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첩첩산중’ 최병렬의 공천개혁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글: 정연욱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yw11@donga.com

    입력2004-01-28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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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배수의 진을 쳤다.
    • 대대적인 당 개혁 없이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 하지만 당내 반발도 만만찮다. 예상치 못한 걸림돌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다.
    •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첩첩산중’ 최병렬의 공천개혁

    1월1일 한나라당 서울시지부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최병렬 대표(가운데).

    갑신년 새해를 맞은 한나라당엔 훈훈한 덕담 아닌 ‘내전(內戰)’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 연말 불거진 당무감사자료 유출 파문으로 최병렬(崔秉烈) 대표의 주류 진영과 서청원(徐淸源) 전 대표의 비주류 진영이 한치 양보없이 맞붙은 세(勢) 대결이 정점(頂点)으로 치닫고 있다. 당내 일각에선 분당(分黨)의 전초전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돌 정도다.

    1월1일, 새해 내방객을 맞은 서 전 대표의 서울 상도동 자택 분위기는 그만큼 험악했다. 지난해 12월31일 최 대표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서 전 대표의 노기(怒氣)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독설은 더욱 거칠어졌다.

    “보도된 당무감사 결과는 명백히 조작된 것이다. A, B 등급으로 판정됐다는 비공식 통보를 받은 원외 지구당위원장의 성적이 왜 C,D 등급으로 바뀌었나. 이런 정치적 학살을 감행하고도 ‘나 몰라라’하고 있으니 모종의 음모가 깔려 있는 것이 명백하지 않냐.”

    이날 오후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의 핵심 측근인 하순봉(河舜鳳) 의원은 서 전 대표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공조 방안을 논의하자는 메시지였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극비 회동, 향후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최 대표 진영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무감사자료 유출 파문을 방치할 경우 본격적인 공천작업을 앞두고 당이 걷잡을 수 없는 내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최 대표는 1월1일 상도동 자택으로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누군가 당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로 (당무감사자료를) 고의로 유출한 것 같다”고 일갈했다. 당 지도부가 고의적으로 당무감사자료를 흘려 공천 물갈이의 기반 조성 작업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비주류 진영의 공세를 차단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최 대표는 ‘개혁 공천’의 명분을 앞세워 강공으로 나갔다. 그는 “원칙을 놓고 타협은 있을 수 없다”며 물밑 협상론을 일축했다. 현역 의원에 대한 과감한 물갈이를 바라는 국민적 여망이 힘이 됐다. 최 대표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이재오(李在五) 사무총장과 박승국(朴承國) 사무부총장을 경질하면서 파문 수습에 나섰다. 대신 공천심사위원회 재구성 등 비주류 진영의 요구는 거부했다. 마냥 끌려다닐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나라당의 세 격돌은 결국 ‘개혁 공천’의 명분을 앞세운 최 대표 진영의 ‘판정승’으로 가닥이 잡혔다. 당무감사자료 유출 파문으로 불붙은 중진들의 잇단 불출마 선언도 최 대표의 당 장악력에 힘을 보태줬다.

    특히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의 단합이 절실한 과제라는 당내 요구는 서 전 대표가 꺼내든 공세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2003년 6월말 출범한 최병렬 체제는 이렇게 6개월여 만에 닥친 시련의 고비를 넘겼다. 이번 파문은 오히려 당내 기반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5,6공 이미지에 고령도 걸림돌

    당내 분란이 수그러진 1월12일 최 대표는 당 출입기자들과 모처럼 저녁을 함께했다. 소주잔도 거나하게 돌렸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 최 대표는 “젊을 때 등산하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라며 ‘전우여 잘 자라’란 군가를 힘차게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당시 출입기자들은 최 대표의 노래 에 4월 총선에 정치적 명운을 건 착잡함이 배어난 것으로 보았다. 최 대표는 “4월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지 않으면 정계를 떠나겠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총선 고지를 넘지 못하면 1938년 생인 최 대표는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앞으로 남은 3개월은 최 대표가 걸어온 정치 역정의 대미(大尾)를 마무리할 ‘길지 않은’ 시간이다.

    당무감사자료 유출 파문을 봉합한 최병렬 체제가 4월 총선에서 무난히 ‘원내 1당’이 될 수 있을까. 넘어야 할 산은 많고 곳곳에 ‘암초’가 포진해 있다. 최 대표의 리더십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라선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당내에서 총선을 총괄할 최 대표의 ‘상품성’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66세의 고령인 데다 5, 6공 출신 인사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최 대표를 앞세워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만만찮은 것이다. 특히 최대 격전지인 수도권에서 최 대표가 지원 유세에 나설 경우 득(得)보다 실(失)이 많을 것이란 수도권 의원들의 위기감은 심상찮을 정도다.

    특히 1월11일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의장이 51세의 젊음과 패기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것은 최 대표에게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여권이 ‘젊음과 변화’를 앞세워 대립구도를 만들 경우 꼼짝없이 올가미에 걸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최 대표 진영은 총선 선대위 발족을 계기로 젊은 대선후보군을 선대위원장에 전면 배치함으로써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계산이다. 강재섭(姜在涉) 박근혜(朴槿惠) 의원과 호남 출신인 김덕룡(金德龍) 의원 등이 선대위원장 후보군에 오르내리고 있다.

    홍준표(洪準杓) 전략기획위원장은 “이미 내부적으로 당의 젊은 후보군을 선대위에 전면 배치한다는 전략을 세워놓았다”고 자신감을 피력했지만 당내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역대 총선을 봐도 당의 이미지보다는 당의 얼굴을 보고 선택하는 유권자의 투표 행태를 무시할 수 없다. ‘인큐베이터론’을 내세워 차기 대선주자로 나설 뜻이 없음을 밝힌 최 대표로선 상당한 제약요인이 아닐 수 없다.

    실제 과거 총선 결과는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의 지지도가 급락하자 YS는 당시 자신과 소원했던 이회창 박찬종(朴燦鍾)씨 등을 과감히 영입해 신한국당의 간판으로 내세웠고, 이들은 결국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6대 총선에선 이회창 총재가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였는데, 바로 이 점이 “한나라당을 밀어서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을 불러일으켰다. 한나라당이 김윤환(金潤煥) 신상우(辛相佑)씨 등 낙천자들이 주축이 된 민국당 바람을 잠재운 것도 이 같은 위기감 덕분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차기 주자군을 전면 배치할 경우 최 대표의 당내 위상은 급격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현란한 플레이가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총선전은 차기를 꿈꾸는 이들의 주무대로 ‘변질’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검으로 親盧-反盧 구도 기대

    총선을 통해 정치적 재도약을 모색해야 할 최 대표로선 ‘정동영 효과’에 맞선 승부수가 자칫 역풍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종의 ‘양날의 칼’이라는 설명이다.

    최 대표 진영은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수사가 본격화할 3월경이면 ‘메가톤급’ 폭탄이 터져 총선 구도가 ‘친노(親盧) 대 반노(反盧)’로 재편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검 결과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찬반 여부로 유권자의 표심(票心)을 압박하게 될 경우 선거전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거티브 선거전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불법대선자금 문제로 이미 상당한 ‘내상(內傷)’을 입은 한나라당으로선 측근비리와 노 대통령의 불안한 리더십을 겨냥한 파상 공세를 펼 명분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또 야당의 공세에 여권이 맞대응을 할 경우 쌍방의 상처는 더욱 커져갈 뿐이라는 것을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는 최 대표가 자신의 거취 문제를 정국 반전의 승부수로 띄울 것이란 관측이 급부상하고 있다. 지역구인 서울 강남갑에 공천 신청서를 접수시켰지만 최 대표의 진로는 정국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게 당내의 대체적 전망이다.

    이와 관련, 최 대표가 지난 연말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 특검법안 거부권 행사에 반발, 단식 투쟁으로 맞대응한 전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단식이란 극한 투쟁을 통해 최 대표는 당내 반발세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측근비리 특검법안을 관철시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최 대표가 평소 극한 투사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단식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결국 최 대표는 총선에도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보다 더 큰 것을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길을 택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총선 불출마 카드가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핵심당직자는 “최 대표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할 경우 그 파장은 작지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침으로써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그 공은 전적으로 최 대표에게 돌아가고, 최 대표는 당을 완전 장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내 중진들이 선호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공론화하는 문제도 만만찮은 과제다. 당내에선 노 대통령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기 위해 총선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총선 전 하야 투쟁은 역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도록 하자는 것.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외치(外治)와 내치(內治)권한 중 내치권한을 원내 다수당 총리가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최 대표는 평소 사석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총선 공약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강력히 시사했다. 당내 다수 중진들도 노 대통령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이 방법을 선호해왔다. 야3당 공조를 통해 원내 다수의 의회권력만 확보하면 3년 남은 차기 대통령선거까지 기다리지 않고 권력을 반분(半分)할 수 있다는 이점이 적극 고려됐다. 최 대표는 개헌론을 통해 서청원 전 대표 등 비주류 진영과 공감대를 넓히는 다목적 포석을 노리고 있다.

    ‘첩첩산중’ 최병렬의 공천개혁

    1월5일, 공천 관련 당무감사자료 유출로 촉발된 당 내분사태 수습을 위해 열린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러나 당내 반발도 만만찮다. 주로 차기 주자군으로 분류되는 인사들 사이에서 반발이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 “스스로 대통령을 낼 수 없다는 불임(不姙)정당의 한계를 인정하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이 비판론의 요지다. 일각에선 최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도모하기 위한 고육책을 내놓은 것이라는 거친 비난도 나오고 있다.

    박근혜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은 오히려 권력을 쥔 대통령과 이해관계가 다른 국무총리간의 갈등만 노정시키게 된다”며 “차라리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중임을 묻도록 하는 개헌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차기 대권 레이스에 나설 뜻을 갖고 있는 이명박(李明博) 서울시장과 손학규(孫鶴圭) 경기지사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결국 이 문제가 공론화할 경우 한나라당은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2월부터 본격화할 공천 심사도 쉽지 않은 관문이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위압적일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졌던 이회창 전 총재도 공천 파동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최 대표는 최근 기자들에게 “공천 결과가 나오면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 대신 내가 당사에 앉아 일일이 대응할 것”이라며 불퇴전의 결의를 다졌지만 실제 상황은 녹록치 않다. 특히 한나라당의 아성인 영남권에서 대대적인 공천 물갈이에 나서야 하는 최 대표로선 이회창 전 총재 같은 카리스마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자칫 상당한 역풍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공천반발 막을 묘수는?

    특히 공천 심사 과정에서 최 대표와 불편한 관계였던 의원들이 잇따라 낙마(落馬)할 경우 공천 기준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또 일부 보수 성향 의원 공천에 반대하는 소장파 의원들의 집단 움직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일부 영남권 의원의 경우 최악의 상황에 대비, “무소속 출마를 불사하겠다”며 최 대표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기필마’로 당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 기반이 취약한 최 대표 입장에서 공천 반발은 비주류 진영의 해묵은 감정까지 자극할 수 있는 뇌관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총선 가도에서 최 대표의 결단은 하나하나가 당 안팎에서 민감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를 예의 주시하기는 유권자도 마찬가지다.

    ‘보수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원내 1당 대표에 오른 최병렬 체제의 남은 3개월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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