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남아도는 가스 팔려는 러시아, 美 엑슨 모빌의 장삿속”

핵 포기 대가, 사할린 가스 北 제공설 막후

  • 글: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3-05-23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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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할린 가스, 공급과잉” 한국가스공사 보고서
    • 러시아, 미국 에너지사 등 북핵 해법으로 사할린 가스 띄우기 주도
    • 청와대, “북에 사할린 가스 주는 방안도 고려” 내부 논의
    • 北, “이르쿠츠크 가스보다 사할린 가스 선호”
    • “사할린 가스 북 공급은 ‘에너지 주권’ 북에 넘겨주는 행위”
    • “이르쿠츠크 가스관도 북한 통과 아닌 서해 해저로 와야”
    “남아도는 가스 팔려는 러시아, 美 엑슨 모빌의 장삿속”
    러시아 이르쿠츠크와 사할린에서 각각 대규모 천연가스 개발사업이 착수됐다. 한국은 중동, 동남아로 쏠려 있는 에너지 공급원을 다변화하는 한편 공급단가를 내리는 효과도 있어 러시아 가스를 수입할 계획이다. 일단 러시아 천연가스는 러시아 유전에서부터 새로 건설되는 가스관을 통해 한국에 공급될 예정이다.

    당초 한국은 이르쿠츠크 유전에서 가스를 공급받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에 ‘사할린 가스’를 공급하자”는 별도의 대안이 급부상했다. 한국 청와대, 러시아, 미국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할린 가스 북한 제공 아이디어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북한도 미국 에너지 회사인 FSI사에 사할린 가스관의 북한통과 구간 건설 사업 독점권을 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최초의 시베리아 자원 공급 사업

    북핵 해결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가스 공급원을 이르쿠츠크, 사할린 중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여권 핵심부와 안보 파트, 석유업계에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가스공사는 2003년 5월 내부 보고서에서 “사할린 가스의 공급과잉이 예상된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사할린 가스 북한 공급설이 나도는 진짜 이유’는 북핵 사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할린 가스개발 참여자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러시아 가스 도입 문제를 수년째 연구해온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 상층부의 정확한 뜻을 몰라 공개적 문제제기는 못하고 있지만 이 논란에 대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사할린으로 가스관을 빼자는 아이디어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이며,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한국은 국익과 에너지주권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왜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



    러시아 동시베리아지역 바이칼호 연안 이르쿠츠크 천연가스 유전의 경우 총 매장량은 8억4000만t으로 추정되며 빠르면 2008년부터 연간 2000만t이 생산될 예정이다. 한국측은 이 유전에서 연간 700만t을 공급받는다는 계획이다. 나머지 생산량은 대부분 중국 북부지방에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가스공사의 ‘중장기 동북아 가스 배관망 구축계획’에 따르면 이 유전지대에서 한국 평택항까지 연결되는 가스관의 총 길이는 4100km 정도다. 가스관은 이르쿠츠크-중국 만주 하얼빈-창춘-선양-다롄을 거쳐 서해 심해를 통해 한국 평택항으로 오는 노선, 이르쿠츠크-중국 만주 하얼빈-창춘-선양-단둥을 거쳐 북한 영토와 국내 육로(신의주-평양-개성-경기 일산-서울)를 통과해 평택항으로 오는 노선 등 두 가지가 고려되고 있다. 평택항은 가스관을 통해 들어오는 파이프라인천연가스(PNG)를 액화천연가스(LNG)와 혼합해 전국에 공급하는 기지다.

    천연가스는 발전용, 산업용, 난방용(도시가스), 자동차연료용으로 주로 이용되는 친환경적 에너지며 원유에 주로 의존하는 에너지 소비 패턴의 변화 양상에 따라 향후 소비량이 증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르쿠츠크 가스의 경우 중동이나 동남아에서 배로 수송되는 현재의 천연가스 수송체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받으므로 공급단가가 현재보다 20% 정도 저렴해질 수 있다고 한다. 국내의 연간 천연가스 수입량은 1800만 t으로 향후 이르쿠츠크 가스는 국내 총 천연가스 수입량의 40%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르쿠츠크 유전개발과 가스관 신설에는 약 110억달러가 필요하다. 이 중 한국은 중국과 한반도의 접경지역에서 평택항까지 이어지는 구간의 가스관 건설 공사비(약 12억~13억달러 추산)를 분담할 예정이다.

    이르쿠츠크 가스관 생산-공급 사업의 주체는 한국의 경우 한국가스공사, LG, SK 등 9개사 컨소시엄이며 러시아는 석유회사인 RP사인데 RP사의 대주주는 영국 석유회사인 BP사이다. 중국은 CNPC(중국국영석유회사)가 이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한국은 1996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하면서 이 사업에 참여했으며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기간 중 한-중-러 3자 추진방식으로 사업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재까지 21차례 3국 실무회의를 거쳤으며 2003년 6월말 타당성 조사결과가 나올 예정이었으나 중국의 사스 사태로 베이징 회의가 잇따라 연기되면서 다소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르쿠츠크 사업이 최근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 전체 판을 뒤흔드는 새로운 국면이 조성됐다. 러시아 사할린 가스 유전과 한국을 연결짓는 사업 구상이 갑자기 도처에서 제기된 것이다.

    라종일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은 2003년 3월31일 외국 신문 인터뷰에서 북핵 해결을 위해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측에 제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천연가스는 이르쿠츠크나 사힐린에서 들여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할린 가스의 북측 제공 가능성을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다음날 테이무라즈 라미슈빌리 주한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에 공급하기 위해 러시아와 북한을 연결하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가스관 프로젝트’가 한-러 정부간에 이미 합의됐다”고 밝혔다. 현재로선 러시아-북한을 직접 연결하는 노선은 사할린 노선뿐이다. 러시아정부는 라보좌관 언급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할린 노선을 기정사실화하려 한 것이다.

    청와대와 한국 통일부는 라보좌관과 러시아 대사의 발언에 대해 “검토된 바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러시아 가스 공급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기자에게 “라보좌관은 사할린 가스 노선 문제에 대해 이후에도 회의를 한 적이 있다. 영국 박근욱 박사와도 사할린 가스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식적 부인에도 사할린 가스 문제의 불씨는 정부 내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의미였다.

    사할린 노선 띄우기는 미국측에 의해서도 제기됐다. 미국 셀리그 해리슨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바로 가스를 공급해주는 사할린 가스전 개발사업에 한국, 북한, 러시아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사할린 1광구는 현재 미국 석유회사인 엑슨모빌이 지분의 30%를 확보하고 있다. 이르쿠츠크 가스 사업엔 영국 회사가 참여하는 반면 사할린 가스 사업엔 미국 회사가 참여하고 있는 모양새다.

    미 FSI, 사할린-북한 연결 노선 로비

    미국 정부는 사할린 가스의 북한 제공설에 못마땅한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북핵 협상도 하기 전에 당근부터 준다”는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향후 북핵문제가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북한에 제공하는 가스를 이르쿠츠크 가스로 할 것인지, 사할린 가스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미국 정부가 “사할린 가스는 안 된다”고 할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엑슨모빌이 사할린-북한 가스관 연결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 정부를 대상으로 로비를 펴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5월4일 러시아 사할린 정부의 갈리나 파블로바 석유-가스국장은 서방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사할린 가스를 공급하는 문제를 놓고 한국, 일본과 집중 협상중”이라고 밝혔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회사인 FSI사는 지난해 북한의 천연가스관련 단체와 계약을 체결, 사할린 가스관 북한통과 구간에 대한 공사권을 독점적으로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FSI사는 사할린 노선이 성사되도록 미국정부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약속을 북한측에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자부 관계자는 “실제로 FSI측은 계약체결 이후 한국 산자부를 방문해 사할린 노선의 타당성을 설명한 일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천연가스 공급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이르쿠츠크 노선보다는 사할린 노선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사할린 가스 유전은 사할린섬 북동 연안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의 사할린프로젝트 개요 보고에 따르면 현재 사할린에선 사할린Ⅰ 프로젝트에서 사할린Ⅵ 프로젝트까지 6개의 유전 개발계획이 수립 중이다. 이 중 현실성 있게 추진되고 있는 것은 사할린Ⅰ과 사할린Ⅱ 프로젝트다.

    엑슨모빌사와 일본 회사가 공동 참여하는 가스개발사업이 바로 사할린Ⅰ 프로젝트로, 예상 투자비 122억달러, 연간 천연가스 생산량은 960만t(이르쿠츠크의 연간 생산량의 절반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유회사인 영국 쉘사와 일본 미쓰비시사가 공동 참여하고 있는 사할린Ⅱ 프로젝트는 예상투자비가 100억 달러며 역시 연간 960만t의 천연가스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사할린Ⅱ 프로젝트의 경우 천연가스를 액화천연가스(LNG)로 만든 뒤 사할린 남부 유즈노사할린스크 지방의 항구에서 배를 통해 일본, 한국 등에 공급하는 기존의 항만이용 방식이다. 반면 파이프라인으로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방식이 바로 사할린Ⅰ프로젝트인데 엑슨모빌 등 참여사들은 사할린 유전지대에서 일본 홋카이도, 혼슈 섬까지 파이프라인을 새로 건설해 일본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방식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 내륙에 가스관을 새로 건설하는 작업은 일본의 비싼 토지보상비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가스관을 연결하는 것도 공사기간 중 어업손실보상이 뒤따른다고 한다. 사할린Ⅰ 프로젝트는 사할린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가스관을 연결하는 사업도 함께 추진중이다. 그러나 연해주와 일본내 수요가 예상 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아도는 가스 팔려는 러시아, 美 엑슨 모빌의 장삿속”

    러시아 천연가스 수급노선. a:이르쿠츠크 유전~평택항(서해 해저 통과노선), b:이르쿠츠크~평택항(북한 통과노선), c:사할린 유전~평택항(북한 통과노선)

    2003년 5월 작성된 한국가스공사의 사할린사업 추진현황 보고서는 “사할린 가스 사업이 수요확보에 실패했다”고 결론내렸다. 다음은 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일본, 한국 및 대만 등 LNG 주요 수입국의 수요증가세가 둔화된 반면 자원보유국 및 메이저 (석유)회사들의 가스개발 붐으로 수요 대비 공급 가능량이 많아짐에 따라 사할린 가스전 개발자 및 투자자는 적정한 가스수요자를 구하는데 실패 ※생산비용 등 투자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으므로 일정 규모 이상의 수요자 확보가 필요함.’

    보고서는 특히 사할린Ⅰ 프로젝트의 시장성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사할린Ⅰ 사업의 경우 다단계 구체적인 계획하에 2002년 투자예산을 2001년 대비 2배 증가시켜 적극적으로 동 사업을 추진 -(그러나) 2005년~2006년까지는 사할린에서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스배관 연결공사를 검토중이나 연해주 지역 수요자의 경제여건 악화 등 수요처 확보 어려움.’

    이와 관련 러시아 가스 개발사업의 한 전문가는 “사할린 가스 프로젝트의 일본내 수요문제를 조사한 외국 보고서도 최근 나왔다. 문서 원문을 입수하지는 못했지만 시장성이 당초 사할린 가스사업을 시작했을 때 예상했던 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결론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사할린 가스사업의 1차 소비처인 일본 시장과 연해주 시장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결과가 나온 시점은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할린 가스를 북한에 제공하자”는 논의를 러시아, 미국측이 본격 제기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북한과 한국을 사할린 가스의 새로운 소비처로 만들기 위해 이런 논의를 띄운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1994년 북핵위기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한국 등은 그 대가로 북한에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했다. 중유 50만t은 천연가스로 환산하면 연간 40만t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르쿠츠크나 사할린 유전의 연간 천연가스 생산량(960만~2000만t)과 한국측의 연간 러시아 가스 수입예상량(700만t)에 비하면 많지 않은 양이다. 북한에 이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는 점이 문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으로 천연가스를 공급해주는 사업은 두 가지 방안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할린Ⅱ 프로젝트에 의해 사할린 유전에서 배로 북한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주는 안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성이 없다고 한다. 북한에 LNG를 하역, 보관할 항구와 시설을 새로 지어주어야 하며 북한 영토 내에 가스관을 또다시 조성해야 하는 등 추가 중복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사할린노선 채택 시 한국 부담 급증

    러시아 가스문제 전문가는 “배로는 북한에 가스를 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북한에 가스를 공급해주기 위해 러시아-북한간 공급관만 따로 만들어줄 수도 없다. 결국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스를 보내면서 중간에 일부를 북한에 떨어뜨려주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할린Ⅰ 프로젝트에 따라 러시아 사할린과 한국을 잇는 파이프라인이 북한 영토를 통과하게 해 가스를 북한에 제공하는 방안이 유일하게 현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주는 가스에 대해선 한국 등이 대가를 지불하게 되므로 가스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안전한 가스 시장이 된다. 또한 이럴 경우 한국의 러시아 가스 수급 루트는 자연스럽게 사할린 노선이 된다. 사할린Ⅰ 프로젝트 사업자들로선 북한의 소비시장뿐만 아니라 남한의 대규모 시장도 함께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북한에 천연가스를 제공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북핵 타결과정에서 한·러·미·일 간에 상당히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 일이 현실화된다고 전제했을 때 현재의 러시아 가스 수급 사업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갖게 된다. 첫 번째는 원래 계획대로 이르쿠츠크 유전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방안, 두 번째는 사할린Ⅰ 유전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방안이다. 결론적으로 현장의 전문가들은 이르쿠츠크 안이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르쿠츠크 노선은 사할린 노선에 비해 새로 조성해야 될 가스관의 길이는 더 길지만 한국측이 부담해야 할 길이는 총 4100km 중 530km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시베리아와 만주를 통과하는 대다수 노선의 건설비는 러시아와 중국측이 부담하게 된다.

    그러나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지나 한반도와 연결되는 사할린 노선의 경우엔 중간에 중국이라는 재력 있는 사업파트너 겸 거대 소비시장이 없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실제 부담액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 노선에서 서해로 가스관을 매설할 경우에는 해저면 위에 관을 올려두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토지수용비, 지하 매설비, 안전시설조성비가 필요 없어 육상매설에 비해 건설비가 크게 줄어든다. 이 노선을 통해 러시아 천연가스가 평택항으로 들어오면 평택항에서 현재 경기 일산지역에까지 연결된 가스 배관망을 통해서 북한으로도 가스를 공급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에 가스를 공급하는 문제의 주도권은 한국이 쥐게 된다.

    그러나 사할린 노선은 사할린→연해주→북한→한국 순으로 천연가스관이 내려오게 된다. 러시아 가스 개발에 참여해온 한 핵심인사는 “사할린 노선으로 정해질 경우 한국은 북한에 천연가스를 무상으로 주는 입장이면서도 북한이 밸브를 잠가버리면 사할린 가스를 공급받지 못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는 곧 에너지 자산의 관리권을 북한에게 일정부분 양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측이 한국으로 가는 가스를 불법으로 인출하더라도 이를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점 또한 문제다. 실제로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천연가스관이 지나는 모 국가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수십억달러어치의 가스를 훔쳐왔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 인사에 따르면 이같은 에너지 주권 침해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르쿠츠크 노선의 경우에도 서해 해저노선이 북한영토 통과노선에 비해 우선적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영토 통과노선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얼마 전 북한을 방문한 한국측 관련 기관은 “가스관이 지날 지형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북측에 요청했다. 그러자 북측은 “가스관이 북한영토를 통과한다는 것을 보장해주면 지형답사를 허용해주겠다”고 제의했고 한국측은 이를 거절했다. 한국가스공사 관계자는 “북한에 이르쿠츠크산 가스를 공급할 경우, 이르쿠츠크에서 북한영토를 통과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노선보다 이르쿠츠크에서 서해를 거쳐 한국에 온 뒤 북한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공사비 면에서도 더 저렴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사할린 노선의 경우 지금까지 타당성 조사도 하지 않았다. 반면 이르쿠츠크 노선은 상당히 조사가 진척됐으며 러시아-중국과의 가격협상만 잘 되면 그대로 추진되어도 한국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러시아 가스 수급 문제에 관여해온 다른 전문가 A씨는 “중국 북부지방은 환경오염 문제 등으로 천연가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다. 또한 이르쿠츠크엔 한국이 30년은 쓸 수 있는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따라서 이르쿠츠크 지역은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北, “가스관 우리 영토 통과 보장 해달라”

    이 전문가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와 한국을 잇는 가스관이 자국영토를 통과하기를 원하고 있다. 가스관이 자국영토를 통과할 경우 당장 북한은 가스 통과료 수입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러시아와 유럽통과구간) 사례를 적용하면 통과료 수입으로만 연간 1억달러를 벌 수 있다. 또한 북한은 가스관을 일종의 ‘볼모’로 잡게 되어 한국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으며 ‘중유제공 중단’과 같은 일을 겪을 우려도 적어진다는 것이다. 러시아정부나 미국 기업측도 이미 상당액을 투자한 사할린Ⅰ 프로젝트의 안정적 수요처 확보차원에서 사할린-북한-한국 노선을 여론에 띄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르쿠츠크 지역구의 고려인계 텐 유리 러시아 연방 하원의원은 1990년대 말 선거유세에서 “천연가스 개발로 이르쿠츠크 주민들의 삶의 질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는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러시아사절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노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보고서엔 북핵문제 해결과 사할린 가스의 북한 공급 문제를 연계시키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이라는 거대 수요처가 이미 확보된 이르쿠츠크 유전과 비교했을 때 사할린 유전의 수요처 확보는 러시아로서도 더 시급한 현안임을 잘 보여주는 예다.

    북핵 명분 ‘가스 상업주의’ 대두

    북핵문제 협상과정에서 북한측은 핵 포기에 따른 단기적, 중장기적 대가 제공을 요구할 것이고 천연가스 제공문제는 중장기적 대북지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외교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이 경우 핵문제 협상에서 영향력이 큰 북한, 러시아, 미국의 사할린 선호 입장, 한국정부의 대북 유화적 태도에 따라 사할린 노선이 강력하게 대두되어 관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A씨는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 평화정착을 위해 한국이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해줄 필요성은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이 불필요한 추가부담을 하지 않고, 에너지 주권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가스업계에 따르면 가스관으로 공급되는 천연가스(PNG)와 배로 공급되는 천연가스(LNG)는 적정 공급비율이 유지되어야 하며 따라서 PNG의 공급량을 무턱대고 늘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즉, 이르쿠츠크 가스 공급사업과 사할린 가스 공급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가스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핵심인사는 “한반도 주변국이 북핵문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한국정부의 고위층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논란은 미리 차단시켜놓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이라크전쟁에서 볼 수 있듯 미래 에너지원의 사전 확보는 21세기 외교·안보의 제1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차원을 고려해 사할린 유전과 가스전에도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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