 소재로 삼은 데즈카의 ‘불새’에서 일본의 기원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자연의 생명체에 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와의 연결고리가 부각된다. 

에가미나 데즈카가 일본을 대표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의 생명의식, 자연과 종교에 대한 무의식 속에 아시아의 역사,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근친 감정이 내재할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불새 여명편’이 나온 1950년대 전반, 6·25전쟁의 발발로 동아시아 좌파 진영에서 반미 아시아주의가 고조됐다. 1970년대, 중일수교와 국제적 데탕트 기류에서 동북아시아 공산권을 향한 일본 외교가 활발해졌다. 자민당 내 자주파와 사회당을 중심으로 펼친 일본의 동북아 공산권과의 외교는 친미보수의 국가정책을 보완해 일본의 자주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지녔다. 

탈냉전 물결이 시작된 1991년, 일본 정부가 유목민 문화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기상을 밝힌 에가미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아시아의 성장에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던 때였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이 1991년 ‘네 마리 작은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을 주목했을 때 이미 일본은 ‘넘버원’이라는 의미에서 ‘한 마리 큰 용’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일본 경제는 1992년부터 저성장기에 돌입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영토 분쟁이 격화되기 전까지 보수 안에서도 중국이 아시아의 발전에 동참함으로써 일본의 대미 의존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살아 있었다.


월드컵과 혐한의 역습

2002월드컵 ‘한국 - 포르투갈’ 전 당시 서울시청 앞 응원 물결. [동아일보 이종승기자]

2002월드컵 ‘한국 - 포르투갈’ 전 당시 서울시청 앞 응원 물결. [동아일보 이종승기자]

한일관계는 어땠을까.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왜색 문화가 민족문화를 고사시킨다는 이유로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금했다. 하지만 한일회담에 반대했던 야당 지도자가 훗날 정권을 잡아 반전을 이루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한일대중문화가 상호 개방된다.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은 ‘한일우호의 해’이자 중일수교 30주년과 한중수교 10주년을 기념하는 ‘한중일 국민교류의 해’로 기획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북·일 수교가 성립하는 듯했다. 


2017년 5월 20일 일본 지바에서 열린 ‘케이콘(KCON) 2017 재팬’ 콘서트에 참석한 팬들이 한류 스타의 이름을 쓴 피켓과 사진을 든 채 환호하고 있다. [CJ E&M 제공]

2017년 5월 20일 일본 지바에서 열린 ‘케이콘(KCON) 2017 재팬’ 콘서트에 참석한 팬들이 한류 스타의 이름을 쓴 피켓과 사진을 든 채 환호하고 있다. [CJ E&M 제공]

그러나 2002년에는 한류 열풍과 함께 혐한의 씨앗이 싹튼다. 일본의 인터넷 게시판 ‘2채널’에서는 주류 미디어가 ‘한일 우호’를 위해 보도하지 않는 ‘진실’을 공유한다며 한국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월드컵 4강 진출로 축제에 흥겨웠던 한국인들이 공동 개최국 일본을 배려하는 모습은 없었다. 북·일 수교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탓에 무산됐고, 역풍은 재일교포 사회에 미쳤다. 재일조선인과 한국의 시민단체에서는 역사 피해자 문제로 일본에 역공세를 폈다. 한일 간 증오가 고조되기 시작됐다. 

2005년 중국과 한국에서 반일 데모가 불거지자, 일본에서는 ‘2채널’의 혐한론이 책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혐한 기류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사죄 발언으로 격화됐다. 2015년 12월 한일합의와 2016년 혐오 행동 억제 대책법이 시행돼 혐한 현상도 수그러들었다. 일본 내각부가 2018년 10월 실시한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 39.4%로 중국에 대한 친근감(20.8%)보다 높게 나왔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K-POP이 인기를 끌고 관광 인구가 늘어난 덕도 있다. 

그러나 외교적 냉각 상태에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자, 일본의 혐한 여론이 새롭게 점화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합의’를 폐기했다고 인식한다. 특히 50대 이상 중년층에서 ‘한국은 법치주의가 통하지 않고, 정권과 여론에 따라 국가 간 협약을 뒤집는 나라, 한국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의심이 불어났다. 세대 간 갈등도 커졌다. 이해심 많은 아버지가 한류 팬인 딸의 한국 여행을 만류한다. 불신이 팽배하니 한일 간 레이더 조사(照射) 분쟁도 실체보다 더 민감한 이슈가 됐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양국의 호혜관계를 부정하는 한국 정부와 여론의 무모함에 배신감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는 듯하다.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 지식층에서도 한국과의 갈등 요소가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이용되는 현실을 우려한다. 1965년 한일회담 이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고 한국은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렇다면 한일협정에서 제외된 개인의 청구권 문제는 각국 정부의 책임하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생각이다. 인권과 개인의 권리의식은 다르다. 국가는 개인의 권리 보호만이 아니라, 인류 평화에 공헌할 임무도 있다.


괄목상대

근친증오가 극심해지면 자살과 근친살해, ‘묻지마 테러’도 발생한다. 세계적으로 급증한 혐오와 테러는 ‘모두의 행복’을 간과한 채 ‘나의 권리와 안전’이 지켜질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한일관계도 ‘나의 권리’와 ‘모두의 행복’을 함께 고려하며 풀어야 한다. 이웃이 내게 보여주는 모습은 내가 그에게 보여준 모습과 호응한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 상대가 눈을 비비고 놀라워할 만큼 내 실력과 인품을 갖춘다면, 상대는 자연스럽게 내 의견을 존중한다. 외교의 기본은 나의 요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괄목상대할 대화 능력을 갖추는 것에 있다.


혐한은 반일의 역습이다

조관자
●1964년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석·박사
●일본 中部대 역사지리학과 準교수
●現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저서 : ‘일본 내셔널리즘의 사상사: ‘전시-전후체제’를 넘어 동아시아 사상과제 찾기’ ‘일본,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탈전후 일본의 사상과 감성’ 등




신동아 2019년 5월호

조관자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jo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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