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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서진영 사회과학원 원장

  • 이문기|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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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1992년 北 버려…또 버리지 말란 법 없다
  • ●최대한 버티다 北 버릴 가능성 60%라고 봐
  • ●한중수교史는 사드 이전, 이후로 양분될 것
  • ●시진핑 1인 체제? 공산당 몰락으로 가는 길!
“최악 상황엔 ‘핵무장 하겠다’ 中에 명확히 밝혀야”

[홍중식 기자]

서진영(75) 고려대 명예교수는 중국학 개척자다. ‘학계 최고 중국 전문가’로 통했다. 광복군으로 활동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1920~2011)을 1세대로 보면 2세대 중국통(中國通).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에서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한중전문가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을 맡았다. 김준엽 전 총장이 이끌던 사회과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중국통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스승입니다. 후학들이 선생께서 쓴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떻게 지냅니까.
“아는 게 중국밖에 없으니 중국을 들여다봅니다. 숙명여대 학부에서 강의해요. 고되나 이점이 많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면 나이를 잊어요. 강의하려면 공부해야 하기에 긴장감 갖고 중국을 살핍니다. 또 사회과학원 원장으로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김준엽 렉처 시리즈’를 개최합니다.”

김준엽 전 총장과 인연이 각별하죠.
“영향을 미친 정도가 아닙니다. 김준엽 선생 덕에 중국을 공부했어요.”
김 전 총장은 광복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석을 닦았다. 군부 독재에 항거했으며 양심의 훼절도 없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1985년 권력에 의해 총장직에서 물러날 때 학생들이 총장실로 쫓아가 광복군 노래를 합창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100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3000리 3000만의 우리 동포를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갑세다.”

중국을 공부한 것도, 고려대 교수가 된 데도 김 전 총장이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시애틀로 떠날 때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에 귀국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유학은 허락할 테니 돌아올 생각 말라는 거였죠. 학생운동한 이들을 반(半)추방 비슷하게 내보냈습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후 격변기가 도래합니다. 고려대 총장이던 김상협 선생과 김준엽 선생이 귀국을 도와줬습니다. 김준엽 선생이 총장이 된 후 나한테 학생처장을 맡으라더군요. 학생운동하다 반(半)추방당한 놈에게 학생 탄압하는 자리를 맡긴 겁니다. 총학생회 부활이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김영춘(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선봉이었죠. 학도호국단을 수호하고 총학생회 부활을 막으라는 게 정부 주문이었습니다. 길은 두 갈래로 나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생에게 죽는 길, 다른 하나는 정부에 죽는 길. ‘총장 선생은 어떻게 할 겁니까?’ 물었더니 ‘명예롭게 쫓겨나겠다’고 말씀하더군요. 영원히 죽는 길이 아닌 잠시 죽는 길로 나아간 겁니다.”

쑹청유(宋成有) 베이징대 교수가 쓴 ‘중한관계사’에 김 전 총장 활약이 정리돼 있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김 전 총장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총장에서 쫓겨난 뒤 그 양반이 국내 활동을 못하잖아요. 한국 내 중국학, 중국 내 한국학 부흥에 힘을 쏟기로 결심합니다. 베이징대 한국학연구중심을 비롯해 중국 10여 개 대학 한국학 연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합니다. 지금은 중국이 돈이 많아 한국 지원이 절실하지 않으나 그때는 달랐어요. 지금도 김준엽 선생 이름을 걸고 중국에서 학술회의를 하면 한국학 전문가가 몰려옵니다. 김준엽이란 이름이 달린 행사에 참여하는 걸 영광이라고 여기는 거죠.”  

붉은 旗 나부끼던 美 캠퍼스

그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때는 중국 연구가 척박하던 시절이다. 공산주의 국가를 공부하는 건 금기시됐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문화대혁명(1966 ~1976)이 한창이었습니다. 서구의 좌파 학생들은 마오쩌둥(毛澤東)에 열광했고요. 중국을 연구하기로 한 데는 이념적 관심이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념적 관심이 없었다고 얘기할 순 없죠. 우리 세대는 지구의 반쪽에서만 살았습니다. 자본주의만 봤지 사회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나머지 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어요. 한국에서 중국을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할 때입니다. 중국어 공부할 곳도 없었고요. 한국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 다시 말해 중국과 연관 짓지 않고는 설명을 못합니다. 한국의 운명은 좋든 싫든 중국과 관련이 있어요. 중국을 모르고선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1969년 9월 워싱턴대에 짐을 풀었습니다. 베트남전 반전 데모가 치열했어요. 중국 깃발이 캠퍼스에 나부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적색기가 휘날리는 곳에 서 있는 걸 누가 알면 내 운명은 끝난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미국 신좌파(New Left)는 문화대혁명을 인류의 대실험으로 여겼죠. 정통 학파는 광기(狂氣)라고 봤고요. 세미나실, 학회에서 양쪽이 충돌하는데 어안이 벙벙하더군요. 한국이 아닌 곳은 이렇듯 논쟁을 벌이면서 사는구나 싶었죠. 당시 경험이 학문적,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해줬습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토론을 통해 균형 잡는, 동양식 표현의 중용지도(中庸之道)를 깨우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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