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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전집 출간된 한국학 대가 이을호

  • 오종일 | 전주대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철학연구회장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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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 선생은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재건하고, 다산학(茶山學)을 정립하는 등 ‘한국학’의 큰 틀을 세운 거목이다. 최근 그의 저술을 집대성하고 제자들의 연구 성과를 모은 전집(총 27권)이 출간됐다.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선생님! 유택(幽宅)을 잡아놓고 왔습니다.”

“그래?”

“선산 조부님 산소 위 왼편으로 조금 올라간 곳인데 짐작이 가십니까.”

“알겠네.”

“장의(葬儀)위원장으로는 정종 박사를 모시면 어떨까 합니다만….”

“괜찮지. 너무 번거롭게 하지는 말고, 쓸데없이 비석 같은 것도 세우지 말게.”

1998년 3월 10일 오후, 나는 은사 이을호(1910~1998) 선생과 영원히 이별할 날을 3일 남겨놓고, 광주광역시 문흥동 자택에서 평소처럼 조용조용히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 며칠 전에 안진오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선생의 장자 이원태 씨, 그리고 이름 있다는 지관을 대동하고 선생의 선산에 가서 유택을 정하고 온 것이다.

임종을 앞둔 선생은 이처럼 세상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계셨다. 흡사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이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평상의 일처럼 여기셨다.

선생은 작고하기 석 달 전인 그해 1월에 마지막 논문을 쓰셨다. 제목이 ‘한국실학 자생론’이다. 내용은 ‘조선의 실학은 한국의 풍토에서 이뤄진 한국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조선조 실학을 정의하는 학설이 ‘청나라 학풍의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 학문’이라거나 ‘성실성에 바탕을 둔 실천적 학문’이라거나 하는 견해가 많았지만, 선생은 ‘한국적 사유에서 이뤄진 우리 학문’임을 천명한 것이다.

논문을 끝내던 날 선생은 내게 “이제 내 일생의 글은 이것으로 마감하였구먼” 하셨다. 이처럼 돌아가시기 석 달 전까지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고, 임종 3일을 앞두고 자신의 장례를 말씀하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모든 집착을 떨치고 담담하게 뒷일을 정리하셨다.

운명적인 만남

선생은 1910년 전남 영광읍 백학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온 선생은 중앙고보 시절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난다. 그 하나가 중앙학교 교장이던 현상윤과의 만남이다. 1919년 3·1운동 배후자로 지목돼 20여 개월 옥고를 치른 현상윤은 교장으로 부임해 역사를 가르쳤고, 선생은 그 가르침을 받았다. 현상윤은 그 후 ‘조선사상사’ ‘조선유학사’를 집필하며 처음으로 우리의 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또 하나는 폐결핵으로 선생의 건강이 악화돼 광화문통의 한의사 최승달을 만나 한약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그에게 한의학 이론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것이 사상의학(四象醫學)이었고, 최승달은 조선 한의학을 창설한 동무(東武) 이제마(1838~1900)의 제자였다. 선생은 이런 연유로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대 전신)에 진학했고, 마침내 사상의학 교재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번역해 이제마 사상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상의학의 현대적 개척자가 됐다.

‘종합의학’과 민족자강운동

전문학교 시절, 선생은 사회문제 해결에도 적극 참여했다. 22세 때인 1931년 11월 연희전문학교 기독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후원으로 ‘조선의 발전은 농업이 우선인가. 공업이 우선인가’라는 주제의 대학생 토론회가 중앙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이때 선생은 연사로 나와 “조선의 발전은 공업을 우선하여야 하고, 조선은 조선인의 힘으로 발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조선의 발전은 조선인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 문제가 돼 종로경찰서 정보과에 불령(不逞)한 조선학생으로 명단에 올랐고, 그 기록은 종로경찰서가 작성한 ‘사상에 관한 정보’(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다.

경성약전을 졸업한 선생은 고향 영광에 약국을 열고 주민들을 계몽하는 한편, 새로운 민족자강운동을 펼쳤다.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는 약사로서 시작한 것이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야학을 열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어두움에 갇힌 백성들에게 빛을 밝히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뜻있는 청년들이 모여들어 약국은 계몽운동의 산실이 됐다. 민족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들이 몰래 드나들었다. 증언에 의하면 선생의 수입은 아무도 모르게 독립자금으로 지원됐다.

이때 선생은 조선의 의학정책에 관한 획기적 글을 발표한다. 1934년 ‘조선일보’에 3월 15일부터 14회에 걸쳐 발표한 ‘종합의학 수립의 전제’라는 논문이다. 의사 장기무가 그해 2월 16일 조선일보에 ‘한방의학 부흥책’이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계기다. 그 글을 본 개업의 정근양이 같은 신문 3월 9일자에 반론을 게재했는데, 그 내용은 “의학은 한방, 양방이 없고 오직 의술만 있는 것”이며 “의학은 양방을 주로 하여 과학을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이 논쟁을 본 선생은 논문을 통해 두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고, 종합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다. ‘두 의학은 분리 불균형으로 발전해서는 안 되고 종합적인 새로운 발전 방향이 모색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 선생은 이를 계기로 조헌영(1900~1988)과 손잡고 ‘동양의학회’를 조직하고, 1934년 12월 동양의학 잡지 ‘동양의학’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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