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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⑧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섹시한 커리어 우먼 이미지로 영화판 ‘올킬’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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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혜진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어머니나 여성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신세대 여성이다. 최민수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눌러 짜라고 하고, 심혜진은 그냥 아무렇게나 눌러 짜면 안 되느냐고 맞선다. 최민수는 심혜진이 목욕을 하고 난 뒤 세면대에 붙은 머리카락에 진저리를 치고, 심혜진은 최민수가 소변을 보고 난 뒤 좌변기에 떨어져 있는 ‘물방울’에 진저리를 친다. 그녀는 남편과의 섹스에서는 전혀 얻어내지 못했던 흥분과 희열을 대타로 얻은 배역에서 멋지게 성공한 후 얻는다. 자기 일의 성취감에서 느낀 흥분은 섹스 따위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다.

최민수는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 깜짝 놀라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심혜진이 자기의 진짜 세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자기의 진짜 세계와 결혼의 세계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한다. ‘나의 진짜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침대처럼 가구의 일종인가?’ ‘여성은 남편에게 섹스를 대주는 빨래판인가?’ 결국 심혜진은 선언한다. “당신과의 결혼생활은 나에겐 악몽이었다”고. ‘결혼이야기’의 성공 이후 남자들 앞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신세대 여성의 캐릭터를 획득한 심혜진은 단숨에 1990년대 새로운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994년작 ‘세상 밖으로’(여균동 감독)에서 그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하게 뛰어논다. 그녀의 배역은 젊은 부자의 세컨드 또는 호스티스다. 그런 그녀가 두 탈옥수 문성근과 이경영을 만나 날뛰기 시작한다.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그녀가 파출소에 끌려간 부분인데,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하자 “내가 나인데 왜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냐”며 대든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데 왜 증명서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문성근과 이경영을 욕하면서 그녀는, 남자들에게 동등한 위치와 똑같은 의리를 요구한다. 그녀는 자신을 ‘썅년’이라 욕하는 이경영을 제압하는 기를 지녔다. 쫓기는 자들이기에 그녀는 항상 뛰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그녀는 뛰는 것이 싫다고 외친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 병수발을 들면서 설거지를 마치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학교로 달려가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또 뛰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심혜진은 달랐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에 출연할 당시의 심혜진(오른쪽)과 진희경.

1995년 심혜진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오병철 감독)에 출연한다. 강수연, 이미연과 함께 출연한 그녀는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여성을 연기한다. 대학 때부터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그녀는 돈 많은 산부인과 의사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편은 아내인 심혜진과 섹스를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며 세컨드 여자와 거리낌 없이 외도를 한다. 그러나 심혜진은 남편에 맞서기 위해 똑같이 맞바람을 피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심혜진은 서울 강남에 사는 부유한 여성의 욕망과 고통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심혜진은 자세히 뜯어보면 결코 예쁜 얼굴을 가진 배우는 아니다. 돌출된 입과 말처럼 긴 얼굴, 약간 사이가 먼 눈. 이것만 놓고 보자면 전형적인 여배우의 얼굴은 아니다. 1960년대였다면 주연 자리는커녕, 배우 근처에 발도 못 붙일 얼굴과 키였다. 하지만 1990년대는 그녀를 원했다. 1980년대의 격변기를 치러내고, 욕망이 발산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그 시기에 그녀는 가장 1990년대다운 여배우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잘 모르는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1990년대를 떠올렸다.

아쉽게도 나는 그녀가 ‘이게 뭐람?’이라 생각했을 법한 영화에서 같이 일했다. 연출부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 감독)’에서 같이 일을 했고, ‘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은 시골 마을마다 꼭 한 명씩은 있었던 약간 모자란 처녀 바보 옥님이 역을 맡았다. 도회적 이미지의 그녀가 1950년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바보 처녀 역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역이었다.

심혜진은 자신의 촬영분이 있기 며칠 전부터 바보 옥님이의 의상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첫 촬영분이 있기 전날에도 그녀는 진도의 시골길을 옥님이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진도의 들판에 홀로 서서 논밭 너머 멀리 해가 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짜 바보 옥님이가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녀가 코카콜라 광고로 뜬 그렇고 그런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초록 물고기’에서 심혜진은 깡패 두목 문성근의 애인이며, 문성근의 부하인 한석규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심혜진은 등에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는, 과거를 알 수 없는 여자였고 이유도 없이 기차를 타고 혼자 어디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깡패들이 나오는 영화이니, 그들이 활개를 치는 밤 시간에 주로 촬영이 이뤄졌다. 깡패의 애인이니, 그녀 역시 밤에만 주로 활동했다. 그녀가 낮에 촬영한 신은 영화의 첫 장면인 기차 신과 마지막 장면인 버드나무집 신뿐이었다. 그녀의 촬영 시간은 늘 새벽 2시부터 6시까지였다.

가장 아름답게 보여야 할 여배우가 매일 밤잠을 설치면서 촬영장에 대기하는 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배우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조감독인 나는 그녀 때문에 항상 스릴을 맛보곤 했다. 그녀가 촬영장에 제 시간에 도착한 날은 앞의 촬영분이 끝나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 해서 그녀의 살벌한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고, 그녀가 좀 늦는 날은 공교롭게도 앞 신의 촬영분이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모두가 그녀를 찾아 나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톱스타의 정중한 사과

강행군으로 밤 촬영이 진행되어 모두가 피곤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그녀가 일을 냈다. 좀 늦게 오기는 해도 조감독인 나만 알고 감독과 스태프는 모르게 촬영 시간을 잘 맞춰왔던 심혜진이 그날은 아주 늦어버린 것이다. 새벽 2시에는 와야 할 그녀가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스태프가 짜증을 내고 그들의 원망을 한눈에 받던 나는 눈길을 피해 촬영장인 나이트클럽의 문 밖 계단에서 스릴을 만끽하며 서 있었다.

늦어도 꽤 늦은 시간. 드디어 그녀와 매니저가 나타났다. 욕을 덜 얻어먹을 방법은 먼저 화를 내는 거라고, 매니저가 내게 화를 내며 불평을 늘어놓으려 입을 떼자 심혜진은 매니저의 말을 막으며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에 대한 원망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톱스타 여배우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본 것은 그때 심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심혜진은 대단히 쾌활하고 천방지축이며 어찌 보면 맹한 구석도 있는 명랑한 배우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웬만한 남자보다 멋진 여자였다.

신동아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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