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분열, 감성의 정치 버리고 통합, 합리의 정치로 거듭나라

21세기형 한국정치를 위한 제언

  • 글: 박세일 서울대 교수·법경제학 sipark@snu.ac.kr

    입력2003-05-23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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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회에는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인,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학자, 권위주의적이고 현상유지적인 관료는 많지만, 변화와 개혁을 위하여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을 조화시킬 수 있는 實事求是의 정책가, 현실적 이상주의자, 전문적 개혁적 정책세력은 크게 부족하다.
    [한국정치의 기본과제]

    분열, 감성의 정치 버리고 통합, 합리의 정치로 거듭나라

    지난 2월25일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연설하는 노무현 대통령. 노대통령은 우리 정치의 국민통합능력과 정책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책무를 안고 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국민의 눈물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권력은 각계각층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야 한다. 자신들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해선 안 된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국민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국민을 분열시키고 불안하고 헷갈리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정치권력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권력이 국론통일과 국민통합에 기여하는가.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덜어주고 있는가. 정치가 국민을 안심시키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만일 반대에 가깝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가 다음과 같은 3가지 중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첫째, 정치가 ‘국민통합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민들 사이의 사상적·이념적 분열이 극심하고 가치관의 갈등이 격화되어 있다. 남북문제에 대한 기본시각의 차이, 한미관계에 대한 기본인식의 차이가 우리 사회의 사상적·이념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 지금 우리 정치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국정운영의 기본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도 심대하다. 예컨대, 경제운영에서 성장을 중시할 것인가 분배를 우선할 것인가, 교육문제에서 평등을 지향할 것인가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중시할 것인가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크다. 남북문제와 국정운영의 기본방향에 대한 이념과 철학의 차이가 세대간 갈등으로, 지역감정의 격화로, 때로는 노사대립으로, 혹은 여야간의 격돌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나 구성원 사이에 이념과 철학의 차이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건설적인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낼 능력이 그 사회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많은 문제에서 이같은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것 같다. 정치가 국민통합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의 정책능력 내지 국정운영능력이 대단히 취약하다. 정책능력이란 정치가 국가목표(national goal)와 국가과제(national agenda)를 바르게 선정하고, 종합적인 국가전략(national strategy)을 짜고,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능력(implementing capacity)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정치에는 바로 이 정책능력이 크게 부족하다. 그동안 ‘국가경영형 정치’를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정치는 3김 시대로 표현되는 ‘권력투쟁형 정치’가 지배해왔다. 최근 들어 ‘사회운동형 정치’가 새로 대두되고 있으나 이 역시 성격상 ‘국가경영형 정치’는 아니다.

    ‘권력투쟁형 정치’나 ‘사회운동형 정치’ 하에서는 주된 정치적 에너지가 권력 획득이나 운동성의 고양에 집중될 뿐 실효성 있는 국가정책 개발이나 국정운영능력을 제고하는 데는 관심이 적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당면한 국가적·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올바른 국가발전전략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능력도 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국민들은 오늘날 교육붕괴의 현실이나 권력형 부패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교육문제나 부패문제의 심각성 그 자체가 아니라 과연 우리 정치가 이들 문제를 제대로 풀 능력이 있으며 혹 정권을 바꾼다 해서 과연 이들 문제가 풀릴 수 있겠는가 하는 정치의 정책능력과 국정운영능력에 대한 근본적 회의 또는 비관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이 만연한 이유는 너무 오랫동안 ‘정책 없는 정치’ 즉 정치의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가 진행된 데 있다.

    분열, 감성의 정치 버리고 통합, 합리의 정치로 거듭나라

    땅바닥에 누워 철강제품을 실은 화물차를 막고 있는 전국운송하역노조 산하 화물연대 회원들. 이제 노사관계도 노사대립의 20세기형에서 노사합작의 21세기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셋째, 정치의 정치능력, 즉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본래 국가정책은 상이한 제(諸) 세력의 이해와 견해를 폭넓게 수렴하되, 반드시 한 차원 높은 공동선(共同善)의 관점에서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정치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에선 이러한 능력, 즉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여러 세력과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견해와 이해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권을 가능한 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 노력한다. 그래서 로비도 하고 시위도 한다. 이럴 때 정치권은 이들의 주장과 견해를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국가라는 공동체의 이익의 관점에서 이들의 주장을 냉정히 분석 평가하고 취사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익과 공익의 관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치능력은 단순히 상이한 견해나 이해를 듣고 그 중간점, 즉 기하학적 중간점을 택하는 데 있지 않다. 반드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즉 공동체 전체의 가치와 이익의 차원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단순히 사익(私益)간의 타협을 유도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공익(公益)의 입장에서 결정을 내리면서 사익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지도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정치를 보면 이익집단의 주장에 끌려다니는 경향이 높다. 특히 ‘사회운동형 정치’가 등장한 후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이익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타협 없는 투쟁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국가적 의사결정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이익집단들 간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시작된다. 결국 이익집단의 사회권력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몇몇 이익집단은 거대한 권력집단이 되어 사실상 국정운영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권력이 인기영합주의(populism)의 유혹에 빠지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결국 정치는 공동선에 기초한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하고 민주주의는 표류한다.

    이러한 때에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이웃사랑, 이웃나눔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을 표방한 가치집단이었던 순수 시민운동단체들까지도 그 일부가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특정정파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집단으로 변모하여, 사회권력화 단계를 넘어 정치권력화한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무정부(anarchy)라 부른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정치는 현재 ▲국민통합능력의 부재 ▲정책능력의 부족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의 부실 속에서 정치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의 질과 수준이 대단히 낮은 상황이다. 우리의 정치상황은 이러한데 21세기 세계화·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풀어야 할 국가과제는 막중하고 어렵기만 하다.

    [21세기 국가과제]

    21세기는 세계대경쟁(mega-competition)의 시대이다. 기업체만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도 경쟁하고 국가도 경쟁을 하는 시대이다. 이제는 세계 각국의 정부가 저마다 자신들이 만든 정치·경제 시스템, 즉 국가(운영)시스템과 국가(운영)정책을 가지고 세계경쟁에 나서는 시대이다. 어느 나라의 국가시스템이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이며 공정하고 투명한가, 어느 나라의 국가정책이 더 생산적이며 정의로운가 등을 가지고 경쟁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각국의 국가시스템과 국가정책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 정치의 질과 수준이다. 따라서 21세기는 각국이 정치의 질과 수준으로 세계경쟁에 나서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세계화·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국가과제에 당면해 있다.

    첫째, 국가의 세계경쟁전략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세계경쟁에서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세계경쟁전략을 세우고 이를 단호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경쟁전략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중화학공업 중심에서 지식정보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슘페터(Schumpeter)적인 ‘투자가 투자를 부르는 경제’ ‘혁신이 혁신을 부르는 경제’를 이루어내야 한다. 이러한 지식정보산업 중심의 구조전환을 주도할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하여 교육과 노동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개혁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동북아 내지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상에 앞장서야 한다. 요약하면 ▲지식정보산업 ▲투자 및 혁신경제 ▲교육 및 노동개혁 ▲동북아 내지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구상, 이 네 가지가 우리나라 21세기 세계경쟁의 핵심전략이다.

    거시경제는 안정화를 목표로 하되 미시경제정책 특히 산업, 조세, 금융, 기업, 노사정책 등은 모두 지식정보산업에의 투자 및 혁신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적극 유치는 물론이고 국내저축을 최대한 동원하여 혁신적 미래투자를 극대화하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교육훈련과 과학기술투자를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을 자율과 책임이 주어지는 개방적 경쟁형으로 바꾸어 세계 최고의 국제적 전문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노사관계도 노사대립의 20세기형에서 노사합작의 21세기형으로 바꾸어야 한다.

    둘째, 각종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여야 한다. 21세기는 위험사회(risk society)가 등장하는 시대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두가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그리고 비연속성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거의 모든 나라가 IMF 긴급지원과 같은 국제금융의 불안정성과 핵·국제테러 등 국제안보의 불확실성에 상시 노출되어 있다. 1975~97년에 전세계는 이미 158개의 외환위기와 54개의 금융위기를 경험하였다.

    증대하는 국제금융과 국제안보의 위험을 낮추기 위하여 국제 차원에서는 IMF체제의 개편과 UN의 강화 등 세계통치구조(global governance)의 재구축이 시급하다. 동시에 개별국가 차원에서도 국제투기자본으로부터 자국경제를 보호하는 노력과 다자간 협력을 바탕으로 핵과 전쟁, 그리고 테러위험을 최소화하는 자구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도 각종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급격한 기술진보, 세계경쟁의 격화, 빈번한 구조조정 등으로 언제 직장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고용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비정규직의 급증에서 볼 수 있듯이 고용의 질도 하락하고 있다. 인적·물적 교류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면서 각종 사고와 재난이 대형화하고 그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 구축이 필수적이다. 실업보험, 비정규직 보호, 산재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각종 재난보험, 공적부조 등등의 분야에서 효과적 사회안전망을 낭비 없이 구축하여 사회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21세기 핵심적 국가과제의 하나이다.

    새로운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 확립이 과제

    셋째, 새로운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21세기에는 어느 나라든 공동체적 연대가 약해지고 그 정체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사회내부의 이념적 계층적, 지역적 인종적 분열과 갈등이 심화된다. 세계화·정보화가 빈부격차와 정보격차의 심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최고부자 3명의 재산의 합이 가난한 세계 인구 6억 명의 연간 소득의 합보다 큰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결과 어느 나라에서든 형평과 정의를 요구하는 사회세력과 자유와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세력이 대립한다. 또한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외국에서 밀려오는 외래 소비문화와 갈등한다.

    한마디로 세계화·정보화의 물결을 타고 승리하는 그룹과 그 물결에 밀리는 그룹 간에 분열과 갈등과 대립이 증대한다. 그 결과 국가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심력은 약해지고 원심력만 강해진다. 공동체는 공동화(空洞化)하고 개인은 파편화하며 집단은 개체화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여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국가과제가 된다.

    21세기 각국에서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를 만들어나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시민운동 등)이다. 국가가 정의를 대변하는 조직이고 시장이 효율을 실현하는 제도라면 시민사회는 박애 혹은 사랑을 실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는 구체적으로는 이웃사랑, 이웃나눔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것을 실천하는 공간이 바로 시민사회이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발전할수록 공동체적 연대는 강화되고 공동체적 정체성은 확고해진다.

    시민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하여 국가는 ▲시민적 덕성을 교육하는 민주시민교육(civic education)에 적극 투자해야 하고 ▲시민사회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해서는 결코 안 되며 ▲많은 국정과제를 시민사회와 협력해가며 풀겠다는 열린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럴 경우 그 나라의 시민사회는 성숙할 것이고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21세기 세 가지 국가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질과 수준이 크게 높아져야 한다. 즉 정치의 국민통합능력, 정책능력,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이 크게 높아져야 한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의 경우 이 모든 능력이 크게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 정치의 질과 수준을 획기적으로 제고시켜나갈 것인가?

    이념과 감성의 분열을 막고 국론을 통일하여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책탕평책을 써야 한다. 정책탕평책이란 모든 국정과제를 시비의 문제나 선악의 문제로, 즉 절대적 가치간의 갈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그 정책의 실공(實功) 또는 효과성(effectiveness)에 대한 비교평가의 문제로 보는 태도, 즉 가치 상대적 또는 가치 중립적 문제로 보는 태도이다.

    본래 탕평책은 조선조 영·정조 시대에 많이 논의되었던 정책으로 인재탕평책과 정책탕평책이 있었다. 그런데 인재를 여러 당파에서 골고루 써야 한다는 인재탕평책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책탕평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정책탕평책은 당시의 표현을 빌리면 국가정책을 논함에 있어 누가 아주 옳고 누가 아주 그른가를 가리는 시비론에서 벗어나 누구의 주장이 우수하고 누구의 주장이 열등한가를 가리는 우월론의 차원에서 논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정책선택의 문제를 옳고 그름을 밝히는 시비의 문제로 보지 말고 어느 정책이 더욱 효과적인가를 밝히는 우열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의 정책탕평책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격화되고 있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가치의 분열과 대립을 줄여나가려면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하여야 한다. 첫째,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상과 가치 그리고 이념의 절대화를 피하여야 한다. 자신의 주장과 신념이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자신의 믿음은 절대 잘못될 수 없다는 무오류성을 고집하는 한, 이념과 가치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없다.

    둘째, 모든 정책적 논의나 주장을 이념·사상·가치의 문제로 돌리지 말고, 각각의 주장의 정책효과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문제로, 상대적 평가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정책적 주장을 옳고 그름의 문제, 즉 가치의 문제로 다루지 말고 정책효과의 우열에 대한 분석과 평가라는 과학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책논의의 궁극의 목적은 국가발전과 국리민복일 터인데 이 점에서는 여야, 좌우, 노소, 진보와 보수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아직까지 경제성장을 중시한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국가의 분배개선 노력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분배를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못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성급히 이념과 가치관의 대립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정책이 이 두 가지 목표의 동시달성을 가능하게 하겠느냐가 문제이다. 이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방안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과 공정한 분배가 함께 달성될 수 있는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

    교육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교육의 형평성을 중시한다고 하여 우리 교육의 국제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또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주장한다고 하여 가난한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 성급히 모든 정책논의를 진보와 보수 혹은 좌우의 이념 대립, 가치관의 대립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분명 잘못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이념과 가치와 사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학적 객관적 분석 결과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보다 쉽다. 그렇다면 국론통일과 국민통합을 위하여 국가정책의 문제를 가치선택의 문제로 다루지 말고 과학적 실증적 분석의 문제로 다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탕평책의 주 내용이다.

    [정책세력을 키워야 한다]

    정책부재의 정치를 타파하고 정치의 정책능력과 국정운영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요 정책과제에 대하여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추진능력까지 함께 갖춘 개혁적 정책세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정책세력이 크게 부족하다. 이율곡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창업에 능한 정치세력도 있고 수성(守成)에 능한 관료세력도 있지만 소위 경장(更張)에 능한, 즉 개혁에 능한 정책세력은 없는 셈이다.

    그동안의 우리나라 정치가 국가경영형이 아니었던 탓에 정치세력은 대부분 정책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 결과 정책부재의 정치가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관료들은 정책능력은 있으나 그것은 현실유지나 관리에 능한 능력이지 변화와 개혁을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는 개혁적 정책능력은 아니다. 또한 학계도 그동안 상아탑 속에 안주하여 추상적인 현실비판에만 치중했다. 대다수 학자들은 공직 참여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는 단순한 원칙론과 비현실적 공론(空論)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는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인,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학자, 권위주의적이고 현상유지적인 관료는 많지만, 변화와 개혁을 위하여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을 조화시킬 수 있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책가, 현실적 이상주의자, 전문적 개혁적 정책세력은 크게 부족하다.

    분열, 감성의 정치 버리고 통합, 합리의 정치로 거듭나라

    공동체적 연대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시민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나라당사 앞에서 국회의 정부예산심의 과정을 공개하라며 시위를 벌이는 경실련 회원들(2002.11.4)

    국가경영형 정치로의 정치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책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정책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하나는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두뇌집단)를 많이 만드는 일이다. 특정 이념이나 정파로부터 독립되어 오직 국익과 공익 우선의 입장에서 국가정책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싱크탱크가 있어야 한다. 이들이 국가전략과 국가정책에 대하여 끊임없이 분석, 연구, 비판, 토론하고 새로운 청사진과 정책대안들을 제시해야 한다. 한마디로 미국의 부르킹스연구소와 같은 중립적이고 권위 있는 민간 싱크탱크가 많아져야 한다.

    주지하듯이 미국에서는 민간 싱크탱크들을 입법 행정 사법 언론에 이어 제 5부(the fifth estate)라고 부를 정도로 국가경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정부출연연구소나 기업연구소들은 있지만, 순수공익의 관점에서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민간연구소는 하나도 없다.

    정책세력을 키우기 위한 두 번째 과제는 국립이든 사립이든 국가정책대학원을 많이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경영을 가르치는 경영대학은 있으나 국가정책을 연구하고 국가경영을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문무(文武)를 겸한, 이론과 실무를 겸한,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한 국가경영인재를 교육하는 기관이 전혀 없다.

    국가정책대학원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법학 행정학 사회학 경영학 등의 학제적 연구를 중시하여야 하고 반드시 이론연구가(교수, 학자 등)와 현장경험자(전직 고급공무원, 대기업의 CEO 등)가 공동 연구하고 공동 교육해야 한다. 특히 국정운영 경험이 있는 고급공무원(전직 장차관 등)들이 교육과 연구에 참여하여 자신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국정운영 경험이나 성공과 실패의 교훈이 모두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고 다음 국정운영자나 다음 세대에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국정운영의 학습효과가 거의 전무한 것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 장관이 바뀔 때마다 유사한 정책실패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

    [지도자학을 가르쳐야 한다]

    정치의 정치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교교육, 가정교육, 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학(on leadership : 治人學 牧民學 安民學 帝王學 등)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학문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지도자학이 있었으나 서구학문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지도자학이 빠져버렸다. 따라서 사회 각 부문의 지도자들이 지도자학을 모르고, 지도자로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우지 않은 채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 역할도 하고 지도자 행세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자는 결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학에 기초한 엄격한 자기점검과 자기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는 아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나 지도자가 되려고 나서는 풍조가 생겼다. 이 잘못된 풍조가 실은 우리나라 정치실패의 주요 원인의 하나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학생들은 물론이고 성인들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지도자학을 배워야 한다. 지도자학은 철저한 자기수양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수기(修己)가 치인(治人)의 기본이 된다. 자기수양 없는 지도자학은 있을 수 없다. 본래 지도자학은 자기수양과 자기훈련을 통하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일할 공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자기수양을 통하여 훈련된 지도자는 당연히 사회와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 즉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사람이다. 천하의 일을 개인의 이해관계에서가 아니라 만백성의 이해관계에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선공후사와 무사애민(無私愛民)의 정신이 출중하여야 지도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지도자를 대표로 뽑고 그들을 존경하고 따라야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

    둘째, 법치주의와 더불어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반드시 함께 세워야 한다. 법치주의의 확립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모든 정치발전과 정치성공은 법치주의의 발전과 함께 진행된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법치주의가 도입되었지만 아직 성공적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국가운영에 있어 덕치주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덕치주의란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도덕적 감화력으로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민생안정과 사회발전을 이룩하려는 국가운영원리이다. 이러한 덕치주의는 지난 조선조 500년간에는 국가운영원리로서 비교적 잘 작동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의 솔선수범과 도덕적 감화력이 조선시대의 안정과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덕치주의는 국민들의 심성에, 그리고 우리의 정치문화에 나름대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해방 후 서구제도가 들어오면서 덕치주의는 일거에 후퇴하고 법치주의만이 활보하게 되었다. 국가운영에 있어 지도자들의 솔선수범과 도덕적 감화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려 결국 덕치 없는 법치만이 횡행하게 되었다. 덕치가 없어지니 국민은 존경하고 따를 지도자를 찾기 어려워졌고, 존경할 만한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없으니 국민의 준법정신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덕치의 부재가 법치의 부실을 초래한 셈이다.

    셋째, 국민 모두에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군부독재와 싸우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느라 독재를 타도한 후 어떠한 민주질서, 어떠한 내용의 민주사회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토론이나 국민적 합의가 없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무제한 주장할 수 있는 제도로 오해하고 있다. 목소리 크게 내고 힘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소위 협상민주주의(bargaining democracy)라 불리는 천민민주주의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위하여, 즉 국익과 공익을 위하여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스스로 억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억제 속에서 성찰과 토론을 통하여 공동선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소위 공화주의적 민주주의(republican democracy)가 바로 이러한 진정(眞正)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가 크게 부족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코 쉽게 정착되는 제도가 아니다. 대단히 깨지기 쉽고 후퇴하기 쉬운 약한 제도임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소중히 다루어야 하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개혁적 국가경영세력 총동원하라

    우리 사회에 더 이상의 국론분열과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집권세력 스스로가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과거의 경험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야든 여든, 진보든 보수든 사회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열린 마음과 포용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항상 중심에 앉아서 노소(老少) 및 좌우를 모두 추슬러 나가야 한다(中庸에서의 표현을 빌리면 執其兩端하여 用其中於民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국가정책 관련 토론에서 반드시 정책탕평책을 활용하여야 한다. 국가정책에 대한 논의가 너무 쉽게 이념과 사상의 대립 혹은 가치관의 갈등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정부뿐 아니라 학계, 언론,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정치를 국가경영형 정치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비록 수가 많지 않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 축적된 개혁적 정책세력, 개혁적 국가경영세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이론과 실무에 밝고 개혁의지에 불타는 이들 개혁적 정책세력의 능력과 경륜을 100% 가동해야 한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이러한 개혁적·전문적 인재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각종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싱크탱크의 활성화, 특히 민간의 독립적 싱크탱크의 활성화와 국가정책대학원의 도입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정치의 정치능력, 즉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치세력과 정책세력이 모두 지도자학을 배우고 실천하여야 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지도자학을 배워 선공후사와 솔선수범의 도덕적 감화력을 가지고 국민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덕치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법치가 바로 설 수 있고, 덕치와 법치가 함께 바로 설 때 비로소 우리나라 정치의 집합적 의사결정능력도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정치가 인기영합주의나 천민민주주의에 빠지지 않고 성공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의 국민통합능력, 국가경영능력, 집합적 의사결정능력이 크게 제고되면 정치개혁의 제일 단계가 완료된다. 다음 제 2단계에서는 정치세력과 정책세력이 힘을 합쳐 ▲나라의 세계경쟁전략을 바르게 세워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하고 ▲증대하는 각종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며 ▲우리나라의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하고 정체성을 높이는 노력을 함께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두 열매를 맺는다면 21세기 우리나라의 미래는 한없이 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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