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권노갑 옥중토로

“완전한 조작, 김영완 잡아들여 대질해달라”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4-01-28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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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몽헌, 집에 찾아온 건 맞지만 청탁 들어줄 처지 아니었다
    • 정몽헌 얘기 사실이라면 왜 3000만달러 부분은 기소하지 않나
    • 신라호텔 라운지 커피숍엔 앉은 적이 없다
    • 김영완이 받은 돈 내게 전달한 사람 찾아달라
    권노갑 옥중토로

    2003년 8월15일 현대비자금 수수와 관련,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법원에 출두한 권노갑씨.

    1월6일 서울지법에서는 권노갑(74) 전 민주당 고문의 현대비자금 200억원 수수사건에 대한 1심 결심이 있었다. 서울지법 형사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권씨는 이제까지 그랬듯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이른바 ‘신라호텔 회동’에 대한 이익치씨의 진술을 일일이 반박하며 무죄를 강변했다.

    검찰에 따르면 권씨는 현대측으로부터 200억원 외에 30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00억원)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중 기소가 된 것은 200억원 부분이다. 도합 600억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쪽과 한푼도 받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쪽의 거리는 아득하기만 하다.

    권씨 주장과 별개로 이 사건 전개과정에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돈을 줬다는 진술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이 부족한 탓이다. 죽은 자(정몽헌)와 해외로 달아난 자(김영완)의 주장을 근거로 삼은 검찰의 기소는 그다지 탄탄해 뵈지 않는다. 또 둘 사이에 끼여 있는 이익치씨는 진술의 일관성 부족과 말 바꾸기로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으며 돈 전달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도 기소되지 않아 눈총을 받고 있다. 세 사람의 진술은, 몸통은 같지만 줄기는 제각각이다.

    그렇긴 해도 권씨의 무죄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엔 세 사람의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다. 비록 허위진술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도 있지만 현대비자금이 고 정몽헌 회장 지시로 김영완씨를 거쳐 권노갑씨에게 건네졌다는 대전제에서만큼은 세 사람의 진술이 일치한다. 또 한 가지 꿰맞추거나 지어냈다고 보기엔 ‘덩치(돈 액수)’가 너무 크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1심 결심이 있은 지 며칠 후 수감중인 권씨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권씨는 이날 지인인 모 면회객을 반갑게 맞았다. 푸른색 방한 죄수복을 입은 그는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말이나 행동에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얼굴 혈색도 좋아보였다. 하지만 지병인 당뇨가 여전하고 발이 붓는 증세가 심하다고 했다. 양볼 가장자리와 턱에는 산신령에게서나 볼 수 있는 흰 수염이 뒤덮여 있었다. 손이 시린지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권씨는 “억울해 죽겠어요”라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검찰에서 나를 세 번째 죽이려 해요. (지난해) 7월2일 진승현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난 다음 7월12일 엉뚱하게도 월드컵 휘장 사건에 나를 또 엮어 넣었잖아요. 관광협회장 김재기를 구속해 나한테 1억원을 줬다는 진술을 강요해서는. 그런데 그것도 재판에서 무죄로 판명됐잖여.”

    권씨는 가슴에 한이 맺힌 듯 자신의 옥살이 경력을 끄집어냈다. 박정희 정권 때 DJ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에 의해 몇 차례 구속됐던 일을 회상할 때는 감회가 깊은 듯 눈가가 젖어들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돈 문제와 관련해 내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있어요. ‘자네는 돈 관리를 하기 때문에 자네가 잘못되면 내가 죽어. 자네가 잘해줘야 돼. 첫째는 무얼 부탁하면서 주는 돈은 받지 마. 또 부탁을 해결해준 후 사례금을 받지 마.’ 그리고 둘째는 용공색채가 있는 사람한테는 받지 말라는 거였어요. 용공분자로 몰린다고. 그것만 걸리면 당신(DJ)의 정치생명이 끝난다며. 그동안 정치하면서 그 말씀을 철칙으로 여기고 살아왔어요.”

    김영완이 넥타이 선물

    권씨는 한보사건과 관련해서도 억울하다는 심정을 내비쳤다. 선거를 앞두고 받은 정치자금이므로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아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자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 옭아맸다는 것이다. 1998년 1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5월경 정몽헌 회장이 그의 집을 찾아 왔다.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병 때문에 형집행정지로 나온 후 병원에 좀 있다가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어요. 당시 8·15 사면복권 대상이 되느니 마느니 해서 심란했고, 또 사면되면 일본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서 그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나한테 무슨 청탁을….”

    -그때 정몽헌 회장이 찾아왔다는 거죠?

    “5월엔가 우리 집에 왔었어요. 그런데 카지노 얘기를 할 경황이 없었지.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땐데.”

    -정 회장이 어떻게 찾아오게 됐지요.

    “김영완이 날 알고 있었지. 1990년대 초에 김영완이 군납사업을 했거든, 헬리콥터. 미 국방부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헬리콥터 24대를 팔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걸 내가 국정감사 때 지적했거든. 왜 헬기를 직수입하지 않고 에이전트를 통해 수입해서 50억원이나 국고에 손실을 입히느냐, 그 내역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지. 그랬더니 김영완이 모 국회의원을 통해 나한테 찾아와서 해명하더라고. 다 듣고 나서 말해줬지. 내가 볼 때는 옳지 않으니 앞으로는 사업할 때 정상적으로 해라. 국고 손실이 없도록 하라고. 그때 김영완이 돈을 갖고 왔더라고. 당신 사업에나 보태라고 받지 않았지. 그렇게 해서 처음 알게 된 거야.

    김영완이 서울사람이에요. 우리 집사람도 서울사람이고. 알고 보니 내 처제가 김영완 동생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거예요. 서울사람은 서울사람을 좋아하잖아요. 내 집에도 몇 번 들르고 했지요. 김영완이 외국에도 자주 나가니 넥타이를 사오기도 하고. 그렇게 알고 지냈는데, 저 자가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김영완씨가 정몽헌 회장을 데리고 온 거란 말이죠.

    “그렇지. 김영완이 정몽헌한테 날 팔았겠지. 자기가 권 고문과 친하다고. 당시 나는 바깥에 못 돌아다닐 때였거든. 그때는 내가 죄인 신세잖아요. 일본에 건너갈 걸 대비해 경제학·행정학 교수들을 집에 불러 하루 두 시간씩 공부하고 있을 때라고. 한보사건에서 억울하게 당한 터라 참담한 심정이었지. 그런데 그런 나한테 카지노 허가를 부탁해? 그후로는 정 회장을 만난 적이 없어요.”

    -이 사건을 보면, 죽은 정몽헌 회장의 진술서, 이익치씨 진술, 김영완씨 자술서, 그 3개가 권 고문을 포위하고 있어요. 돈이 권 고문에게 전달됐다는 데 세 사람의 진술이 일치하는 데다 진술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권 고문이 돈 받았다는 검찰 얘기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도 안 돼요.”

    라운지 커피숍과 커피숍의 차이

    -이익치씨나 김영완씨야 그렇다 쳐도 정몽헌 회장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낼 이유가 있었을까요?

    “정몽헌 회장 진술을 보면, 신라호텔 라운지 커피숍에서 나를 만났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신라호텔은 라운지와 커피숍이 떨어져 있어요. 정몽헌이라는 사람이 재벌회장으로 외국도 자주 왔다갔다 하고 호텔에도 자주 드나들 텐데 커피숍과 라운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그냥 커피숍이라 해야 하는데 라운지 커피숍이라 했다고. 또 애초 정몽헌 진술서엔 나한테 2000년 1월에 3000만달러를 주고 3월엔 200억원을 건넸다고 돼 있는데 검찰 수사과정에 그 시점이 자꾸 바뀌어요. 현대상선이 외화를 빼돌린 시기와 안 맞거든. 꿰맞추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런데 두 가지 중 3000만달러 부분은 왜 기소하지 않느냐고. 기소해야 될 것 아녀, 정몽헌 진술이 다 사실이라면.”

    -김영완씨가 보낸 자술서에 현대측으로부터 3000만달러를 받아 권 고문한테 전달했다는 진술은 없는 거죠?

    “그렇지. 그 진술은 없지.”

    -그 진술이 있었다면 기소할 수도 있었을 법한데요.

    “서로 말도 달라요. 정몽헌은 신라호텔에서 나를 두 번 만났다고 진술했는데, 이익치는 다섯 번이라고 했어요. 또 이익치는 처음 검찰에 가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 후에 검찰이 정몽헌 진술서를 보여주면서 ‘정몽헌이 권노갑 관련 부분을 말했는데 너는 왜 말 안 하냐’고 윽박지른 거예요. 이익치가 나중에 나한테 하는 소리가, ‘나는 처음에 권 고문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니가 날 숨길 사람이냐. 없는 것도 있다고 잘도 말하면서 뭐 때문에 내가 관련된 부분을 숨기겠냐. 니가 모르는 얘기니 말 안 한 거지. 정몽헌이 그런 말 했다고 하니 니가 그 말에 따라간 것 아니냐. 니가 안다면 말 안 할 사람이냐’고 혼을 냈지.”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3000만달러 해외송금 사실을 처음 발설한 사람은 이익치씨로 보인다. 이씨는 지난해 7월25일 검찰에서 “정몽헌 회장이 3000만달러를 김영완씨 해외계좌로 보내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씨로부터 해외계좌를 받아 정 회장에게 전달했을 뿐 돈의 조성경위와 입금 여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돈의 최종 수령자에 대해서는 ‘민주당’이라고만 알았다고 진술했다.

    김영완은 신라호텔 얘기 안 해

    다음날 검찰에 불려간 정 회장은 2000년 1월과 3월경에 각각 3000만달러와 200억원을 권노갑씨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두 차례 모두 김영완씨를 통해 전달했는데 이익치씨가 중간에 개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2000년 1월경 신라호텔에서 김영완씨의 주선으로 만난 권씨로부터 총선자금 지원요청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계속되는 권씨의 항변.

    “그럼, 이익치가 언제부터 그런 진술을 했냐. 3차 진술 때부터 했지. 그래서 검찰이 이익치의 1, 2차 진술은 재판부에 내지도 않았어요. 또 김영완 자술서엔 아예 신라호텔 얘기가 없어. 돈을 받은 경위에 대해서는, 정몽헌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집무실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정몽헌이 나한테 200억원을 주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하고) 공모한 것도 아니지. 공모한 걸 밝혀내야 할 것 아니여.”

    -돈을 주게 된 경위에 대한 진술도 서로 다르죠. 어쨌든 권 고문 주장대로라면 정 회장이 왜 그런 진술을 했을까요.

    “내가 자기한테 3000만달러를 직접 요청한 걸로 진술했지. 200억원도 내가 신라호텔에서 만나자고 해 그 자리에서 요청했다는 거고. 그런데 김영완 진술은 달라요.”

    -권 고문이 결백하다면 죽은 정몽헌 회장을 비롯해 돈 전달과정에 관련된 그 많은 사람이 다 거짓말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솔직히 믿기 어렵군요. 예전엔 야당 죽이기 차원에서 권 고문을 탄압했다지만 지금은 민주화된 세상이잖아요. 이해가 안 되죠.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조작할 수 있다는 건지.

    “진승현 사건도 그렇고 월드컵 휘장사건도 그렇잖여. 이것도 마찬가지요. 내가 김영완한테 돈 받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여. 그런데 내가 김영완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엮으려 해. 김영완이 자기 집에서 도둑맞은 돈 있잖여. 그런 것이 다 그 돈이여. 그 돈을 다 나한테 줬다고 덮어씌우고 있다고.”

    -김영완씨 자술서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던데요. 권 고문에게 50억원은 일시에 건넸고 16대 총선 직전까지 수시로 수억원씩 전달했다고요. 또 200억원 중 50억원을 남겼는데 그 돈은 권 고문이 17대 총선 때 쓰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까지 했지요.

    “50억이 아니라 1억을 주라고 했다고 해도 아는 사람을 통해 돈을 받지 어떻게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차떼기로 받냐고. 그런 거액이라면 마땅히 내가 아주 신뢰하는 사람을 보내 받아야지. 그런데 김영완한테 돈을 받아 나에게 전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안 나오잖아. 김영완이 차에 돈을 실어 내게 보냈다면 차 번호도 적어놓았어야 하고 차주 신분도 알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니요.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권씨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해 9월19일 김씨로부터 압수한 124억원 중 92억원을 가환부(압수물을 임시로 돌려주는 것)해줬다. 권씨 변호인단은 김씨가 이 돈을 받은 당일 90억원 상당의 국민주택채권을 검찰에 제출했다며 김씨측이 검찰에서 받은 돈으로 채권을 구입해 증거물로 제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김씨 변호인측은 박지원 전 장관과 권노갑씨의 돈이라며 각각 40억, 50억원 상당의 국민주택채권을 검찰에 제출했다.

    어떻게 외국에 도망간 자 말만 믿고…

    권씨측이 특히 주목하는 점은 이 채권의 발행 시점이 돈이 건네졌다는 2000년이 아니라 2002년이라는 사실이다. 권씨는 국민주택채권을 CD(양도성예금증서)라고 표현했다.

    “검찰이 김영완으로부터 압수한 돈 중 90여억원을 김영완 변호사한테 빌려줬어요. CD 사라고. CD를 샀는데 2000년 걸 못 사고 2002년 걸 샀어. 만약에 17대 총선용으로 남겨둔 것이라면 2000년에 발행된 CD라야지. 어떻게 검찰이 압수한 돈으로 CD를 구입할 수 있어요? 어떻게 외국에 도망간 자의 진술만 믿고 재판할 수 있어요?”

    -정몽헌 회장은 몇 번이나 봤습니까.

    “한번 봤다니까. 집에서 딱 한번.”

    -이익치씨는요?

    “안양골프장에서 한번밖에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1999년 3월 태릉골프장에서 나하고 같은 날 골프를 친 적이 있더라구. 그런데 그때도 같이 골프친 게 아니야. 나는 안동선 의원 등과 함께 셋이서 쳤다고. 저쪽에선 김영완과 이익치가 같이 쳤고.”

    -검찰에서는 그것을 권 고문과 이씨의 친분을 말해주는 증거로 보는데요.

    “라운딩 자체를 같이 안 했다니까. 기록에도 있는데, 뭐. 나는 정몽헌을 만날 이유가 없었어요. 정몽헌한테 돈이 빠져나와 김영완을 거쳐 내게 왔다 치자. 그런데 검찰에서는 그 돈이 어디로 어떻게 간 줄 몰라. 그것이 밝혀져야 할 것 아니여. 도망간 자의 말만 믿고 어떻게 이런 엉터리수사를 할 수 있는지. 김영완을 잡아들여 나하고 대질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정몽헌, 김영완, 이익치 세 사람이 다 거짓말한다고 보십니까.

    “그게 다 드러나고 있잖아요.”

    권씨는 세 사람에 대해 ‘놈’이라는 표현을 쓰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김영완씨가 귀국해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는 한 권씨의 결백 주장은 계속될 듯싶다. 비록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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