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산 서광정 앞의 소나무. 가지가 ‘V’자를 그리는데, 그 뒤로 ‘십팔나한조남해’가 미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등산(登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산을 자기의 내면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현대적, 서양적 개념의 등산과는 확연히 달랐다.
동양에서 산을 즐겨 찾은 사람들은 화가들이었다. ‘금강산도’를 그린 겸재 정선도 그랬고, ‘황산팔승도(黃山八勝圖)’라는 대작을 남긴 중국의 석도(石濤·1642∼1707)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명 황실의 후예로 태어난 석도는 만주족이 베이징을 차지한 데 이어 중국 대륙 전역을 정복하자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 황산에 들러 ‘황산팔승도’를 그렸고, ‘일획론(一劃論)’이라는 유명한 동양화론을 탄생시켰다.
황산은 중국 남동부의 안후이(安徽)성 남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황산을 오악보다 더 숭상했다. 오악이란 동악인 태산(泰山·산둥성)과 서악 화산(華山·산시〔陝西〕성), 북악 항산(恒山·산시〔山西〕성), 중악 숭산(嵩山·허난성), 남악 형산(衡山·후난성)을 일컫는다.
최고봉이래야 기껏 1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으나, 기암과 기송(奇松), 운해, 온천 등을 거느리고 있어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 불려온 황산은 199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 겸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黃’의 나라 중국
황(黃·yellow)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이다. 중국문명이 일어난 곳이 황허 유역의 황토고원이고,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을 일컫는 용어가 황제(黃帝·Yellow Emperor)였으며, 황제(皇帝)가 사는 황궁의 지붕과 담벼락을 온통 누런색으로 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보면 황산이 그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였던가에 대해 감이 잡힌다.
양귀비와의 러브스토리로 인구에 회자되는 당 현종은 황제(黃帝)가 신선이 되기 위해 수양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며 황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후일 황산을 찾은 석도는 “산천에서 태를 벗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것은 반평생 동안 중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필묵을 빌려 천지만물을 그리다 터득한, 물아(物我)가 혼연일체를 이루고 주관과 객관이 통일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말이다.
세계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필자는 항저우(杭州)의 서부터미널에서 황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부 연안행 버스가 오가는 시 중심가의 동부터미널은 꽤 복잡하고 시설도 무던한 편이나, 내륙 쪽으로 달리는 버스의 출발점인 서부터미널은 한적한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시설도 변변찮고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륙의 미(未)개발성을 보는 것 같았다.
황산행 버스는 열두어 명이 탈 수 있는 마이크로버스였고, 운전기사는 그곳까지 7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항저우를 낮 1시 반에 떠났으니 오후 9시가 돼서야 도착하리라는 얘기였다.
항저우 시내를 벗어나자 계단식 차밭과 무논이 펼쳐졌고, 이따금씩 허리를 구부려 모를 심는 사람들도 보였다. 야트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농촌 마을에는 ‘생태주거’라고 쓴 팻말이 걸려 있기도 했다. 환경친화적 주택을 그렇게 일컬었다. 항저우가 있는 저장(浙江)성의 경계를 넘어 안후이성으로 들어서자 길은 좁아지고 도로 사정도 나빠졌다. 버스가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안후이성은 펄 벅의 소설 ‘대지’의 무대였던 곳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버스는 작은 도시에 들어서자 멈춰 섰다. 볼일도 보고 요기도 하라는 것이었다. 승객들은 ‘리치’라는 붉은색의 작은 과일을 사서는 하나씩 꺼내 입에 넣고 씨를 발라 맛있게 먹었다. 나도 따라 해봤는데, 혀끝에 닿는 신맛과 단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둠은 기별도 없이 몰려와 갑자기 사위를 덮쳐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과, 가끔 보이다 사라지곤 하는 등불 정도였지만, 들판이나 산이 나타나면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따금씩 달빛을 받은 개울이 은빛을 발해 운치를 더했다. 그러다 버스가 닿은 곳은 탕커우(湯口)의 어느 여관 앞이었다.
오랜 시간 차 속에서 시달린 몸이라 어서 쉬고 싶은데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웠다. 호객꾼들이 승객들을 자기네 호텔로 끌어들이려고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중국인 승객들은 하나 둘 숙소를 정해 떠났다. 나는 좀더 조용한 곳을 찾아볼 생각으로 우선 저녁부터 시켰다. 맘에 안 들긴 식사도 마찬가지라 나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왔다.
한데 그 집 여자가 나를 뒤따랐다.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탕커우빈관(賓館·호텔)까지 날 따라와서는 프런트에다 “이 손님을 모시고 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탕커우빈관은 1박에 100위안(약 1만6000원)을 받는 그녀의 집보다 조금 비싼 140위안이었으나 시설도 나아 보였고, 무엇보다 조용한 게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