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빚 보증으로 시작해 빚 독촉으로 망가진 ‘정치 실험’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01-28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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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대통령 95, 96년 부산시장, 총선 연속 패배 후 장수천 직접 챙겨
    • 1997년 5월 자치경영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험영업까지
    • 판매회사 오아시스워터, 생수시장 덤핑전쟁에 “앞으로 남고 뒤로 밑졌다”
    • 2000년 7월 장수천이 갚아야 할 빚은 39억9700만원
    • 진영 땅 경매로 넘어가자 선봉술, 오철주 피해보상 강력 요구
    • “선씨와 오씨는 대선 전 어떻게든 피해보상 받으려 했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선봉술씨, 최도술씨, 안희정씨.

    2003년 5월28일 노 대통령이 부동산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나라종금이나 부산상의 소속 기업으로부터의 자금수수 문제는 간단해요. 돈을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생각이 달랐던 거죠. 나라종금 대주주인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이 2억원을 줬을 때 안희정씨는 대학동문인 (김씨의 동생) 김효근씨와의 관계를 생각해 순수한 투자나 지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김 회장은 일종의 보험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도술씨는 부산상의 기업인들이 청와대 방문을 요청했을 때 부산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생각에서 주선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다른 흑심을 품고 있었던 거죠. 그 두 사건은 복잡할 게 없어요. 문제는 장수천이에요. 거의 복마전이죠. 모든 사건이 그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안희정(安熙正)씨와 가까운 한 386의 이야기다.

    실제 검찰은 2004년 1월13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김병운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안씨와 강금원(姜錦遠) 창신섬유 회장, 선봉술씨 등 대통령 측근비리 관련 공판에서 장수천을 주타깃으로 삼았다. 이날 검찰은 3시간 가까이 회사 설립과정과 청산 이후 빚 변제과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특히 이날 강 회장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으로부터 후원회장 이기명(李基明)씨의 용인 땅을 매입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고 진술해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선을 전후해 노 대통령이 용인 땅 매입을 한 차례 부탁해 가치가 있으면 사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야당이 장수천 빚 문제를 들먹이며 대통령을 실패한 사업자로 몰고 도덕성까지 의심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빚 변제 위기에 몰린 이기명씨의 용인 땅이 경매로 넘어가느니 차라리 내가 감정가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게 강씨의 진술 내용이다.

    안씨도 “경선 때 장수천 빚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업에 참여했던 이기명씨의 용인 땅이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하자 노 대통령이 ‘강 회장에게 직접 얘기하겠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노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팀의 칼날도 장수천으로 향하고 있다. 한낱 조그마한 생수회사에 불과한 장수천을 둘러싸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첫 시작, 엇갈리는 증언

    ■장수천 설립과정

    등기부등본상 장수천은 1995년 10월17일 충북 옥천군 장수리 656번지에 설립된 회사다. 자본금은 5000만원. 회사 설립과정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노 대통령은 2003년 5월 기자회견을 통해 장수천 관련 측근비리를 해명하면서 장수천 설립 과정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1995년 당시 민주당 구미지구당 위원장이던 이성면씨 부탁에 의해 나를 포함, 7명이 4억원의 보증을 서면서 장수천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런데 회사 상태가 안 좋아 조금 더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당시 영업정지 상태에 있었던 장수천에 환경영향 평가비용을 일부 지원했다. 투자금이 증가함에 따라 투자지분도 증가하게 됐고 1996년 말쯤에는 사실상 회사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안희정씨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93년 노 대통령은 국민회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국민회의 내 영남권 대표주자로서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는 되지도 않는 영남지역 지구당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지구당위원장들의 빚 보증을 많이 서줬다. 당시 구미시 지구당위원장이 친척의 사업을 자신이 하게 되면 지구당 사업에도 큰 보탬이 될 거라고 해서 1995년 6·27 지방선거 전인 6월10일경 보증을 서 줬다. 노 대통령이 생수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 가을 무렵이다. 그 해 4월 총선에서 낙선(종로)하고 안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웬 생수사업을 하시냐’고 했더니 ‘지난번 보증 서준 것이 말썽이 났는데 조금만 투자하면 그 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할 수 있겠다’고 했다.”

    이미 설립돼 있던 장수천에 보증을 서줬다가, 추가로 투자해 인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또 다른 386 측근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1993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민주당 부총재 시절, 노 대통령은 손해 볼 일이 많았다. 영남의 대표인물로 꼽혔고, 직업이 변호사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시기 구미지구당위원장의 보증을 선 적이 있는데 그게 나중에 문제가 됐다. 빚 보증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구당위원장이 지금의 장수천이 들어선 땅을 ‘생수가 나는 땅’이라면서 줬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나서기가 쉽지 않아 부산상고 동문 몇몇이 대신 생수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이 측근의 기억대로라면 장수천은 노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문들이 처음부터 직접 관여해 설립했다. 길게는 이미 10년여 전의 일인 만큼 관계자들의 기억에 차이는 있을 수 있는 일.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자료를 근거로 보면 노 대통령은 5억5000만원을 추가로 투입하고 1996년 12월 자신의 후원회 사무국장 출신 홍경태씨를 회사 대표로 앉혔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발원지 ‘장수천’ A to Z

    2003년 5얼28일 노 대통령이 부동산 관련 의혹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그 시기에 왜 갑자기 생수사업에 뛰어든 것일까. 1993년 노 대통령이 세운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열린우리당 최동규 공보 부 실장은 “정치인으로서 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야만 하는 경제적 불안정 구조를 깨려는 선각자적 모습으로 이해 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자금을 남에게 얻지 말고 자력갱생해보자는 새로운 시도였고,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에 와서 부도덕한 것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의도와 세상에 비쳐지는 것과의 간극이 이렇게 큰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 실체는 간과한 채 정치인이 경제행위를 하려 했다는 오해와 불신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그런 시각 자체가 문제다.”

    이 문제는 당시 노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과도 일정하게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노 대통령은 1995년 6·27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 부산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안씨의 주장처럼 그해 6월10일 보증요구가 있었다면 선거를 앞두고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키 어렵지 않다.

    다음해인 1996년 총선에서 노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도전장을 냈다가 실패했다. 노 대통령에게 이때의 좌절감은 무척 컸다. 김대중 총재가 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민주당은 두 동강 났지만 그래도 부산에서만큼은 자신에게 희망을 걸 거라고 믿었던 터였다. DJ를 따라가지 않고 끝까지 민주당을 지키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총선 결과 DJ의 국민회의는 제1야당이 된 반면, 민주당은 꼬마민주당으로 전락했던 것.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은 민주당 당원이긴 했지만 아무런 당직도 없었다. 평범한 변호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96년 후반기까지 그의 방황은 계속됐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실무를 맡았던 안희정, 이광재를 비롯, 서갑원, 정윤재, 황이수, 최동규씨 등 이른바 노 대통령의 측근들도 나름의 살길을 찾아 각자 흩어졌던 시기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후 연구소를 찾는 발길이 뜸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경제적으로도 연구소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잠시 정치에서 멀어진 노 대통령에게 장수천이라는 생수회사는 새로운 도전의 대상이었다. 1996년 말 찾아온 안희정씨에게 ‘대박 터질 회사’라고 자신감을 보이며 10%의 지분을 양도한 것도 당시 노 대통령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회사는 1997년 3월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18억5000만원의 대출을 받아 공장자동화 설비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때 보증을 선 사람이 노 대통령과 친형 건평씨, 후원회 회장 이기명씨, 고향선배 오철주씨, 선봉술씨 등이다. 그리고 장수천 공장과 부지, 이후 문제가 된 경남 진영상가와 부지가 담보물로 제공됐다.

    그러나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공장시스템 설치공정은 지연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2월 IMF를 맞았다. IMF는 생수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더구나 당시 회사는 대기업에 생수를 납품하는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으로 운영되어 원청업체의 장난에 휘둘리기 일쑤였다. 내분도 있었다.

    한편 1997년 5월 노 대통령 측근들은 다시 뭉쳤다. 서울 종로구 도렴빌딩에 변호사 사무실 겸 정치인 노무현을 위한 캠프를 차린 것이다. ‘지방자치경영연구소’의 후신인 ‘자치경영연구원’이다. 이 곳은 여느 정치인들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르게 운영됐다.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 현재 경기도 시흥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경선을 준비중인 백원우씨의 당시 회고다.

    “정치를 하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돈 문제였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꿈꿨다. ‘우리끼리 돈을 벌어서 한계를 벗어나자’고 다짐했다. 당시 이광재씨와 서갑원씨는 카페를 공동으로 하고 있었고, 김남수씨는 공구상을 운영했다. 안희정씨는 출판사를 했다. 또 변호사 사무실 한켠에서는 S화재 보험대리점 영업도 했다. 노 대통령의 변호사 업무는 상담이나 자문이 고작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아나운서 김자영씨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 수입이 가장 짭짤했다. 한 달에 500만∼6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노 대통령은 ‘노하우 인물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해 상용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참모라고 해서 단순하게 월급만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면서 정치를 함께 하는, 그런 캠프가 꾸려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안희정씨를 동지이자 동업자 관계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97년 국민회의 입당 후 대선을 치르면서 노 대통령은 다시 정치전면에 나섰고, 1998년 종로구 보궐선거를 통해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노 대통령이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는 사이 장수천의 경영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노 대통령은 회사대표를 선봉술씨로 교체하고 안희정씨를 긴급 투입했다. 그때가 1998년 11월경이다.

    ■오아시스워터 설립과정

    장수천의 경영상태를 파악한 안씨는 생수공장만 갖고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고 판매망을 조직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자금이 없었다. 안씨는 그 시기 자치경영연구원의 살림도 책임져야 했다. 상근자는 6∼7명 이었는데 사무실 임대료와 인건비 등 한 달에 1500만∼2000만원 정도가 필요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씨는 평소 절친하게 지내 온 동문(고려대) 선후배들을 통해 자금 마련에 나섰다. 1999년은 벤처붐이 한창 일기 시작한 때였다.

    “안희정씨는 주로 벤처를 경영하는 선후배들을 대상으로 자금후원을 받으러 다녔지만 쉽지 않았다. 1계좌당 500만원씩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1∼2계좌씩 들어주는 정도였다”는 게 안씨측 관계자의 전언.

    그러던 1999년 6월, 안씨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온 대학동문 (주)닉스 김효근 사장의 소개로 김 사장의 친형 보성그룹 김호준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지원받게 된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안씨는 보성그룹 관리인이자 계열사 전 이사 최모씨로부터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현금으로 2억원을 받았다. 이 돈에 대해 안씨는 순수하게 투자금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검찰은 대가성 있는 자금이라며 기소했다. 투자라면 왜 현금으로 지하주차장에서 받았냐는 것이다.

    안씨는 또 아스텍창투로부터 1억9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아스텍창투는 우리들병원 이상호 원장과 그의 부인 김수경씨가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이 원장이 부산출신으로 노 대통령의 척추수술을 맡는 등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점이다. 부인 김씨는 2002년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열음사’에서 노 대통령의 책 ‘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를 출판하기도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종로보궐 선거에서 승리해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 국민회의 부총재 겸 경남도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은 동남특위 위원장까지 맡아 김대중 대통령의 ‘동진정책’을 최선봉에서 이끌면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주목받고 있었다.

    보성그룹과 아스텍창투에서 안씨에게 지원한 자금 3억9000만원은 과연 순수한 투자금일까, 아니면 노 대통령을 보고 지원한 일종의 정치자금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안씨는 이같은 자금을 끌어 모아 1999년 7월 생수판매회사 ‘오아시스워터’를 설립하고 ‘오아시스’라는 브랜드로 직접 생수판매에 나선다. 안씨는 판매망을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대리점 사장들을 만나 판매를 독려했다. 그 결과 사업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수천이 떠 안고 있는 부실이 너무 컸다. IMF 이후 한국리스여신으로부터 대출받은 원금의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복마전 같은 생수시장의 덤핑 관행도 발목을 잡았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0년 초엔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명의의 서울 명륜동 빌라를 담보로 1억원을 대출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 해 여름 장마에 장수천 공장은 수해를 당했는데 샘물 관정에 빗물이 스며든 것은 치명타였다. 결국 2000년 7월 한국리스여신은 채무상환을 연기해주지 않고 계약해지를 요구해왔다. 한국리스여신에 상환해야 할 빚은 39억9700만원이었다. 안씨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너 나 죽는 거 볼래”

    ■장수천과 오아시스워터 청산과정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돼 충정로 청사로 출근할 무렵, 안씨는 회사 청산작업을 해야 했다. 2000년 8월 한국리스는 담보로 제공됐던 공장과 부지, 경남 진영상가 건물과 부지에 대해 강제 경매절차에 들어갔다.

    감정가격 8억5000만원이던 회사 공장과 부지는 4∼5차례 유찰된 후 2억원에 매각됐고, 진영상가와 부지도 4차례 유찰 끝에 2001년 4월 12억원에 팔렸다.

    오아시스워터는 2000년 12월에 김모씨에게 4억5000만원에 팔렸다. 안씨는 그러나 매각대금 중 2억5000만원을 자치경영연구원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남은 2억원도 회사 운영과 관련된 개인 채무를 갚는 데 쓴 것으로 드러났다.

    보성그룹이나 아스텍창투로부터 정상적으로 투자를 받았다면 안씨는 회사를 정리한 후 투자금을 되돌려줘야 하는 게 정상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검찰이 이들 업체로부터 지원된 자금이 정치자금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 중 하나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진영상가와 부지가 경매처분되면서 새롭게 발생한 채무채권관계 때문이다. 부산 지역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초 진영상가 부지 지분은 노건평씨가 40%로 가장 많지만 오철주씨(지분 33%)의 주도로 노무현, 건평, 선봉술씨(27%) 등이 투자해 공동으로 매입한 것이었다. 그만큼 땅에 대한 애착은 오씨가 가장 컸다.

    장수천 때문에 진영상가와 부지가 경매처분되면서 재산을 잃게 된 오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분만큼 돈을 받아내야 했다. 특히 시가 30억 가까운 문제의 부동산을 노건평씨의 처남 민모씨가 경락받은 것도 오씨를 자극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씨도 자신의 지분에 해당하는 돈을 노 대통령이 갚아주기를 내심 바랐다.

    2002년 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오씨의 독촉은 더욱 거세졌다. 선씨도 이에 동조했다.

    2004년 1월13일 서울지법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검찰의 심문에 대한 선씨의 답변내용 중 일부다.

    “노 대통령이 16대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뒤 후보로 윤곽이 잡혀가자 오철주씨는 ‘노무현에게 정치자금 좀 들어오겠구나’ 싶어선지, ‘너 나 죽는 거 볼래’라며 피해액을 빨리 변제하라고 독촉했다. 오씨는 경선장까지 나타나서 징징댔다. 오씨뿐만 아니라 나도 집사람이 하도 돈을 받아오라고 조르는 통에 안희정과 최도술씨에게 가서 ‘오씨가 강도 높게 손해배상하라고 한다. (이 문제가 불거지면 선거에 별로 좋을 거 없으니) 한번 만나 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그 김에 돈을 받으려 했다.”

    장수천 경영을 책임졌던 안씨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롯데호텔서 盧 만난 후 2억5000 받아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결정된 후에도 노 캠프의 경제적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씨의 독촉은 더욱 거세졌다. 안희정씨의 변호사는 “오씨가 ‘(부산시지부) 한나라당사 앞에 가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겠다’고 협박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선씨의 공판진술에 따르면 2002년 5월, 선씨와 오씨는 최도술씨를 만나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며칠 후 오씨는 6억원, 선씨는 5억원을 배상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2002년 7월, 선씨는 부산 롯데호텔 객실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 그 자리에서 오씨의 전화를 바꿔줬다. 오씨는 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피해보상을 강력히 요구했고, 선씨는 그 자리에서 “집사람 등쌀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선씨에게 “부인과 오씨를 잘 달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7월24일 선씨는 최도술씨로부터 “2억5000만원이 준비됐으니 희망연대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로 찾아가 최씨와 함께 P은행에서 약속한 액수만큼의 돈을 찾아서 받았다. 이 돈이 바로 얼마 전 문제가 된 부산선대위 계좌 선거잔금이다.

    주목되는 것은 선씨의 다음 진술이다. “신남철씨에게서 받은 5000만원까지 합쳐서 (이 때까지) 3억원을 받았고, 안희정이 3억원을 뺀 나머지 8억원(오철주 6억원과 선봉술이 아직 못받은 2억원)을 보내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등장한 신남철씨는 장수천의 후신 ‘워터코리아’의 대표다. 신씨는 2001년 5월16일 경매를 통해 장수천 공장과 부지를 2억원에 낙찰받았다. 워터코리아는 장수천과는 법률적으로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신씨는 왜 선씨에게 5000만원이나 보전해준 것일까.

    신씨는 이에 대해 “장수천 공장 주변의 다른 사람 땅 위에 설치된 일부 시설물의 지상권과 관정, 실험실 비품 등 경매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며 “공장과 부지 등을 제3자에게 다시 매각하면서 그 가치를 5000만원 정도로 환산해 선봉술씨에게 준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밝혔다.

    안희정, 최도술 ‘딴 주머니’ 찼나

    한편 안희정씨는 약속대로 2002년 9월27일 1000만원권 수표 30장(3억원)을 오씨의 계좌로 입금시켰고, 11월25일부터 12월 중순까지 4∼5차례에 걸쳐 1억3000만원을 선씨에게 송금했다. 이어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18일 안희정씨는 선씨에게 강금원 회장의 회사인 창신섬유 강모 이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그 사람이 돈을 줄 것’이라는 말을 했고, 다음날 강 이사는 3억5000만원을 선씨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안씨가 선씨와 오씨에게 건넨 돈은 모두 7억9000만원이었다. 약속한 돈보다 1000만원이 부족했지만 선씨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검찰 조사결과 이 가운데 4억5000만원은 강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고, 나머지 3억4000만원은 안씨가 대선을 전후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모금한 5억9000만원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안씨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대선을 전후해 모금한 5억9000만원에 대해서는 “스스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안씨가 대선을 전후해 자금을 마련했다면 최도술씨는 대선 이후 당선 축하금을 주로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선씨는 안씨로부터 이미 약속된 피해보상금을 다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최씨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대선이 끝난 후인 2002년 12월30일부터 2003년 2월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선씨에게 5억원을 건넸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이영로씨가 SK 손길승 회장으로부터 받은 11억원 중 3억4000만원이 포함된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나머지 1억6000만원은 최씨가 별도로 거둔 자금인 셈이다. 이후 선씨는 최씨로부터 5억원을 추가로 받은 사실을 안씨에게 실토하고 안씨의 지시에 따라 4억5000만원을 강 회장에게 송금했다고 진술했다.

    안씨 변론을 맡고 있는 김진국 변호사는 “오씨와 선씨 등은 대선 전에 어떻게든 피해보상을 받아내려 했다”며 “아마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기명씨 용인 땅 둘러싼 이상한 거래

    한국리스여신은 장수천 대출 연대보증인 이기명씨의 용인 땅을 가압류하고 경매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한국리스여신이 가압류한 이기명씨의 땅은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일대 2만4000여평. 마땅한 구매자를 찾지 못하던 이씨는 노 대통령의 부탁으로 강 회장이 나서면서 고민을 해결했다.

    이씨와 강 회장은 2002년 8월29일 ‘생수회사인 장수천의 부실로 발생한 한국리스여신의 보증채무 원금과 연체이자는 매수인이 전액 책임 상환한다’는 특약사항을 조건으로 28억500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강 회장은 그 직후 계약서상 계약금조로 5억원을 건네고, 9월17일 중도금 10억원, 2003년 2월 두 번째 중도금 4억원 등 모두 19억원을 이씨에게 지급했다.

    그 돈은 장수천 채무상환을 위해 고스란히 한국리스여신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강 회장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강 회장은 총 19억원을 이씨에게 지급한 뒤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위약금 2억원을 제외한 17억원을 되돌려받으면 된다고 밝혔다.

    강 회장은 계약파기 경위에 대해 “복지회관을 짓기 위해 매입했다가 뒤늦게 한전 철탑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다 강 회장은 1월13일 공판에서 “노 대통령 당선 후 주위 사람들이 용인 땅 매입을 놓고 ‘땡잡았다’고 운운하는 데다 이씨도 땅을 돌려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나도 어차피 노 대통령을 돕겠다고 한 일이므로 계약을 해지했다”고 말을 바꿨다.

    검찰은 강 회장이 어떤 이유를 대든 믿지 않는 분위기다. 강 회장이 지급한 계약금 5억원과 두 번째 중도금 4억원 등 9억원이 이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한국리스여신에 입금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계약을 파기한 뒤 위약금 2억원을 제외한 17억원을 돌려받지 않은 경위가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검찰은 장수천이 한국리스여신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강 회장과 이씨가 거래의 형식만 빌린 위장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또 이 과정에서 안희정씨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진국 변호사는 “보통의 거래와 다른 측면이 있지만 분명히 정상적인 거래가 이뤄졌고 거래명세가 있다”면서 “재판과정에서 모든 게 밝혀질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5월 기자회견에서 “호의적 거래”라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이 정치자금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꿈꾸며 시작한 ‘장수천’. 하지만 이 회사는 지금, 청산과정에서 비롯된 측근들의 갖가지 의획들이 증폭되면서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최대 걸림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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