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美 자금 추적 피하려 국정원과 대북송금 루트 협의했다”

특검 조사받은 백성기 전 외환은행 외환사업부장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ns@donga.com

    입력2003-05-23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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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환은행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 국정원, ‘통상적 방법’으로 송금
    • 조광무역은 없어진 지 오래
    • ‘처음 보는 계좌’로 돈 보냈다
    • 송금 즉시 인출 가능…입금 지연으로 남북정상회담 연기됐을 리 없어
    “美 자금 추적 피하려 국정원과  대북송금 루트 협의했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의 실체가 현대그룹을 넘어 김대중 정권 차원의 조직적 주도와 은폐 기도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5월12일 송두환 특별검사팀에 소환된 최규백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라 대북송금이 이뤄졌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진 데다, 지난 1월 이 사건을 조사한 감사원이 조사 결과를 축소,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기 때문이다.

    사건의 초점이 DJ 정권으로 집중된 것은 5월2일 이후. 이날 특검에 소환된 백성기(白誠基) 전 외환은행 본점 외환사업부장이 조사를 받고 나가면서 “국정원이 송금을 주도해 마카오의 한 북한 단체 계좌로 2235억원(2억달러)을 보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면서부터다. 백 전부장은 또 “국정원 직원들이 송금 수표에 배서했으며, 이들의 신원을 감사원에 통보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백 전부장의 주장은 임동원 전원장이 “국정원은 현대상선의 요청으로 환전 편의만 제공했다”고 한 것이나 감사원이 “수표에 배서한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백 전부장은 이같은 내용이 대서특필되자 이날 밤 외환은행에서 기자회견을 자청, “언론이 내 말을 잘못 전달했다”며 일부 발언을 번복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을 계기로 여론은 국정원을 비롯한 정권 핵심 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분위기를 타고 특검 수사도 급물살을 탔다. 특검은 5월6일부터 국정원 직원들을 잇달아 소환해 본격적인 조사를 벌였고, 감사원도 관련자료를 내놓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좀더 구체적인 정황을 들어보기 위해 백 전부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할 얘기가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집과 사무실로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한 끝에 5월13일 오후 어렵사리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국정원이 주도했다는 뜻 아니다

    -왜 말을 바꿨습니까.

    “특검 조사를 받고 나오니 기자들이 지하철역까지 따라붙으며 질문을 퍼붓습디다. 그래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그걸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해서 쓰고는 제가 무슨 양심선언이나 한 것처럼 난리를 치길래 저녁에 기자들을 불러다 해명을 한 겁니다.”

    -“국정원이 주도했다”는 발언이 핵심인데….

    “기자들이 ‘외환은행이 송금을 주도했냐’고 묻길래 ‘외환은행이 무슨 죄가 있겠냐,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지’라고 했는데, 그걸 ‘국정원이 주도했다’고 썼더군요. 특검에서 뭘 잘했느니 못했느니, 확인을 했느니 안 했느니 하면서 시달리고 나오니까 서글픈 생각이 듭디다. 이런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중간에 있는 애꿎은 은행원들이 옷을 벗거나 감옥에 가잖아요. 이번에도 우리 직원 중에 누군가가 실무를 잘못했다고, 가령 금융실명제나 외환관리법, 남북교류협력법을 어겼다고 다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외환은행이 뭘 주도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 겁니다. 국정원이 주도했다고 한 적은 없어요. 국정원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을 거예요. 어제 최규백 전 기조실장이 ‘국정원은 송금의 중간 경로에 불과했고,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던데, 아마 그게 사실일 겁니다. 그 사람인들 당시엔 그게 무슨 돈인지, 왜 보내는지 알았겠어요?”

    -국정원 직원들이 수표에 배서했고, 이들의 신원을 감사원에 알렸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국정원에서 배서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서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감사원에서 감사를 했으니 감사원에서 알겠지’라고 했을 뿐입니다. 실명으로 배서했다면 신원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국정원은 그 전에도 수표를 가져와서 해외 송금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외환은행에 계좌를 개설해놓고는 있지만, 보안 때문인지 계좌이체는 잘 안 했어요. 대북송금도 그런 통상적인 송금 절차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대북송금과 관련해 외환은행에서 여러 차례 회의가 열린 것으로 압니다.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송금했다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그 문제로 국정원에 가서 협의하고 돌아오면 송금 실무를 담당할 영업부장 등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해 뭘 물어보면 답해주는 정도였죠. 그걸 회의라고 할 수 있나요.”

    “美 자금 추적 피하려 국정원과  대북송금 루트 협의했다”

    송두환 특별검사팀은 백성기 전 부장에 대한 조사 이후 수사를 급진전시켰다. 기자들에게 수사 상황을 설명하는 송 특별검사.

    -국정원과 어떤 것을 협의했습니까.

    “아시다시피 북한은 테러 지원국 리스트에 올라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금 추적을 할 수 있는 경로로 북한에 송금하면 바로 몰수됩니다. 따라서 북한에 돈을 보내려면 송금 루트를 잡아주는 것-이걸 ‘라우팅(routing)’이라고 하는데-이 가장 중요합니다. 극히 조심하지 않으면 드러나거든요. 이처럼 보안을 유지하면서 송금하는 것, 상대방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원화로 가져온 돈을 미국 달러로 맞추는 것 등에 관해 협의했습니다. 소소한 송금 절차가 아니라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조언을 한 거죠.”

    주목할 만한 발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과 국내 최고 수준의 외환거래 전문가가 ‘혈맹’ 미국의 자금 추적 감시망을 뚫고 ‘테러 지원국’을 지원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는 얘기 아닌가. 상식 밖의 일이지만, 상식만으로 통하지 않는 게 남북관계다. 현실은 아이러니다.

    -국정원이 왜 외환은행을 대북송금 파트너로 골랐을까요.

    “라우팅 때문이죠. 외국 은행들 간에는 돈을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국내 은행들 간에 타행환이 가능한 것은 금융결제원이 중간에서 거래를 연결시켜주기 때문이죠. 외국 은행간 거래에선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없어요. 그래서 정산기관을 거쳐서 보내거나 아니면 양쪽 은행 모두에 계좌가 있어야 합니다.

    외환은행의 경우 세계 6000여 개 은행에 계좌가 있습니다. 해외 지점도 많고요. 그만큼 송금 루트가 많아 라우팅의 폭이 넓다는 얘기죠. 국내 한 시중은행의 경우 해외 은행 계좌가 100여 개에 불과한데, 이런 은행은 자기들이 처리할 수 없는 해외 송금 요청이 들어오면 외환은행에 의뢰합니다. 반면에 외환은행은 고객이 원하는 곳 어디로든지 다른 은행에 의뢰하지 않고 직접 송금할 수 있어요. 외화 현찰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고, 직원들도 이 분야 전문가들입니다. 그러니 국정원도 외환은행을 통해 송금하는 게 유익하고 안전하다고 판단했겠죠.

    이런 사정 때문에 비단 국정원뿐 아니라 정부 부처 대부분이 외환은행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재계 고위층이 관련된 외화 밀반출 사건 같은 게 터지면 외환은행이 다 덮어쓰곤 하죠. 아마 북한도 외환은행의 이런 특성을 잘 알 테니 우리와 일하는 게 편했을 겁니다.”

    수취인 명의는 무의미

    -국정원의 송금 정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그건 제가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국정원에서 협의만 했고, 송금은 우리 영업점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러니 그건 영업부장 소관이죠. 당시엔 저도 구체적인 송금 과정을 몰랐어요. 나중에 이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관련부서 등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알게 됐습니다. 특검이 없었으면 저는 드러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업무 협의에 가서 말만 하고 왔기 때문에 흔적을 남긴 게 없거든요.”

    -어느 계좌로 돈이 입금됐는지 아시죠?

    “알지만 금융실명제법 위반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북한 아태평화위가 관리하는 ‘조광무역’ 명의의 중국은행(Bank of China) 마카오지점 계좌가 문제의 계좌로 거론돼왔는데, 백 전부장이 특검 조사 후 “조광무역 계좌는 아니다”고 해서 구구한 억측을 낳았습니다.

    “조광무역은 1990년대에 북한이 대외적으로 종합상사 기능을 맡기려고 만들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어요. 그후 북한의 무역과 대외 거래가 늘면서 ‘금강산’ 등 옛 조광무역 같은 곳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조광무역 계좌는 아니라고 한 거예요. 누군가는 그게 법인 계좌냐 기관 계좌냐고 묻던데, 사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 법인이 있을 리 없죠. 다 기관들이에요.”

    -대북송금이 이뤄진 2000년 6월9일 이전에도 국정원이 문제의 계좌로 돈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보는 계좌였어요. 하지만 수취인 계좌의 명의가 누구로 돼 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계좌야 어디에 어떤 이름으로 열어놓든 무의미해요. 그 뒤에서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하고만 입을 맞추면 되니까. 가령 똑같은 사람이 어제는 마카오에 조광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은 홍콩에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계좌를 열어 돈을 보내라고 할 수도 있죠. 송금하는 은행은 돈을 보내는 사람의 신원만 확인하지, 받는 사람에 관한 정보는 알지도 못하고 확인할 수도 없어요.”

    -임동원 전원장이 북한으로 돈을 보냈다고 한 날은 6월9일인데, 현대상선은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아 외환은행에 입금한 2235억원을 6월10일에 출금했습니다. 그래서 ‘국정원이 북한과 합의한 송금 날짜를 맞추기 위해 급한 대로 국정원 돈을 보내고 나중에 현대상선 돈으로 메웠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송금 당시엔 그게 현대상선 돈인지 누구 돈인지 알지 못했어요. 현대상선이나 국정원 계좌를 통해 송금한 것이 아니라 국정원의 해외 송금 관행대로 직접 들고 온 수표 26장을 환전해서 보낸 거니까요. 그게 누구의 돈이냐, 송금이 먼저냐 출금이 먼저냐 하는 것은 특검에서 이미 파악하지 않았을까요.”

    -송금일인 6월9일은 금요일입니다. 그런데 주말이 끼이는 바람에 북한의 마카오 계좌에 실제로 돈이 들어온 것은 다음주 월요일인 6월12일이라는 보도도 있습니다. 당초 남북정상회담은 6월12∼14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회담 개시 이틀 전인 10일 북한이 갑자기 일정을 13∼14일로 하루씩 늦춘 것도 입금이 지연됐기 때문이라는 얘긴데요.

    “저도 그 기사를 읽었는데 잘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입금 지연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연기됐다는 것은 국제 은행간 거래 관행을 몰라서 하는 얘깁니다. 국제 은행간 송금거래에서 수취인이 돈을 찾을 수 있는 날, 즉 ‘이펙트(effect)’ 날짜는 ‘T(Transaction) + 2일’입니다. 거래일로부터 이틀이 지나야 출금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거래은행끼리 합의하면 송금 즉시 고객이 돈을 찾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9일에 송금했으니 이펙트 날짜는 12일이지만, 고객이 9일에 출금하기를 원하면 그날 돈을 내주자’고 합의하고, 송금한 은행이 상대방 은행측에 송금 전문만 보내주면 돼요. 다만 이펙트 날짜보다 이틀 앞서 출금했다면 은행에 이틀치 이자만 쳐주면 됩니다.

    2억달러 대북송금의 경우 액수가 워낙 크니 이자를 계산하는 데는 이펙트 날짜가 중요했겠지만, 수취인이 원하는 날짜에 돈을 인출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국내에서도 개인이 타행환으로 수표를 입금하면 원칙적으로 만 하루가 지나야 돈을 찾을 수 있지만,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 그 전에 인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렇게 해줍니다. 하물며 개인도 아니고 은행간 거래인데 그런 편의를 못 봐주겠어요?

    9일에 보낸 돈이 ‘T + 2일’ 조건 때문에 12일에 입금됐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2일은 영업일 기준이에요. 따라서 9일이 금요일이면 토·일요일인 10일과 11일은 영업일이 아니므로 12일이 아니라 13일에 입금돼야 하거든요.”

    백성기 전부장은 외환은행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외국환과 국제 은행간 업무를 다뤄온 베테랑 외환통. 뉴욕과 유럽 금융 중심지에서 현지법인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이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외환은행 자회사인 전자무역 결제회사 MP&T(Meta Payment & Trust)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내가 범죄 공모했나

    그는 “내가 가진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활용해 남북교류에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여겨왔는데, 지금은 무슨 범죄를 공모한 것처럼 비쳐지고 있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2000년 6월13∼15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저는 SWIFT(국제은행간 금융정보통신망) 이사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은행관련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CNN 등에서 정상회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어요. 이를 본 각국 은행 대표들이 제게 몰려와 축하해주더군요. 그래서 즉석에서 짤막하게 감사 연설까지 했습니다. 감격스럽기도 했고, 두 정상의 만남을 위해 저도 미력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어요. 저는 앞으로도 국가가 제 전문지식을 빌려달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달려가 조언하고 협의할 겁니다. 저와 송금문제를 협의했던 국정원 사람들도 일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려고 시종 진지한 자세로 참 열심히들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데없이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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