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밀 베고 팥 심고 마늘 거두고 자두 따먹고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입력2003-05-27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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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손으로 씨를 받으면서부터 농사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둘 욕심에 많이 달렸으면 했지. 이제는 무얼 심을 때 ‘잘 자라 좋은 씨가 되어라’하는 마음으로 심고 가꾼다.
    밀 베고 팥 심고 마늘 거두고 자두 따먹고

    농촌 봉사활동을 하러 온 YWCA 학생들과 함께 콩밭에서.

    시골로 이사 왔을 때다. 큰애가 낮잠을 자는데 뻐꾹 소리가 들리더란다. 뻐꾹 뻐꾹 뻐꾹…. 잠결에도 습관처럼 하나 둘 세었다. 그런데 열셋 열넷. 어, 이상하다. 열둘이 넘네. 생각해보니 이건 진짜 뻐꾸기 울음소리. 큰애가 태어나 자란 서울 아파트 마루에 뻐꾸기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 뻐꾸기 울음소리는 아이한테 시간을 알려주는 신호인 셈이었다. 한데 열 살이 넘어 진짜 뻐꾸기 소리를 들으니 처음에는 시계 소리로 들리지.

    도시 생활에서 시간은 참 중요했다. 시간 맞춰 가야 하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시간에 맞춰야 했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나는 참 힘들었다. 아침이면 모든 기운이 빠진 듯, 등짝에 한짐을 진 듯. 몸부림치다 쫓기듯 일어나고. 아이 재촉해 유치원 보내고, 나도 준비하고 나서야 했다. 아침마다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 아침에 느긋하게 똥을 눌 겨를이 있나. 전날 채운 속을 비우지 못하고 새날을 시작하곤 했다.

    지금 우리 집 마루에도 시계가 하나 걸려 있긴 하다. 지금 몇 시지? 하고 시계를 볼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 맞춰 해야 할 일이 없다. 자연에서는 때를 알고 때에 맞춰 살아간다.

    열두 번을 더 우는 뻐꾸기

    겨울에는 일찍 잔다. 해가 일찍 떨어져 어두우니 여섯 시도 안 돼 저녁 먹고. 그리고 나면 겨울밤이 얼마나 긴가. 책 보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도 일찍 잔다. 그리고는 늦게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야 춥기만 하니 해 뜨도록 이불 속에서 지낸다. 책을 보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러다 봄이 돼 해가 길어지고 일거리가 늘어나면, 점점 일찍 일어난다. 하지(夏至) 무렵이 되면 해 따라 새벽같이 일어나지. 남편은 새벽 5시 먼동이 틀 무렵이면 들에 간다. 그런 남편을 보고 마을 할아버지가 잠도 안 자고 밤새 일을 했냐고 하실 정도다. 저녁 해거름 시원하니 해질 때까지 일하게 된다. 집에 와서도 오리와 닭을 돌보고 집안에 들어오면 8시가 훌쩍 넘는다. 그러니 여름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 고단하면 한낮에 잠깐 누우면 된다.

    아이들은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절로 깨어난다. 일어나서 마당에 나와 오리 밥도 주고 자기 밭에도 한번 가보고. 아이들이 이렇게 움직이면 아침밥 준비를 한다. 시간이 되니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플 때 먹기 위해서다. 우리 집 밥 때는 식구들 배고플 때다. 아침에는 더운밥에 새로 찌개를 끓이고 금방 뜯어온 싱싱한 푸성귀를 올리고. 아주 푸짐하게 한 상 차린다. 온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시간은 서로를 나누는 시간이다. 오늘 할 일, 어젯밤 꿈, 아침에 들은 새소리….

    창피한 이야기를 하나 하면, 서울서 지독한 변비였다. 저녁에 자려고 누우면 소리 없이 나오는 독한 방귀. 큰애도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급했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고, 책가방을 벗지도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다. 학교에서는 생각이 없었는데 집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급하게 밀려나온다고.

    신선한 똥 누기

    시골로 이사 와서, 우리 집을 짓기 전에, 마을 빈집에 살았다. 그 집엔 대문간에 뒷간이 달려 있다. 오지를 묻은 뒷간. 그런 뒷간이 낯설어 힘들었다. 남의 집이니 맘대로 고칠 수도 없고 참고 살긴 살아야 하는데 어찌나 불편했던지. 비가 오시는 날이나 밤에 가려면 더욱 힘들었다. 한데 그 불편한 뒷간에 하루 한번 가는 신기한 일이 생겼다. 머리가 아닌 몸을 움직이는 삶. 아무래도 많이 먹는 푸성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편안함. 이런 삶이 준 선물이었나 보다.

    큰애가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다.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공부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아침 먹고 치우고 맨 먼저 큰애와 공부를 하곤 했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은뱅이책상 하나 놓고 둘이 마주앉아 공부를 하다 보면 잠깐! 큰애가 뒷간을 다녀오고 잠시 뒤 내가 가고. 그 시간이 얼마나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공부 시간에 똥이 마려울 수 있다니.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이만큼 편안할 수 있구나.

    이렇게 시골 생활이 조금씩 자리잡히면서 몸 리듬이 자연스레 바뀐다. 요즘은 아침에 뒷간을 가곤 한다. 시골 살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뱃속 하나는 편하게 산다.

    며칠 전에 큰애가 “먹고 자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이제 알았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먹고 싶으면 그걸 만들어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내 몸이 바라는 대로 산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하루하루 속에 있다. 큰애는 한창 자라는 사춘기. 자기 몸을 건강하게 가꾸고 있다.

    먹는 게 행복하니 먹을거리 챙기는 일에도 열심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는 자기가 가꾸고. 끼니마다 뭐를 해먹을까 궁리하고. 그 덕에 우리 식구 별별 맛있는 음식을 다 해먹었다. 마땅한 반찬이 없으면 얼른 나가 상추와 돌나물이라도 한 움큼 뜯어온다. 잘 먹고 잘 자니 의욕이 나는지, 자기 나름대로 ‘도전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해나간다. 산에 가서 나무 해와 도끼질. 그러다 군불 지피기. 마당 가꾸기. 그러다 그림 그리기. 영어 원서로 읽기. 사람들이 묻는다. “중학교 나이 큰애는 요즘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그럼 나는, “먹고 자는, 그러니까 살아가는 공부요. 그러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 공부를 하지요.”

    6월은 보리와 밀이 익어가는 망종으로 시작한다. 봄꽃이 지고 산과 들이 푸른데 그 사이사이 인동꽃이 조용히 피어 있다. 6월 하면 가뭄부터 생각난다. 논과 밭이 모두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가뭄.

    재작년 큰 가뭄에, 집으로 들어오는 물이 끊겼다. 산에 있는 샘에서 물을 끌어와 먹는데 그 샘이 가뭄을 타곤 했다. 몇 번 그랬기에 이번에도 며칠 참으면 되겠지 하고 하루 이틀…. 열흘이 넘도록 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을 길어 먹고 개울에 가서 빨래를 하고, 몸을 씻고. 나중엔 소방차가 물을 실어다 주기도 했다.

    물이 끊기면 목이 더 마른다. 집에 물이 안 나오는 순간, 작은애는 물을 달라고 매달린다. 목타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논 물길도 마른다. 모두 마른다. 사람도 들판의 곡식도. 논바닥이 드러나고, 고추야 콩 싹이야 하나 둘 타서 시들어간다. 경운기로 물을 퍼 밭에 주고. 강물을 퍼서 논에 대고. 그래도 모두 자라지 못하고 목숨줄만 부여잡고 견딘다. 이렇게 가무니 젊은 사람들 입에선 기우제 지내자는 소리가 나온다. 동네 어르신은 기우제는 하지 지나서 지내는 거라고 하고….

    밀을 이삭째 군불에 그슬려

    아무리 가물어도 산에 들어가면 가뭄이 사라진다. 물길은 말랐지만 그래도 산 속에 생명들은 푸르게 살아 있다. 숲에서 나는 냄새에는 메마름이 없다. 그 가뭄 끝에 마을 사람들이 산을 돌아다니며 마르지 않는 샘을 찾았다. 물맛 또한 좋다. 가뭄이 샘을 선물해주신 셈이다.

    논에서는 모내기 끝에 애벌 김매기를 할 때다. 오리를 넣어도 논에 들어가 한두 번 손으로 김을 맨다. 모가 어찌 지내나, 논에 들어가 모 포기 사이를 돌아다녀 봐야 알 수 있다.

    6월 벼는 가지가 벌어진다. 곁가지가 벌어져야 그 가지마다 이삭을 안을 수 있다. 따뜻한 곳은 가지가 20개까지 번다고 하는데, 우리 논에서는 열 개쯤 벌었다. 이렇게 가지가 잘 벌어지려면 뿌리 힘을 길러줘야 한다. 뿌리 힘이 좋으면 잎은 점점 짙푸른 빛을 띠고 부챗살 펴지듯 떡 벌어진다. 그렇지 못하면 겨우 두세 개 벌어지다 만다.

    밭마다 곡식들이 한창 자라고 있다. 고추, 가지는 벌써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니 자주 돌보아주어야 한다. 콩 싹, 깨 싹은 갓 나와 여리다. 이 어린 싹들이 풀과 벌레를 이겨내게 도와주어야 한다. 붉은팥, 콩나물 콩같이 늦게 심는 곡식도 심어야 한다. 보리, 밀, 양파, 마늘, 감자가 차례차례 익어 거두어들여야 한다.

    부지런히 거두지 않았다가 아차 하는 사이 장마가 밀어닥치면 어쩌랴. 보리, 밀농사를 집에서 먹을 만큼 하기가 쉽지 않다. 아예 큰 규모라 콤바인으로 베면서 그 자리에서 털어내 건조기에 넣어 말리면 모를까, 사람 손으로 밀을 베고 도리깨로 털어 바람에 말리려면 장마하고 달리기 경주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망종(芒種)에서 하지까지가 고비다. 망종에서 하지까지 부지런히 움직여 풀을 잡고 작물마다 제자리 잡도록 이리저리 도와주고, 겨울 작물들을 거두어 갈무리해야 하기에. 이때가 대학생들이 농촌활동 다니는 때인데 정말 시골에는 일손이 필요한 때다.

    한데 요즘 농촌은 그리 바쁘지 않다. 트랙터로 갈아엎은 뒤, 비닐을 씌우고, 맨땅이 드러난 곳은 풀약(제초제)을 치니 풀 잡을 일이 있나. 밀, 보리농사는 대부분 짓지를 않는다.

    마을로 이사 온 우리 식구가 밀농사를 하니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밀밭을 지나며 “농사한 밀로 수제비 만들어 먹으면 구신데…” 하신다. 오래 전 밀농사할 때 먹어본 수제비가 생각나시는지. 그래서 밀을 거두었을 때 마을회관에서 밀수제비 동네잔치를 했다. 마을 어른들이 어찌나 달게 드시는지.

    보릿고개 막바지인 망종에, 즐거움은 뽕나무에 달려 있다. 오디가 익으니 달디단 오디 먹고, 뽕잎도 따 먹는다.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밀 한 단 베는 풋바심(채 익기 전의 곡식을 지레 베어 떨거나 훑는 일)도 좋다. 밀을 이삭째 군불에 까맣게 그슬린다. 뜨거우니 두 손을 바꿔가며 살살 비벼, 껍질을 후후 불어내고, 따끈한 밀알을 추려 한 입 씹으면 톡톡 터지는 밀알의 맛. 아궁이에 모여 앉은 식구들 입 언저리가 시커멓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몸이지만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리 집에서 가장 자주 하는 전화는 131 날씨 안내전화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 누른다. 비 오실 기미가 보이면 모종을 옮겨 붙이고. 날이 맑으면 거두어 말려야 한다.

    밀 베고 팥 심고 마늘 거두고 자두 따먹고

    시골의 아침은 상쾌하기만 하다. 집 앞 마당에서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하는 필자의 아들 김규천.

    입하(入夏)에 일어선 여름 기운이, 하지 되면 온 세상에 뻗친다. 어디선가 매미 소리 들리고, 밤꽃이 피고, 호박 오이 덩굴이 뻗어가고, 풋고추 풋가지가 달린다. 옛말에 웬만한 곡식은 하지까지 심으면 거두는 양은 적지만 되기는 된다고 한다. 하지가 그래 중요한 기준이다.

    장마가 오기에 앞서 밭마다 김을 매 풀에 치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장마에 밭이 풀밭이 되고, 곡식 곁에 난 풀을 뽑다가 곡식까지 뽑고 만다. 지나다 보이는 대로 맨손으로라도 뽑고, 호미로 찍어내고, 그래도 안 되면 낫으로 치고.

    이렇게 밭마다 풀을 매고 다니다 보면 정작 마당에 풀을 맬 겨를이 없네. 이때 풀은 키가 사람만큼 자랐지만 아직 씨는 안 맺혀서 풀 베어 밭에 덮어주기 좋다. 풀이 거름도 되고, 풀이 두둑이 덮이면 새로 풀이 자라지 못하니 풀로 풀도 잡고. 하지만 조심조심. 벌이 있는지 살피며. 욕심 부리며 일을 하다가는 낫이 내 몸을 베기도 한다.

    곡식들은 하룻밤 자고 나면 쑥쑥 자란다. 비가 한 줄기 오고 나면 어제오늘이 다르다. 하지에는 호박꽃, 오이꽃, 메꽃이 피고지고 자귀나무에도 꽃이 핀다. 생강 촉이 올라오고 고구마 순이 뻗어난다. 부지런히 심는다고 심었지만 군데군데 빈 곳이 남아 있다. 늦게 심는 고구마, 팥, 조, 기장 심고. 새 먹고 벌레 먹은 곳을 때우다 그만 호미를 던지고 만다. 빈 곳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날이 더워지면 감자와 밀 음식이 당긴다. 밀은 지난해 농사한 걸 남겨 두었다가 먹는다. 감자는 이맘때까지 남아 있질 않다. 처음 농사를 시작한 때는 감자 나올 때까지 못 기다리겠어 그만 한 상자 사다 먹었다. 캐기 전에라도 한 두 포기씩 후벼다가 먹으면 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밭을 갈지 않으니 감자를 심었던 밭에서는 저절로 감자가 싹터 자란다. 그러니 감자밭에 가지 않아도, 감자 한두 포기 후벼올 수 있다. 이 감자는 껍질이 맨손으로 슬슬 문대도 벗겨진다. 그대로 밥 위에 얹어 찐다. 땀 흘리고 일한 뒤 뜨거운 감자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 그 맛이란….

    6월 가뭄 끝에 장마가 밀어닥친다. 여름 장마에 산에는 여름 버섯 돋아나고, 도라지와 더덕꽃이 피어나며, 6월은 7월에 자리를 내준다.

    음식은 되도록 싱싱하게, 단순하게

    산에 가면서 풀, 나무 하나하나 본다. 이건 이름이 뭘까? 먹을 수 있을까? 망개(청미래) 순이 눈에 띈다. 저것도 먹는다는데…. 어, 굵은 순이 뻗어나온다. 저건 맛있겠다. 사람은 참 가지가지 많이 먹는다. 온갖 열매, 잎, 뿌리. 그뿐인가. 꽃도 먹고 나무순도 먹는다.

    우리가 먹는다는 건 무얼까? 먹는 음식도 습관이라는 걸 요즘 절실히 느낀다. 참깨는 볶아서 빻아 깨소금을 만들어 먹는 건 줄 알았다. 이건 습관일 뿐이다. 날참깨를 그냥 먹어본다. 땅콩도 날땅콩을 까서 속껍질째 먹는다. 처음에는 비릿하더니 이제는 즐겨 먹는다. 손이 부르트도록 땅콩 껍질을 까고, 그걸 볶고, 심지어 속껍질까지 까서 먹게 내놓는 그런 수고는 꼭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쓸 에너지를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써보리라.

    또 생각해본다. 무엇을 먹는 걸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영양을? ‘다섯 가지 식품군에 맞춰 골고루 영양을 섭취해야….’ 과연 그럴까? 밭에서 금방 따온 싱싱한 푸성귀와 며칠을 냉장 보관한 푸성귀가 같은가? 그렇지 않으리라. 그럼 무엇을 먹는가? 농사를 해보니 먹는다는 건 생명력을 먹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 몸에 좋다는 쑥을 보라. 그 놀라운 생명력. 씨앗 하나만 떨어져도, 뿌리 한 조각만 땅에 붙어 있어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기에 약이 될 수 있겠지.

    내 손으로 농사하기 전에는, 무얼 먹어도, 그 본디 모습을 상상해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냥 내 눈앞에 있는 그대로, 내 혀에 느껴지는 대로 먹었지. 지금은 그 본디 모습을 아니 그렇게 안 된다. 풀 하나를 봐도 우리 조상들은, 이건 먹을 수 있고 저건 못 먹는다는 걸, 이건 어디에 좋은 약이 된다는 걸, 어찌 먹으면 좋은지를 어떻게 알게 됐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다.

    나무에서 그 생명을, 봄에는 새 순으로, 가을에는 열매로 얻고. 풀에서 그 생명을 뿌리에서, 잎에서, 열매에서 그리고 꽃에서까지 얻는다. 어떤 생명이건 그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우리가 얻는다면 어떻게 먹어야 할까? 되도록 싱싱하게, 되도록 단순하게 먹어야겠지. 그런데 지금까지도 지지고 볶아, 그 본디 모습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려 씨앗을 구하던 때가 떠오른다. 아직까지 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니, 맨 처음 살았던 산청 이웃집, 이곳으로 옮겨와 마을 아제들. 이들로부터 볍씨, 콩, 팥, 깨, 옥수수…. 물려받으며 나도 잘 가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데 이렇게 물려받을 수 없는 게 있다. 이건 종자가게서 사야 했다. 고추씨, 토마토씨, 배추씨….

    어째서 그런가? 씨를 사서 심기 시작하면서 씨를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더 많이 열리도록 개량된 씨. 한동안 인기 있던 고추씨 이름이 ‘마니따’였다. 많이 딴다는 뜻이겠지. 이런 씨는 어떤 처리를 했는지, 씨를 받아 이듬해 심으면 제대로 안 되고. 그러니 다시 사서 심고. 종자가게는 점점 커지고. 드디어 다국적 기업이 되고. 덴마크에서 온 시금치씨, 이탈리아에서 온 당근씨, 일본에서 온 양배추씨….

    시골 살면 닭 몇 마리 키우리라. 달걀 받아 아이들 먹이고 가끔 닭도 잡아먹자. 장에서 병아리를 사다 기르기 시작했다. 병아리는 쑥쑥 잘 컸다. 알을 낳기 시작했는데 먹이만 챙겨주면 날마다 알을 낳았다.

    한데 알을 그때그때 꺼내지 않으면 깨 먹곤 한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도 품을 줄 모른다. 사람 좋으라고 잘 크고 살지게 개량된 닭들. 어느새 새끼를 까는 본성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닭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나도 아이를 스스로 낳지 못해 수술해 낳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닭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 닭을 키우려면 어미가 품어서 깨어나 자란 닭을 키워야지. 마침 저 멀리 영주에서 한 분이 찾아오면서 암수 한 쌍을 데려다 줬다. 먹이를 주면, 수탉은 뒤에 한 발 물러서 망을 봐주고, 암탉은 열심히 먹는다. 가끔 수탉이 달려와 뭔가를 집어든다. 자기가 먹으려나. 아니다. 그걸 암탉 앞에 떨어뜨려 준다.

    암탉은 이렇게 열심히 먹고 알을 낳는다. 몸집은 작은데도 알은 실했고. 수탉은 닭들을 지켜주는 일에 열심이다. 누가 다가가면 입을 크게 벌려 소리친다. 그래도 안 되면 날개를 퍼덕이며 위협한다. 마당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암탉들을 하나하나 열심히 챙긴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암수 둘이 함께 꼬꼬 꼬꼬 이중창을 부른다.

    암탉은 알을 한동안 낳고 그 다음 품기 시작한다. 보통 스무하루를 품는다. 그 동안은 하루 한 번 나와 물 먹고 똥 누는 것 빼고는 알자리에서 꼼짝 않고 알을 품는다. 그 정성이란 말할 것도 없다. 꺼칠해진다. 드디어 어미 품에서 병아리가 삐약대기 시작하고. 2∼3일 뒤 병아리가 돌아다니게 되면, 암탉은 한 달 넘게 병아리들을 데리고 돌아다닌다. 열심히 먹이를 구하는 법,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보통 ‘토종닭’이라는 닭을 기르면서부터 달걀이 아주 귀한 음식이 됐다. 닭은 달걀을 낳는데 사람 먹으라고 낳아주는 게 아니다. 자기가 품어서 새끼를 까려고 낳는다. 그러니 열댓 알쯤 낳으면 그만 낳고 품는다. 그러면 반쯤은 품게 해줘야지. 알을 품는 동안, 그리고 병아리를 기르는 동안에는 알을 낳지 않는다.

    암탉은 일년에 서너 차례 알을 낳는다. 그때마다 열댓 알쯤. 그렇다면 사람이 암탉을 일 년 길러서 먹을 수 있는 달걀 수는? 달걀 하나가 그대로 닭 목숨 한 마리다. 그러니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닭을 잡으면 해 먹을 수 있는 건 백숙이다. 몸집이 작고 살이 별로 없어 고기 요리하기가 마땅치 않다. 푹 삶아 국물을 먹는 게지. 그래도 좋다.

    ‘잘 자라 좋은 씨가 되어라’

    이런 우리 닭들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작년 논에 넣었던 오리 몇 마리 올 봄까지 기르니, 오리도 알을 품는다. 길러 보면 오리는 닭과 참 다르다. 사람들은 오리는 알을 안 품는다 한다. 오리는 28일, 그러니까 닭보다 일주일 더 품어야 알을 깐다. 모성이 강해야 새끼를 깔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부화장에서 나온 오리. 몇 대를 그렇게 이어왔는지 모르지만…. 그런 오리가 자기 속에 있는 모성을 되찾아 알을 품는 모습이 어찌나 기특한지. 한 배는 벌써 까서 4월 말부터 어미와 새끼 일곱 마리가 빈 논에서 ‘일’을 하고 있다. 모내기 전 김매기. 오리 덕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농사를 시작하게 됐다. 다른 암컷 하나가 못자리 하는 날 품기 시작했다.

    사람이, 더구나 자라나는 아이들이, 먹는 건 그 몸이 된다. 기왕 농사지을 거라면 생명이 살아 있는 농사를 하리라. 이런 마음으로 씨앗을 하나하나 구했다. 자기가 씨를 맺어 다시 목숨을 이어가는 씨를. 모두 앞에 ‘토종’이란 두 글자가 붙어 있는 그런 씨를.

    고추는 두툼해서 말리기 쉽지 않고, 고춧대 하나에 달리는 고추 열매가 몇 개 안 된다. 오이는 아주 잘아 첫해는 굵어지길 기다리다 늙혀버렸다. 맛은 구수하달까,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맛이 있다. 봄에 심으면 서리 올 때까지 열매를 맺는다.



    볍씨는 사람이 가꾸어온 세월만큼이나 사람 손에 길들여졌다. 더구나 일제를 거치고,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더욱. 대대로 내려오던 볍씨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는 한 어르신이 만주에 가서 어렵사리 구해온 ‘다마금’이라는 옛 볍씨를 구해 그걸 심는다. 배추씨도 구했다. 포기가 제대로 차지 않더라도 넉넉히 씨 뿌려 가을엔 솎아 먹고 이듬해 봄에는 잎도 먹고 꽃도 먹으면 되지. 토종을 못 구했더라도, 되도록 씨를 받아 그 씨를 심어본다. 모양도 좋지 못하고 거두는 양도 적다. 그런들 어떠하랴.

    내 손으로 씨를 받으면서부터 농사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둘 욕심에 많이 달렸으면 했지. 이제는 무얼 심을 때 ‘잘 자라 좋은 씨가 되어라’ 하는 마음으로 심고 가꾼다. 곡식들을 자연의 흐름에 맞춰 가꿔 씨를 받고, 그렇게 하는 품값으로 내가 얻어먹는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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