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이제껏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서 담론의 대상으로 부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다. 그들은 아직 젊다. 한창 세상으로 나올 준비에 바쁜 잠룡(潛龍)에 불과하다. 이들의 형상은 때론 선배의 뼛속에 각인된 이념의 틀로 해석됐고, 심하게는 좌우세력의 포섭대상으로 격하될 뿐이었다.
‘대졸 대통령론’이라는 허황된 논리가 횡행하는 시대라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386 이후 세대를 학번으로 구분하자면 87학번에서 96학번 사이라 하겠다. 1987년의 시민혁명과 1997년의 외환위기 충격, 이어진 인터넷 혁명의 중간에 끼인 세대. 선배는 이들에게 ‘경제성장의 첫 번째 수혜자’라는 부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정작 그들은 스스로를 입시전쟁과 취업난의 최대 피해자로 여길 따름이다.
법조계의 ‘대중 스타’이자 논란의 초점으로 떠오른 이정렬 판사(36·서울 남부지법 민사단독)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튀는 판사’라는 다소 야누스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그의 얘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세대론을 먼저 끄집어내야 한다.
세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가 내세울 만한 게 ‘젊다’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길을 걸어온 ‘보통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로 스타가 되고, 내기골프 무죄 판결로 역적이 됐다고 해서 보수나 진보, 혹은 좌나 우를 거론하는 것은 시대를 오독(誤讀)한 결례다. 그의 표정에는 반(反)권위, 개인의 자유를 외치는 히피 정신과 법치(法治)혁명을 외치는 ‘범생 스타일’이 기묘하게 동거한다. 잇단 소신 판결은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한 ‘용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쯤에서 지난해 2월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단독 판사로 부임한 지 1년여 만에, ‘이정렬표 판결’이라는 선정적인 꼬리표가 붙은 그의 판결을 되짚어보자.
▲2004년 5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무죄 선고▲2004년 5월 전국공무원노조 조합원의 집단행동에 대해 선고유예 판결▲2004년 5월 탈북자를 위한 여권위조에 대해 무죄 취지 판결(난민 인정)▲2004년 6월 약식 기소된 목사에 실형 선고 및 법정구속▲2004년 7월 검찰구형 5년인 사건에 대해 10년9개월 선고(60세까지 교도소에 있으라는 취지)▲2005년 2월 억대 내기골프 사건 무죄 선고▲2005년 5월 배임혐의 노조 사무총장 구속영장 기각(절차상 위법)▲2005년 6월 ‘주부 가사노동은 단순 육체노동이 아닌 숙련노동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
“남보다 잔머리가 좋았을 뿐”
지난해 뜨거운 이슈가 된 병역거부나 내기골프 판결을 빼더라도 평범한 판결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그의 가치관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가 내린 판결은 자연스레 법원 내의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때론 검찰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으며 나아가 정부 정책과 국가의 존립 근거에 의문부호를 던졌다. 선정적인 언론의 잘 포장된 먹잇감으로, 가십성 뉴스거리로 전락한 것은 당연한 순서.
숨죽이던 소수자가 환호한 한편에서 반작용도 대단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청산가리가 배달됐고, 심지어 이 판사 개인을 겨냥한 시위대까지 조직됐다. 법조계와 학계 일부에서는 그의 판결을 놓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극단적 옹호’라는 심층적 코드를 읽어냈지만, 대세는 여전히 ‘튀기 좋아하는 이상한 판사’다.
법조계의 보수적인 시각이 반영된 탓인지 내기골프 사건 직후 그는 임기가 1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그 열정을 합의와 조정에 쏟으라”는 권고를 받고 민사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세파에 지친 때문일까. 그는 오는 7월 1년간 휴직계를 내고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미국 연수를 떠나는 아내(서울남부지법 이수영 판사)의 내조자를 자처하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다. 그 심판의 근거에 대한 해석이 아집이나 독선이 아닌 논리와 담론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면서 인터뷰를 청했다.
6월4일 토요일, 서울 목동에 자리잡은 남부지법. 그는 이날 점심식사를 서강대 동문회관에서 열리는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에서 해결할 예정이었다. 그와 구면인 기자는 자연스레 그의 일정에 동행할 수 있었다.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목동과 여의도, 그리고 마포로 이어진 오밀조밀한 서울의 서쪽 풍경이 펼쳐졌다. 서울내기인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마포에서 태어나 마포중·광성고를 거쳐 1987년 서울대 법대 입학. 현재 목동에 거주하는 부부판사. 한마디로 모범생의 길을 걸었을 법한 서울깍쟁이의 이력이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남보다 잔머리가 좋았을 뿐이죠.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선생님 출신 어머니 덕분인지도 몰라요.”
-겉보기엔 딱 모범생 스타일인데…. ‘대한민국 판사’라는 말에는 체제순응적인 이미지가 배어 있잖아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렇죠. 그래도 범생이는 아니었죠. 중·고교 시절 1등과 반장을 도맡긴 했지만, 친구들과 사고도 많이 치고 많이 ‘개기면서’ 살았어요.”
‘잔머리’ ‘개기다’…. 그의 입에서 기대와는 딴판인 걸쭉한 비속어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권위적인 판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유형임엔 틀림없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입이 거친 이유는 범생 이미지를 벗기 위한 의식적인 도발이다. 그렇긴 해도 그의 청소년기에는 유약한 모범생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전두환 체포 결사대로 활동
-법대에 진학한 계기부터 들어보죠.
“어릴 적에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이후에는 식민사관을 뛰어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민족적 자긍심에 고취된 애국·애족주의자였죠. 그런데 학력고사 성적이 너무 좋았어요(웃음). 전국 219등. 아버지의 서울대에 대한 집착과 ‘후진국에선 공무원이 최고’라는 권유가 큰 영향을 끼쳤죠. 나름대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과 권력의지, 그리고 정의에 대한 꿈도 있었고….”
-1980년대 중반에 고등학생이 품은 권력에 대한 욕구는 뭡니까.
“고2 때(1985)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사고체계가 흔들렸어요. 전교조의 모태가 된 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였는데, 학교에서 친구들과 돌려본 것이 문제가 됐죠. 충격에 빠진 선생님은 ‘이게 맞긴 한데, 절대 이런 세상은 안 올 테니 관심을 끄라’고 했지만, 학생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정학당할 위기에 몰렸어요. 그런데 학교는 ‘서울 법대 갈 놈을 정학시킬 수는 없다’고 결정했죠. 한번은 친구들과 술 먹다가 학생부에 끌려간 적이 있는데, 학생주임이 ‘술 먹고 서울대 가는 놈 못 봤다’고 경멸하면서 전원 훈방(?)했어요. 그것도 ‘전교 1등’이기 때문이었겠죠. 속으로는 ‘제기랄 서울대 가면 될 것 아냐’ 하는 오기와 함께 ‘권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980년대에 집 근처인 신촌에서 시국사건을 자주 접했을 텐데 어떤 관점에서 바라봤습니까.
“한마디로 민족과 정의의 관점에서 한번 제대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저렇게 데모나 해서 세상이 바뀔까 하는 의문도 품었고요. 당시만 해도 정권이 큰 잘못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때였으니까요.”
-87학번이면 입학해서 데모부터 했겠네요. 서울대 법대 운동권도 극성맞았을 테고….
“그냥 따라다닌 정도였어요. 서클활동 하면서 사회과학 공부를 집중적으로 했는데, 좀 시시한 느낌도 들었고. ‘혁명’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는데, 권력을 가진 위치에서 엎어버리는 게 빠르다고 생각한 시기였어요. 결정적으로, 운동권은 뒤엎은 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더군요. 혁명 이후에도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학생운동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어디서 활동했습니까. 또한 결별 계기는?
“2학년 말까지는 통상 행동대에서 활동하잖아요. ‘전두환·이순자 체포결사대’ 조직원인 때도 있었죠. 그러다 3학년 초에 평양축전 문제로 가투(街鬪)를 나갔다가 친구가 구속됐는데, 걔로부터 ‘정렬이 너도 지명수배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충격을 받은 아버지가 그날로 자동차 대리점 매장에 진열된 르망 승용차를 사주셨어요. 불심검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더군요. 그래서 3학년 때부터 차를 몰며 오렌지 아닌 오렌지가 됐지요.”
전두환 체포 결사대원이 승용차 오너가 된 극적인 반전. ‘각본’대로라면 지명수배 된 것을 안 순간 지방으로 몸을 숨기거나 현장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게 순서다. 불심검문을 피하라고 아들에게 자동차를 선사한 아버지의 결단은 1980년대의 경제성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터. 이후 사법고시를 준비한 그는 2년 반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33회 사법고시(1991)에 합격한다. 만 22세 때다.
“운동으로는 어림없다”
-‘운동권’에 더 남아 있어야 하지 않나 고민하지 않았나요.
“운동이냐 사회 진출이냐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있었지만, 1988년 체포결사대를 마지막으로 ‘이걸로는 어림없다’고 결론 내린 상태였어요. 운동권에 남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학업으로 복귀했는데, 아무래도 서울대 법대의 특성상 집안의 이해관계와 무관치 않은 결정이었겠죠.”
서울대 법대 87학번 27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이 고시에 합격했다.
-존경하는 교수나 인물은?
“당시 서울대 법대생들은 한마디로 기고만장 그 자체였어요. 저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무엇이든 다 알고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죠. 당시 경제학을 가르치신 임원택 교수님이 기억나네요. 일본에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신 분인데, ‘60년간 마르크스주의자였는데 지금 되짚어보니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어요. 누군가는 비웃었지만 저는 그 나이에 견해를 바꿀 수 있는 자세를 존경했습니다.”
이쯤 되면 그의 대학시절은 1980년대 운동권 스타일보다 1990년대 학번에 가까운 특징을 보인다. 포스트 모더니티 시대를 살아왔다고 표현하면 과장일까. 권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혁명 이후의 ‘하루키 세대’로 분류하는 것도 어색하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를 꿈꾸던 나가사와였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40등 언저리의 괜찮은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마친 그는 판사를 지망했다. 군에 입대하면서 특전사 법무관을 지원한 것도 흥미롭다. 지금도 그는 특전사에서 겪은 아주 특별한 경험을 자랑스레 회고한다. 그의 집무실 한구석에는 검은색 베레모가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그의 당당한 체구 역시 특전사 시절 다듬어낸 훈장일 터.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또한 사무적인 판사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강력부 검사에 가깝다.
이 판사 친구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서강대 동문회관 결혼식장에서 홍대 앞 ‘아트 스페이스’로 차를 몰았다.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60년 자료전’ 마지막 날이었다.
의외로 전시회는 젊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혹시나 새로운 자료가 있을까 해서 들른 길이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은 그는 쑥스러운지 바로 전시회장을 빠져나왔다. 남부지법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재개됐다. 그는 통닭 두 마리를 시켰다. 인터뷰 도중에 통닭이라니. 그는 그렇게 소탈하다. 한 마리는 남부지법 경비실로 전달됐다.
-왜 검사가 아닌 판사였나요.
“기왕이면 힘을 가진 검사가 돼서 엿같은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어요. 그런데 연수원에 들어가 보니 다들 서울대 법대생 못지않게 기고만장하더군요. 엘리트 의식에 찌든 사람들 속에서 실망도 컸는데, 개중에는 박범계, 이용구 판사처럼 ‘운동이냐 현실이냐’로 고민하다가 법조계로 들어온 사람도 있더군요. 진보적 성향의 그들과 의기투합했고 고민 끝에 판사를 택했습니다. 그들과의 인연은 ‘우리법연구회’로 이어졌지요.”
잡아넣는 권력의 힘이 법원으로
강금실, 박시환 판사 등이 참여했던 ‘우리법연구회’의 막내 그룹이 바로 그가 속한 세대다. 일각에서는 진보적 판사들의 모임이라고 연구회에 동질성을 부여하지만, 이념과 판결은 별개이고 게다가 그는 그다지 열심히 참가한 부류는 아니었다.
-운동권적 시각을 버린 게 아니었나요?
“구좌파의 논리가 아니라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고민이었어요.”
-세상을 바꿀 힘이 판사에게 있을까요?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시기에 영장실질심사 제도가 도입됐어요. 검사의 힘은 잡아넣는 데서 비롯되는데, 그 힘이 법원으로 이동한 거죠. 사회를 바꾸기 위해 권력을 좇았는데, 검찰이 아닌 법원에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으니 판사를 택할 수밖에요.”
하지만 이 판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주로 민사 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1997년 판사로 임용되어 서울남부지법과 서울중앙지법, 전주지법 민사부에서 근무했고, 형사부는 간간이 관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를 도드라지게 한 것은 바로 그 간간이 관여한 형사 분야다. 서울에서 ‘이정렬’이라는 이름 석자가 부각된 것은 2004년이지만, 2001년 전주지법 영장전담 판사 시절 그는 몇 가지 논쟁적인 결정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판사행에 영향을 준 영장실질심사제도를 한껏 활용한 것이다.
그는 검찰이 심혈을 기울여 기소한 살인범과 나이를 속인 미성년자를 고용한 티켓다방 업주, 심지어 ‘오인 총격한 경관’의 영장까지 줄줄이 기각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검찰과 법원 사이에 형성된 암묵적인 영장 카르텔을 깬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전주지법 시절 최고의 영장 기각률을 기록하며 검찰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죠.
“살인범 영장 기각은 절차상 하자 때문이었어요. 수사기관은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는 일종의 면피용 확인서를 만들어 영장에 첨부합니다. 물론 형식적 절차이지만, 그 확인서조차 제대로 안 만든 경우는 진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은 거죠. 그래서 영장을 날렸습니다. 반발도 컸지만 성과도 있었어요. 요즘 전주에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는 경찰이 없다고 하더군요. 절차적 정당성은 인권과 직결되죠.”
-그간엔 판사가 눈을 감았기에 원칙이 흐트러졌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영장이 기각된다고 사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판사들은 ‘어차피 들어갈 놈인데’ 하고 절차상 하자를 눈감아왔어요. 절차가 만들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외면할 수 없잖아요.”
전주지법 시절, 검찰과 거듭 갈등을 빚어 물의를 일으키자 그는 ‘다시는 형사부 판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악평을 감내해야 했다. 2004년 서울남부지법 형사단독 판사로 부임한 데는 운도 따랐다. 형사단독에 지원자가 몰리자 임관 성적을 기준으로 일괄 배정했기 때문.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이처럼 운때가 맞아서 이뤄진 일이다.
5월24일 서울 남부지법 앞에서 열린 이정렬 판사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무죄 판결에 대한 규탄 집회.
-주니어 시절 판사로서의 가장 큰 고민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사기 같지 않은 사기를 과연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양형(量刑)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어요. 정당한 이유로 돈을 빌렸다가 부득이 갚지 못하는 것이 과연 사기인지, 만일 그게 사기라면 재벌 총수는 모두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양형 문제는 법원의 인치(人治)적 특성과 관련된 문제인데, 사실 두 문제 모두 지금도 결론을 못 내렸어요.”
-얼마 전 10년9개월형을 선고해 화제를 모았죠.
“그간 형량을 정할 때 월 단위는 짝수, 연 단위는 홀수가 관례였어요. 그런데 그 근거라는 게 모호해요. 예컨대 징역 8개월 형은 판사 느낌에 ‘6개월은 약하고 10개월은 좀 세다’는 경험칙에 근거를 둔 것이거든요. 이처럼 불합리한 결정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10년9개월형’은 ‘60세가 돼야’라는 기준에 의한 겁니다. 어떤 게 더 합리적인 양형 기준인지는 직접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관례를 깨는 새로운 기준과 논리 전개. 그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영장실질심사제도, 나아가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한 판사. 그의 독특한 법치주의 논리는 계속 기존 질서와 마찰을 빚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논거인 ‘법대로!’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정렬식 리걸 마인드’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법조계 스승은 서울중앙지법 근무시절 부장판사이던 윤병각(51) 변호사라고 한다. 윤 변호사는 1992년 이회창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법조계 족보로 이 판사는 이 전 대법관의 손자뻘인 셈이다. 그가 왜 ‘법대로’를 외치는지 알 법도 하다. 실제로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차떼기’에는 실망을 금치 못했겠지만.
-당시 윤 부장에게서 특별히 받은 교육이 있나요.
“그분은 ‘판사에게 상식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야말로 법과 증거로만 판단하라고 이끌어주셨죠. 법 규정 먼저 보고, 판례를 검증하고, 미흡한 판례는 책을 뒤져 찾고…. 우리나라에 없는 판례는 해외에서 찾는 훈련을 반복했어요. 또한 판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써먹지 못하게 했죠. 판사의 기본자세를 가르쳐준 스승입니다.”
-내기골프 무죄 판결 얘기를 해보지요. 판결 논리에 비약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영역입니다. 그들의 행위로 피해를 본 사람도 없었어요. 왜 국가가 모든 일에 간섭하려는지 모르겠어요.”
-도박에 대한 정책은 마약이랑 비슷한 게 아닐까요?
“물론 막아야 할 것은 막아야죠. 그런데 도박이 마약과 같다는 논리는 ‘술 먹고 사고치는 사람이 많으니 술도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됩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연관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논리죠. 만일 내기골프가 뇌물로 이어졌다면 증거를 확보해서 처벌해야 옳죠.”
“국익에 어긋나는 판결도 할 수 있어야”
-논리에 하자가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판결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법철학적인 토대와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100% 우연이나 필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력에 의한 것이면 스포츠이고, 우연이 작용한 것이면 도박이겠죠. 법철학적인 관점에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는 생존권을 고려한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대로 도박하는 걸 방치하면 패가망신할 것 같으니 처벌한다’는 논리죠. 그러나 사실 부자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요. 대신 타인에게 해를 입혔다면 그것에 대해 법을 적용하면 돼요. (내기골프는) 그저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예요. 액수가 과도했을 뿐이지요.”
-법리도 중요하지만 ‘국민정서법’이란 게 있잖아요.
“누군가 한 끼에 1000만원짜리 밥을 먹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대중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내기골프를 도박죄로 인정해 처벌한 것도 국민의 법 감정을 고려한 거지 법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언론에 ‘억대 내기골프’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때 이미 이 같은 비난은 예고됐다고 봐요.”
내기골프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법 논리를 떠나 ‘국민정서법’이라는 감정으로 호도된 면도 없지 않다. 그의 판결을 돌아보면서 문득 우리 사회에 ‘판사=국익보호자’라는 편견이 팽배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 판결만 해도 그렇다. 군 입대라는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이 판사에 대한 세간의 주된 평가는 국가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른바 ‘빨갱이 판사’였다.
-판사는 반드시 국익을 추구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니죠. 판사는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에요. 다수의 논리를 존중하자는 게 민주주의라면 당연히 소수자는 존립근거가 사라지고 ‘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죠. 병역거부를 두고도 ‘양심’이라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아무리 외쳐봐도, 다수는 ‘그래도 군대는 가야 한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법관은 법치주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가 요구하는 바와 엇나갈 수도 있어야 해요.”
-판사는 다수의 보편적 의견을 좇아야 한다는 논리도 있잖아요.
“상식으로 풀릴 문제라면 법으로 만들어놓을 필요조차 없었겠죠.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법치가 아닌 인정이나 연줄에 매달린 인치가 횡행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발견한 전략은 ‘법대로’만 외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결과 좌파나 진보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는데요.
“법의 힘을 신뢰해 판사가 됐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원칙도 ‘법대로’일 뿐이죠. 원래 법이라는 게 권력이나 계급의 도구였잖아요. ‘법대로’라는 보수의 논리가 진보로 일컬어지는 게 우리 사회의 모순이죠. 저는 국가라는 존재가 개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좌파이지만, 국가가 개인에 대해 간섭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면에서는 우파입니다. 게다가 제겐 민족주의적인 성향도 있잖아요. 좌나 우로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념에 치우친 판결을 하지는 않았어요.”
-법이 틀렸을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합의를 통해 고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은 민주주의의 몫이죠.”
“공부하고 노력하는 판결”
그의 좌우 논리는 386세대 이후 세대에 적용되는 논리다. 이들에게는 사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개념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가치다. 그는 단지 그 변화의 근거를 법에서 찾았을 뿐이다. 권력의 한 중심에서 정의를 외친다는 보람은 있겠지만 사실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의 논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법학 교과서에 나온 것인데도 뒤따라주는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다른 판사들은 유사한 판결을 내리지 않을까요.
“글쎄요. 상급심의 판례도 아직 없으니까. 사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건 너무너무 피곤한 일이거든요.”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론도 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동료들로부터 지겹도록 그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판사가 왜 시기를 생각합니까, 법만 생각하면 그만이지…. 사실 저는 대법원 판결이나 헌법재판소 결정을 보고 ‘아, 저래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유죄구나’ 하고 공감하지 못했어요. 동감할 수 없는데 어떻게 무작정 따라갈 수 있나요. 제 양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튀는 판결’ ‘이정렬표 판결’이라는 표현을 들어봤나요.
“제 논리가 소통될 수 있는 것이기에 ‘튄다’는 부정적인 표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아마도 판결이 아니라 사람이 튄다는 얘기겠죠. 혹시 정치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길도 있었고…. 세상에 자기의 직위를 이용해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치졸한 것은 없다고 봐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죠.”
이정렬 판사는 “법치를 도구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를 꿈 꾼다”고 말했다.
“이 하나의 주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논문을 읽고 전문가들을 취재해 판결문을 작성했어요. 이 같은 노력을 ‘이정렬표 판결’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노빠’로 오해될 수도 있겠는데…”
-대중은 교과서와 현실의 괴리처럼 이 판사의 논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그만큼 국가주의나 군사독재 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예요. 탈북자 여권위조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때도 그 기분이었어요. 그들은 갈 데가 없어요.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중국은 위험하고, 남한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거든요. 헌법에는 북한 주민을 우리 국민이라고 명시해놓고선 외교정책 때문에 외면하는 거죠. 원래 대한민국 국민인데 여권을 위조해 우리나라 국민행세를 한 것이 무슨 잘못이겠어요.”
이쯤에서 그의 판결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게 좋겠다. 그의 판결에서 일관성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순전히 세대가 다른 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최근 법원 내부통신망에 ‘법관 다명편가제’ 도입을 주장하는 글을 올려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법원장 1인 평가시스템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인데, 그 파격적인 내용은 법원 내부에서 적잖은 동조자를 규합한 상태. 한마디로 재판에 참여하는 사무관, 주임, 법정경위, 속기사까지 모두 참여시켜 법관의 재판 장악력과 업무수행상황을 종합평가하자는 주장이다.
-현재 법원 조직이 바뀌는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데, 그 화두는 뭐가 돼야 할까요.
“‘노빠’로 오해될 수도 있겠는데…저는 ‘참여’라고 생각해요.”
-사실 법원은 매우 권위적이지요.
“아무래도 엘리트라고 생각하니까요. 다수는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지 모르지만, 열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법원의 구조적인 문제라면?
“판사와 일반직이라는 이원구조가 가장 큰 문제예요. 업무가 유기적이지 않고 계속 겉돌고 있어요. 권한이 판사에게 집중된 까닭에 일반직원은 일할 의욕이 별로 없어요. 법원 9급이 하는 일이 보고서 기록을 배달하는 정도예요. 게다가 판사는 소환장이 어떻게 송부되는지도 모르고 일하는 형편이니…. 이런 데서 빚어진 일반직원의 박탈감이라는 게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직도 고시 공부하는 직원이 많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지요?
“재판기일을 잡는 것만 해도 그래요. 만일 일반직원이 권한을 갖고 있다면 자료를 읽고 경중(輕重)을 판단해 기일을 정하면 되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판사 결정 없이는 돌아갈 수가 없는 구조예요. 그 해결책은 일반직에게 실무권한을 주고 나아가 법관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변호사를 판사로 끌어오기보다 법원 내부에서 인재를 키워야지요.”
판사와 일반직의 경계를 허물자는 발상.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매우 진보적인 판사라 해도 쉽게 용납하기 힘든, 대한민국 판사의 존재론적 의미를 되묻는 일이다.
-지나치게 혁신적인 생각 아닌가요?
“우리법연구회 소속 법관들조차 반대하더군요. ‘판사는 엘리트’라는 편견인 거죠. 감히 9급 출신이 어떻게 판사를 하냐는 건데…. 사법고시도 사라지고 9급 출신 장관도 나오는 세상인데, 왜 법원서기보가 대법원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평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인가요.
“지금 판사에 대한 평가를 법원장이 하잖아요. 개별 판사의 재판을 한번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그냥 성적순으로 매길 테지요.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지려면, 법정에서 판사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판사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정경위만 해봐도 어떤 판사가 일 잘하는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서기보나 속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른바 탈(脫)권위주의군요. 요즘 초임 검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임관 초기에 ‘검사스럽게’ 행동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하더군요.
“검사나 판사는 스스로를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빼앗기기 싫어해요. 조직의 생리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사회는 평등해지고 있잖아요. 법(法)이라는 게 한자 그대로 ‘물(水)이 흐르는 데로 가는 것(去)’에 불과한데요.”
“쉬운 문장으로 판결문 쓰고 싶어”
-탈권위주의 시대에 법원은 어떻게 권위를 찾아야 할까요.
“사람에게서 권위를 찾을 게 아니라 제도나 시스템이 인정받도록 해야 해요. 법정이 권위 있어야지, 판사 개인에게서 권위가 나와서는 안 되잖아요. 만일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이 배심이나 참심에서 나왔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 궁금해요. 비권위적인 판결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쉬운 문장으로 판결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죠. 그런데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판사들도 비슷한 생각일까요?
“생각은 비슷할 거예요. 저는 행동으로 나섰을 뿐이고.”
-지금 커가는 후배는 자신이 믿는 대로 판결을 내릴까요?
“사실 가장 걱정되는 대목이에요. 지금 법원의 가장 큰 문제는 관료화로 언로가 막혀 있다는 거죠. 우리 세대야 할 말 다하면서 일해왔지만, 예비판사 제도가 도입된 연수원 27기부터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돼요. 자기가 모시는 상급자에게 지나치게 굴종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거죠. 아무래도 2년간 예비판사로 일하는 걸 봐서 법관으로 임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규정 때문인 것 같아요. 상급자의 평정이 결정적인 구실을 하니까요. 기껏 2년 동안 심어주는 사고가 ‘부장에게 잘해라. 조직에 개기지 마라’ 수준이거든요. 조직의 악습을 후대에 물려주는 셈이죠.”
-결론을 내리려니, 이 판사께서 자신만만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네요.
“사실 제일 겁나는 대목인데, 누구나 주장하죠. 과연 100% 완벽한 판결이냐고. 자신없으면 타협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만 판사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결론을 찾아야 해요. 재판 제도의 본질적인 한계에 대한 해결책은 밖에서 찾아야지 안에서 적당히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죠. 전 언제나 명확한 결론을 추구하고 싶어요.”
-어떤 사회를 꿈꿉니까.
“법치를 도구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죠. 규제도 기회를 균등하게 주는 차원의 규제라면 좋겠어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배려하는 사회. 그 배려라는 것도 같아야 할 것은 같게, 달라야 할 것은 다르게 하는 것이어야겠죠.”
이런 결론에 이르렀을 때 눈치가 부족한 기자는 비로소 그가 살아온 세대의 이론적 기초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근거 없는 권위에 대한 저항과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이야말로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두가 아닐까. 그러고보니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은 사회의 다양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인정한 실질적 평등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월, 그는 휴직계를 내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미국 법원에서 일반직의 역할과 진로’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다. 아이들 교육과 아내 외조에 바치고 남는 시간에 과욋일로 하겠다는 야무진 꿈이다.
가정에 대한 생각이나 행동만 봐도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정신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깍쟁이 서울내기 범생’의 진화라고 하기에는 놀라운 변화다. 그가 1년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다른 이정렬 판사가 나타나 그의 자리를 채웠으면 하는 바람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