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깔리자 거리는 다시 한번 변신했다. 밤 11시, 거리 곳곳에서 ‘발티카’ ‘루슬란’ 같은 네온사인을 반짝이는 외국인 전용 술집 앞에서 늘씬한 금발 미녀들이 행인의 옷자락을 잡아 끌고, 다른 한편에선 한국 아줌마들이 “러시아 아가씨 있어요” 하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멀리 골목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부산 동부경찰서’ 표지를 단 승합차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다들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술집 문을 열자 러시아 노랫가락이 귓전을 때린다. 익숙한 솜씨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아가씨 례나 투르니예바(27)는 하바로프스크 출신이었다.
“러시아 마피아가 부산에 있는 것 같냐고요? 글쎄요, 가끔 그런 일은 있어요.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젊은 애들이 웬 사진을 들고 다니며 ‘이 사람 본 적 있느냐’고 심각하게 묻곤 하죠. 경찰 아니었냐고요? 에이, 내가 경찰하고 양아치도 구분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례나는 함께 기거하고 있다는 동료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유난히 돈을 잘 쓰는 40대 아저씨와 사귀는친구를 부러워하던 참이었는데, 어느날 그 남자가 “쫓기고 있어서 부산을 떠나야 한다. 다신 못 볼 것 같다”며 전화를 하곤 연락이 끊겼다는 것.
“뭐, 마피아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죠. 그렇지만 이 동네에 러시아에서 도망치듯 온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에요. 돈을 못 갚았거나, 일을 저질렀거나. 그게 아니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요.”
“러시아인 있는 곳엔 그들도 있다”
골목 뒤편 으슥한 노천술집에는 초라한 차림의 두 50대 러시아인이 익숙한 동작으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발로자’라고 부르라고 할 뿐 끝내 성을 가르쳐주지 않은 중년남자는 5년 전 선원으로 처음 부산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자주 드나들다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고려인 여자와 마음이 맞아 아예 주저앉게 됐다는 것. 불법 체류자였다.
“마피아가 도대체 뭐야. 배 타고 왕게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다 마피아들이야. 그거 잡아서 그냥 일본이나 한국에 파는 거 러시아 법 위반이라고. 그러다 싸움 붙으면 바다에서 주먹질도 하고 칼부림도 하고 총 쏘는 놈도 있고, 그게 마피아지 별거야. 그렇게 따지면 이 술집에 오는 친구들 중에도 그런 사람 많아. 길에서 손님 끌고 있는 저 아가씨들 누가 데려왔겠어. 꼭 양복 입고 시가 피고 카지노 다녀야 마피아야?”
새벽 한시. 여관 현관을 나서는 러시아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라고 말하자 재미있다는 듯 쳐다본다. 당연히 피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순순히 인터뷰에 응한다.
“한 달에 100만원쯤 남는 것 같아요. 일이 매일 있는 건 아니니까요. 3주는 서울에 가 있고 한 주는 부산에 내려와요. 여기 고향친구가 있거든요. 일은 아줌마들이 핸드폰을 걸어 알려주죠. 나는 무조건 10만원만 받아요. 아줌마가 중간에서 얼마를 챙기든 자기 능력이죠. 그게 일하기 편해요.
어디에 감금당하지 않냐고요? 아니요, 그냥 내가 돈 벌고 싶어서 나오는 거예요. 아, 들어올 때는 러시아 중개인에게 400달러 줬어요. 속았다는 생각은 들죠, 한국 가면 한 달에 그 만큼씩 번다고 했으니까. 마피아요? 있겠죠. 러시아 사람 있는 곳에 마피아가 없을 수는 없어요. 하다못해 돈 빌려줬는데 안 갚는 사람 있으면 대신 받아내 줄 사람은 필요하잖아요.”
한동안 거리를 헤매고 다니지만 ‘마피아’라는 개념은 갈수록 모호해진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마피아’라는 말과 러시아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피아’라는 말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 러시아 연해주에 10년째 머무르고 있는 한 한국인 사업가는 “한국에서 마피아라 하면 곧 고도로 조직화한 범죄단체를 의미하지만, 러시아에서 마피아는 범죄자든 화이트 칼라든 ‘불법·탈법을 불사하는 자기들만의 이너서클’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