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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순천만과 ‘무진기행’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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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 김승옥
익명의 공간 그러나 열려 있는 세계

순천만 근처의 논.

“그러면…내기할까요?”“…?”

“9시 20분 기차라, 내 딱 그 시간까지 용산역으로 달립니다. 타쇼.”

“…가능할까요?”

“제때 도착하면, 팁이나 주쇼.”

“…그럽시다.”

택시는 탄환처럼 튀어나갔다. 오전 8시 53분, 경기도 능곡역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모든 파탄은 집에서 나오기 전에 ‘커피 한잔 마시고 가지 뭐’ 하는 부주의 때문에 발생했다. 원래 예정은 9시 20분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익산행 KTX에 무조건 타는 것이었다. 그걸 놓치면 1시간 30분 뒤에나 출발하는 KTX를 타야 하는 상황. 그런데 이게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원래 예정된 기차를 타면 익산에서 금세 출발하는 구례 가는 새마을호를 탈 수 있다. 거기서 또 버스를 타면 오후 1시 30분 전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시각, 나는 그곳에서 강의를 해야만 했다. 이 연쇄 작용에서 이탈하면 강의는 4시 넘어서야 할 수 있게 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믹스 커피 한 모금 마신다는 것이 5분을 소요했고 부랴부랴 버스정류장으로 나갔으나 일산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직진 직행하는 좌석버스들은 만차가 되어 무정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거기서 또 10분 쯤 소요한 후, 일단 능곡역으로 갔다. 능곡역에서 공덕역까지 전차를 탄 후, 그곳에서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그러나 능곡역에 도착하는 순간 전차 한 대가 들어섰다. 택시 한 대가 보였지만, 우선 전차를 잡기 위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전차는 잠깐 서 있었다. 나는 승강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사이 전차는 매정하게도 출발하고 말았다. 나는 멀어져가는 전차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빛의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용산역, 익명의 공간

역 앞에는 조금 전에 본 택시가 그대로 서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밖에 나와 서 있었다. 그는 한눈에 내 처지를 간파한 터였다. 슬며시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9시 20분 기차를 꼭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태풍 너구리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흔들거리는 자유로를 광란의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 탓에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갔지만 그는 자유로와 올림픽대로와 한강변 산책로를 무섭게 선택하며 약속대로 용산역 앞에 나를 세워줬다. 9시 18분.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2분 안에 플랫폼까지 뛰어가서 KTX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어쩌겠는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냈는데 마침 5000원짜리였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용산역 안으로 들어갔다. 플랫폼까지 갈 것도 없었다. 구내에 들어서는 순간 9시 21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구석의 빈 의자를 찾아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이 넓은 용산역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익명의 공간을 동경했는가, 확실치 않다. 지난해 8월, 지방 어느 도시의 모텔에 갇혀 지냈는데, 그 지역의 문화 기관에 관한 ‘정책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근사한 조명에 기이한 냄새를 풍기는, 그 공간에서 며칠씩 머무르면서, 갑자기 내가 그러한 익명의 공간을 지독히도 편애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적 있다. 왜 그랬을까. 이를테면 나는 607호나 304호의 ‘손님’일 때, 부산행 KTX의 8호차 5D 좌석 ‘승객’일 때, 치과 병동의 치주염 환자이거나 혼잡한 은행에서 대기번호 582번 쪽지를 들고 있을 때, 불현듯 마음이 안정되곤 한다.

페르소나 향한 집착

인간은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집단 속에서 성장하고 교류한다. 일을 하고 여가를 누리고 가족을 구성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을 갖게 된다.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했다. 원래 연극이나 영화와 관련된 용어다.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썼던 가면이 페르소나다. 외적 인격, 곧 사회적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즉 사회적 가면은 단 하나가 아니다. 사회적 삶은 매우 복잡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그 과정의 복합적인 전체가 사회적 삶인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은 페르소나를 형성한다. 개인이 외부 세계에 내보이는 이미지, 즉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보이는 사회적 모습이다. 융에게서 이 페르소나란 한 개인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체계 또는 그가 사용한다고 생각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자아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해 동일시할 때 위험한 정신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융은 지적한다. 개인이 사회적 역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자아가 오직 이 사회적 역할만 동일시하면 성격의 다른 측면이 발달하지 못한다고. 페르소나는 일종의 사회적 가면, 즉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역할에 가까운데 이를 완전히 내면화하고 자기 속의 다른 자아를 형성해내지 못하면 이 사회적 가면의 위상, 그 역할의 수준, 사회적 평가 등에 얽매이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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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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