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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서울법대에서의 35년

“국무총리 제의 거절한 건 安分知足할 나이였기 때문”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서울법대에서의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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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時代의 ‘인질정책’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를 학생 시위의 온상으로 여기고는 박해했다. 시위의 중심이 되는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의 이른바 ‘문제학과’ 정원을 대폭 줄이는 바람에 법대는 학년당 300명이던 정원이 하루아침에 160명으로 줄었다. 또한 학교를 멀리 시외로 내보낸다는 계획 아래 관악산 아래의 관악컨트리클럽 부지에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해 1975년 이사하게 했다. 관악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시내에서는 알 수도 없고 최루탄을 발사해도 매운 연기는 관악산 언저리에 머무를 뿐이라는 계산이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이므로 서울의 중심인 강북에 사는 교수들의 관악캠퍼스 출퇴근은 도로 사정은 물론 교통편 연결 등에 비춰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논의 끝에 채택된 대책 중 하나로 교수들에게 구반포에 지어진 32평 아파트를 학교 당국의 알선으로 융자받아 분양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아파트 분양이 인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도 없었던 때인데 구반포 32평 아파트의 분양가격이 750만 원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수들은 원하면 정부에서 50만 원의 보조금을 받고 300만 원 한도로 융자를 알선받았으며 나머지는 본인의 부담으로 처리했다. 나는 나머지 4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마련할 방법이 전연 없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양가의 어른들이 보조해주셨다. 돈암동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4대가 함께 하는 신혼생활을 한 우리 부부는 최초로 나의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로 이사해 분가했다. 비슷한 경로를 거쳐 구반포 32평 아파트에 입주한 교수가 많았다. 이것이 구반포 아파트단지 101동 이하를 교수아파트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나는 당시 몇 안 되는 해외 유학생 출신 교수였다. 그래선지 강의와 연구 외에 불려 다니는 경우가 많아 이를 면해보고자 1974년 10월 독일 훔볼트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함부르크대에 가서 1년간 방문학자로 체재한 일이 있다. 교무처장이던 물리학과의 김철수 교수의 배려로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 

이 무렵부터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망명하는 해외 주재 공무원이 자꾸 생겨나자 정부는 ‘인질정책’을 도입해 외국에 나가는 공무원이 배우자를 동반하려면 자녀를 국내에 둬야 하고, 자녀를 동반하려면 배우자가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서울대 교수도 공무원이므로 세 살이던 어린 아들 재혁이는 돈암동에 사는 부모님에게 맡기고 6개월 된 딸 유진이만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어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확하고, 빈틈없고, 부지런한 독일人

함부르크 생활은 미국, 영국 외의 또 다른 서양 사회, 즉 유럽대륙에 눈을 뜨게 해준 기회였다. 미국에서 수년간 유학했고 영국에서 1년을 수학했지만 관념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서양이란 사실 미국과는 아주 다르며 상당히 다양하고 각국 나름의 독자적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는 여러 개의 선진 문명사회다. 특히 독일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음을 많이 배우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확하고, 빈틈없고, 규율을 준수하면서도, 부지런해 저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한국은 근대의 법제를 일본을 통해 독일로부터 계수한 나라이므로 법률가로서의 관심도 깊었다. 

미국이라는 신세계의 자유와 창의, 그리고 이중적 잣대와 우월의식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표준이 되는 찬란한 역사 및 문화와 몸에 밴 공정의식(fairness)을 자랑하는 영국을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나에게 독일은 또 다른 거대한 발견이었다. 독일인들의 질서 의식과 능률 지향, 정확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주 감탄했다. 또한 어려서 무심코 불렀던 상당수의 노래가 한국의 동요가 아니고 독일 노래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 시기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늘 겸손하게 사죄하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여러 가지로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나치 시대 악행을 저지른 자를 시효 없이 체포해 재판함으로써 정의가 살아 있고 진정한 속죄가 무엇인지 세계만방에 보여주고 있다. 자연히 식민지 시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오리발을 내미는 일본과 비교가 된다. 

나는 1977년 10월 부교수로 승진했다. 정교수가 된 것은 1982년 1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다. 1989년, 1995년 교수 재임용을 받아 2007년 정년퇴직 때까지 무사히 학자의 일생을 마감했다. 

1996년에는 서울법대 학장선거에 출마해 다른 교수를 큰 표차로 물리치고 당선된 바 있다. 2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큰 업적을 남길 수는 없었으나 선우중호 총장을 모시고 대과(大過) 없이 임기를 마쳤다. 매주 학장회의에 참석하면서 다른 대학 학장과 교수를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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