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정종욱 전 주중대사와 중국정치 내막을 벗긴다

후진타오·장쩌민 권력분점하며 윈·윈 게임중

  • 대담: 황의봉 동아일보 출판국부국장 전 베이징특파원

    입력2004-01-29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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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등장한 후진타오 체제의 내부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이공계 출신 전후세대로 구성된 제4세대 지도부의 면면과 특성은?
    • 변신을 거듭중인 중국공산당은 과연 13억 인민의 대변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속내는?
    정종욱 전 주중대사와 중국정치 내막을 벗긴다
    정종욱(鄭鍾旭) 전 주중대사(64· 아주대 교수)는 김영삼 정권 때인 1996년 1월부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4월까지 대사직을 역임했다. 중국과 수교 이후 지금까지 중국대사는 현재의 김하중 대사까지 합쳐 모두 6명. 이 중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정치학을 전공한 교수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론과 현장경험을 함께 갖춘 경우다. 이번 호의 중국탐험 주제를 중국정치로 잡고 보니 자연스럽게 정 전 대사가 꼽힌 것도 이런 경력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흔히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엄연한 사회주의국가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 체제의 특성과 정치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정치의 현주소와 역사적인 배경,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은밀한 모습들을 최고의 중국정치 전문가 정종욱 전 대사와 함께 파헤쳐본다. 중국정치 탐험은 역시 13억 중국인민의 새 지도자로 떠오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권좌에 앉게 된 안팎의 사정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2002년 11월 제1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후 열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선출된 데 이어 2003년 봄 국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후진타오 체제가 공식출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후진타오가 권력을 완전히 이양받았느냐 또는 장악했느냐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임 장쩌민(江澤民)측과의 권력투쟁설도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서 후진타오는 오너가 아닌 CEO다, 장쩌민이 상왕노릇을 하고 있다, 사스 파동을 계기로 후진타오가 장쩌민에 승리했다 등등 각종 설들이 나왔습니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부의 내부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우입니다만 권력구조 내부는 다소 복잡합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을 승계하여 국가권력과 당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장쩌민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계속 쥐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권력이양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지도부인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9명 중 5명 정도가 장 주석과 가까운 이른바 상하이방 인물들이어서 후진타오의 권력 장악이 불완전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요.



    권력의 공유시대 개막

    그러나 오래 전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진타오가 실제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권력승계가 제도화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시대가 인치의 시대였다면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은 법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신호라 할 수 있겠지요. 중국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1949년부터 따지면 마오쩌둥이 27년 통치했고 덩샤오핑이 18년 통치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절대권력자에 의한 인치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법치로 넘어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과정이 점진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후(胡)가 이끄는 새로운 지도층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지목된 1992년부터 실제 권력승계가 이루어진 2002년까지 약 10년의 기간동안 장쩌민이 후를 제거하려 했다면 벌써 했을 겁니다. 장쩌민이 그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중국 권력구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라기보다 협력과 공조의 관계라고 봅니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지금의 정치구조가 권력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집단지도제라는 얘기 같은데요, 중국공산당의 과거 권력투쟁사를 상기하면 과연 권력의 공유가 실질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의 공유는 중국에서 이제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개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다원화되었습니다. 국가가 사회를 압도하거나 한 개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개인으로부터 집단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쩌민이 군권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게 권력의 속성 때문이라는 주장에 전혀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에서 후진타오에게 권력의 공유는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후진타오는 군대 경험이 없습니다. 군에 대한 장악력도 아직은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군부에 대한 후진타오의 기반이 강화되기까지는 장쩌민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정치안정을 위해서나 권력의 제도화를 위해서나 나쁠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덩샤오핑도 장쩌민이 군을 확실히 장악할 때까지 그랬지요.”

    -중국의 권력분산 추세를 말씀하셨습니다만, 권력이양 과정도 관심거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다스리는 중국의 권력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등장하는 것인지 사실 신비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고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 겁니까?

    “아직까진 중국에서 최고지도자의 등장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습니다. 과거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시대에는 최고권력자가 지명하는 식이었죠. 그러나 이런 방식이 오늘날의 중국에서 적용되기는 어렵습니다. 제도상으로는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당대회에 참석한 2000여명의 대표들이 중앙위원을 뽑습니다. 2002년 11월에 열렸던 16차 당대회에서는 356명의 중앙위원(정위원 198명과 후보위원 158명)이 뽑혔습니다. 다시 이 중앙위원들이 당총서기를 포함하여 25명의 정치국원을 선출하고 당 중앙서기처 등 그밖의 당 지도부를 구성합니다. 제도적으로 당 중앙위원들의 모임에서 최고지도자가 선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중앙위원들이 백지상태에서 최고지도자를 뽑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과거 마오쩌둥 시대에는 마오가 지명하는 형태를 취했고, 덩샤오핑 때는 덩의 주도하에 천윈(陳雲)이라든지 리셴녠(李先念) 혹은 왕전(王震) 같은 원로들이 협의해서 지명하는 식이었거든요. 장쩌민의 경우를 보면 1989년에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일어나면서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가 갑자기 물러나게 되니까 덩이 당 8대 원로들과 상의한 후 상하이시 당서기로 있던 그를 베이징으로 불러올려서 후임 자리를 맡겼습니다.

    후진타오가 정확히 언제 후계자로 지명되었는지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게 없지만 대개 1992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후가 이 해에 열린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후진타오는 공식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10년 이상 수련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죠. 이 수련과정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복잡한 업무를 익히는 기간인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시험받는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식이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주자가 아직은 확실하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만 차차 나타나겠죠. 선두주자는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후진타오를 제외한 8명의 상무위원 중에서 한 명이 집단지도부의 합의를 통해 부각되고 내정된 다음 다시 상당 기간 자질을 검증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막후의 숨가쁜 조율과정

    -결국 내용적으로는 당지도부 실력자들이나 원로들의 합의로 후계자를 지목하고 형식적으로는 중앙위원들이 선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중앙위원회에서 최고지도자를 뽑는 어떤 투표절차가 있는 것입니까.

    “중국에서 최고지도층이라 하면 넓게는 당 중앙위원이 있고 좁게는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있습니다만 이들의 선출방식은 각각 다릅니다. 중앙위원은 당 대표들이 선출하고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은 중앙위원들이 뽑습니다. 먼저 중앙위원의 선출은 차액(差額)선거라는 특이한 방식을 택합니다. 6600만 당원들이 뽑은 2000여명의 당 대표들이 모여서 중앙위원을 선출하는데, 과거에는 미리 상부에서 제시한 명단을 놓고 가부 투표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정원보다 5% 내지 10% 많은 후보 명단을 당 지도부가 제시하면 대표들이 그 중에서 정원만큼의 인원을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경선의 요인이 생겨난 거지요. 그러나 정치국원이나 상무위원은 중앙위원들이 투표로 뽑지만 차액선거는 아닙니다. 당의 최고지도부가 미리 정원만큼의 후보명단을 작성하면 이를 중앙위원들이 토의한 후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결정합니다. 실상 찬반투표인 셈이지요. 물론 지금까지 중앙위원들이 최고지도부가 작성한 후보명단을 부결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식 민주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최고지도부와 최고권력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역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막후에서 조율이 밀도있게 진행된다고 볼 수 있겠군요.

    “물론이지요. 지난 16차 대회의 경우를 보면 당 대회가 열리기 2, 3년 전부터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서 새 지도부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이 위원회의 책임자가 후진타오였고 부책임자는 장쩌민의 오른팔로 알려진 쩡칭훙(曾慶紅)이었습니다. 절묘한 배합이지요. 이 두 사람이 당 원로들의 의견을 참고하고 당 조직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후보명단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치열한 막후교섭과 숨막히는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짐작들이 많았습니다.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을 예로 들면 발표가 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루이환(李瑞環) 정협주석이 유임될 것이라는 전망이 강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가 탈락하고 대신 리창춘(李長春)과 우관정(吳官正)이 뽑혔습니다. 부정부패 케이스로 탈락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자칭린(賈慶林)이 선출되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뤄간(羅幹)이 들어갔습니다. 자칭린은 장쩌민 사람이고 뤄간은 리펑(李鵬)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물론 밖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막후 조율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금년 들어서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정권 교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는데요. 실제로 최근 만나본 중국내 관계자들이 북한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대학이나 연구소의 전문가들은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 자기들이 먼저 그런 가능성을 제기하기보다는 우리한테 물어보죠. 북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나 혹은 정권이 언제까지 생존하겠느냐며 간접적으로 얘기를 걸어오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북한의 정권교체나 몰락은 아예 화제에 오르지를 않았고, 우리가 얘기를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런 화제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중국 내 분위기가 달라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다만 요즘은 중국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신장돼 학자들도 과거처럼 정부의 공식적 입장에 입각해 발언하는 데서 벗어나 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의 말에 큰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은 여전히 김정일 정권 붕괴시 곧바로 자국에 엄청난 안보상 위협이 초래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북한을 지원하고 달래가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한다고 하는 공식적인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당국자들에게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거론하면 한결같이 “우리가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 우리도 수단이 없어 답답하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럼에도 식량이라든지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대주지 않습니까.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로 봐야 됩니까.

    “저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식량은 거의 70~80%가 중국에서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고, 또 원유는 특히 미국이 1년에 50만t씩 제공하던 중유가 끊긴 이후에는 거의 90% 이상이 중국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북한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정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경제원조를 담보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중국은 그런 영향력을 잘 행사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한다 해도 눈에 덜 띄는 방법으로 할 겁니다. 노골적으로 하게 되면 북한의 반발이 심할 것이니까 행사한다고 해도 중국식으로 부드럽게 하겠지요. 중국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한반도 통일과 美中 관계

    -원유 공급을 언급하셨는데, 그게 중국에서 북한으로 어떤 파이프라인이 설치돼 제공되는 것입니까.

    “헤이룽장(黑龍江)성에 다칭(大慶)유전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나오는 기름이 파이프를 통해 북한에 제공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파이프라인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통과해야 될 텐데요. 제가 듣기로는 압록강 철교 밑에 북한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이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만.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게 있다는 얘기죠. 지난해 3월에 첸치천(錢其琛) 부총리가 북한에 갔다 오지 않습니다. 핵문제와 관련해 북한에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간 것인데,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직후 그 송유관에 무슨 사고가 나서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어요. 관이 워낙 노후해서 고장이 잘 난다는 얘기이지만 워낙 타이밍이 절묘해서 이 사고가 북한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였다는 추측도 나왔습니다.”

    -그러면 중국이 마음먹고 언제라도 꼭지 틀어 잠그면 공급이 중단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북한은 기름에 대한 의존도보다도 석탄 의존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당장 기름구멍을 틀어 잠근다고 해서 북한이 붕괴될 정도로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송유관을 잠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중국이 북한에 대해 압박을 가하려고 한다면 다른 수단들이 엄청 많습니다. 북한은 지금 남북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까. 남쪽에는 휴전선이 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고, 러시아 쪽으로 조금 육지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전부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공항을 폐쇄해 북한 민항기를 못 들어오게 하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타격이 될 것입니다. 그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압력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쓰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거의 끝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어느새 4시간이 다 돼간다.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어떤 속내를 갖고 있는지, 중국정치의 미래 전망을 물어보는 것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 6자회담 중국측 수석대표인 왕이(王毅) 부부장이 아주사장(亞洲司長)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더군요. ‘한반도가 통일됐을 때 중국군이 미군과 압록강에서 서로 총을 겨누는 사태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상유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내심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 통일에 관한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선 현상유지죠. 그런데 현상유지가 깨진다는 것은 곧 전쟁이나 한반도 통일을 의미합니다. 현상황에서 북한 주도의 통일이 어렵다고 본다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이 압록강까지 올라간다는 것 아니겠어요. 중국으로선 굉장히 걱정스러운 측면이죠.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중국은 현상유지를 가장 선호할 겁니다. 좌우간 북한 내의 여러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결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정부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의 한반도관계자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정부 입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한반도 통일국가는 중국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지 말아야 된다, 셋째 통일한국 정부는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와는 동맹관계를 맺지 말아야 된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 조건은 우리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만, 문제는 셋째 조건입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데, 한반도 통일후 미국과 중국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미중관계가 좋고, 당분간 대만문제라든지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큰 변화가 없는 한 양국의 관계가 극적으로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한국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은 우리와 동맹관계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하고 더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말들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북하고 곤혹스러운 게 사실인데, 과연 이런 말이 우리에게 뭘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중국 민족주의의 진로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로 다자적인 협력체를 구성해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아시안을 하나의 틀로 묶는 다자적인 무역메커니즘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다자적인 조직을 자꾸 만들어서 양자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희석시키고 걸러줘야지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우리한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정치사의 흐름에서 볼 때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오늘의 중국을 어떤 의미로 볼 수 있을까요. 또 앞으로 중국정치는 어떤 이정표를 거치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은 19세기 초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서구 열강과 직접 부딪쳤다가 결국은 청조가 멸망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체서용, 그러니까 중국적인 건 그냥 두고 서양의 실용적인 기술을 도입해 근대화에 대응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가 결국 실패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오게 됐습니다. 공산주의가 좋아서라기보다도 중체서용이 표방했던 부국강병이라는 민족주의적인 목표랄까, 꿈 이런 걸 달성시킬 수단으로서 사회주의가 채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마오쩌둥 시절을 지나면서 수단이 잘못됐다는 게 입증됐고, 결국 덩샤오핑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정치적인 부분을 빼고는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거든요. 사회주의의 포기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가 원래 목표였고 사회주의는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시장경제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중국의 민족주의적인 꿈이었던 부국강병을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겠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부국의 꿈’을 상당부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공산당 권력체제가 바뀌는 본격적인 정치개혁은 하지 않은 채 현재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과연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부국강병의 진정한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저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중체서용을 놓고 또 한번의 변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갈 후진타오 체제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이며 동시에 우리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갖는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얘기입니다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후계자의 운명은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이나 후계자가 될 것으로 모두가 믿었던 인물이 권력승계를 못하고 숙청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류사오치(劉少奇)가 대표적인 케이스고, 린뱌오(林彪)가 그랬고 덩샤오핑도 그랬죠.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 사후에 정상에 올랐지만 얼마 못 갔죠. 그리고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은 일단 권좌에 올랐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하거나 사퇴를 강요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후계자의 선출과정이 공개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역사에 비하면 지금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서구적인 의미의 제도화는 아니지만 후진타오의 권력승계과정을 통해 하나의 전통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덩샤오핑의 업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후진타오의 대중적 인기 배경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과거에는 권력을 장악하는 데 군부의 지지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만, 장쩌민이 양상쿤(楊尙昆)과 양바이빙(楊白?) 이복형제의 소위 양가군(楊家軍)을 제거하고 권력을 굳힌 이후에는 군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반면 대중적 인기나 지지가 상대적으로 중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후진타오 체제가 앞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중국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보이는데요. 후진타오의 어떤 점이 중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된 것입니까.

    “말씀하신 대로 군이 권력투쟁에 개입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마 권력승계과정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정도만 남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후진타오의 이미지가 좋게 형성된 것은 우선 청렴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된 부정부패라든지 염문이라든지 주변의 잡음 같은 게 거의 없습니다. 칭화(淸華)대학의 클라스메이트였던 부인이나 자식과 관련해서도 전혀 잡음이 없습니다.

    주변의 친인척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진타오의 고향이 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인데, 그곳에 동생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옛날 모습 그대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후는 지난 10여년 동안 고향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또한 업무파악 능력이나 추진력이 뛰어나고 일에 대한 집념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저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만 전혀 빈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만하거나 차가운 사람도 아닙니다. 겸손하고 따뜻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참 잘생겼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외모도 준수합니다.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나 장쩌민이 호랑이라면 후진타오는 준마라고나 할까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후진타오 체제의 진면목을 파헤쳐볼 차례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에다가 집권당 대표를 겸하고 있는 후진타오와 그를 둘러싼 지도부, 그리고 앞으로 부상할 차세대 리더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

    -흔히 후진타오 체제를 제4세대라고 부르는데요. 중국 권력층의 세대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또 제4세대와 그 전 세대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중국 권력층의 세대 개념은 덩샤오핑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평화적인 지도층 교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자의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 자신은 객관적으로 볼 때는 1세대인데 본인은 2세대라고 주장하거든요. 애매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1세대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창당세대 내지는 장정(長征)세대입니다.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고 34년에서 35년 사이에 대장정이 있었는데,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1세대인 셈이지요. 주더(朱德)나 저우언라이(周恩來)나 류사오치 같은 인물이 모두 1세대에 속합니다. 2세대는 1937년에 일본이 중국본토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항일전쟁 때 당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자오쯔양, 후야오방이 여기에 속합니다. 옌안(延安)세대라고도 합니다. 제3세대는 장쩌민처럼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1949년까지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던 시기에 가입한 그룹으로 내전세대라고도 부릅니다. 후진타오의 제4세대는 1940년대 전후에 태어나서 1949년 공산당 정부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기 시작한, 이를테면 해방후 세대를 말합니다.

    제4세대 지도부의 특성

    이들 제4세대 지도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혁명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창당하고 항일전쟁을 하고 내전에 참가한 경험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혁명적 열정이나 끈끈한 애착이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이들은 거의 전부가 문화혁명 때 심한 정치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문화혁명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당의 중요한 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반(反)문혁, 친(親)개혁개방이라는 특징을 공유하면서 중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탈이념적 민족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정종욱 전 주중대사와 중국정치 내막을 벗긴다

    1996년 2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정종욱 주중대사(왼쪽).

    -후진타오 체제의 또 하나의 특징이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이공계통을 전공한 기술관료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향후 중국의 진로를 예측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들 기술관료 출신 지도자들이 일찌감치 발탁돼 훈련과 교육을 거쳐 등장한 준비된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후진타오만 해도 40대 초반에 중국의 미래 국가지도자로 발탁돼 상당기간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중국 지도자의 발탁과 훈련과정은 어떤 식으로 이뤄집니까.

    “내부적으로 어떤 발탁절차나 훈련과정이 있는지는 자신있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일단 당에는 조직부가 있지 않습니까. 간부를 양성하고 지도자를 선발하는 그런 일차적인 임무를 조직부가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원이 된 사람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눈에 띄면 조직적인 관리를 시작합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노만클라투라(nomanclatura)라고 해서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별도의 관리를 받았었지요. 이들은 보직이라든지 그밖에 여러 선발과정에서 특별관리대상이 됐었는데, 중국도 비슷합니다. 당 조직부에서 예비지도자로 떠오른 사람들에 대해 초기부터 경력을 관리하고 이들 가운데 중앙위원을 뽑고 또 중앙위원들 중에서 정치국원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뽑히는 그런 단계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엄격한 심사와 경쟁을 거칩니다.”

    -그런 예비지도자를 양성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후진타오 체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출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중국의 정치를 예측 가능하게 하는 그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점에서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과 함께 벌써부터 10년 후의 차세대 리더들이 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다음 10년을 대비하는 계획들이 구체화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그 다음 10년, 20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10년 후 4세대가 물러나면 5세대가 권력의 정상에 등장할 겁니다. 지금 나이로 50세 전후인 이들은 벌써 장관급의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지방에서는 당 서기나 성장(省長)이 되어 있고 중앙에서는 부장(장관)이 됐습니다.

    10년마다 정권교체 제도화

    5세대의 대표주자로는 허난(河南)성 서기 리커창(李克强), 저장(浙江)성 서기 시진핑(習近平), 랴오닝(遼寧)성 성장 보시라이(薄熙來)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몇 명은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은 물론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고 다음 5년 후에는 정상에 오를 것입니다. 6세대와 7세대도 이미 올라오고 있습니다. 선발 68세대, 양성 79세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68세대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지금 40대 전후의 젊은 세대인데 이들이 20년 뒤의 차차기를 대비해서 지금 선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79세대는 70년대에 태어나서 9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30대 전후 세대로서, 앞으로 30년 후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나서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금부터 양성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도부 교체가 어느 정도 제도화돼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총서기라든가 국가주석의 임기가 5년으로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게 헌법에 규정돼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도부가 대과 없이 임무를 수행할 경우 연임하면 10년마다 새 정권이 들어서도록 제도화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헌법에 규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중국의 최고지도자 교체는 대개 10년을 주기로 이루어집니다. 1997년의 15차 당대회 때 이런 관행이 합의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관행에 따라서 당과 정부의 영도들은 3회 연임이 금지되고 나이가 70이 넘어도 안 됩니다. 현재 70이 넘은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맡고 있는 것은 이 규정에 저촉되지만 군사위 주석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당 중앙의 정치국 상무위원들도 이런 규정을 적용받으니까 자기가 안 나가려고 해도 70이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지도층의 교체는 1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도록 돼 있고, 그 중간에 5년마다 한번씩 당대회가 열리니까 일종의 중간점검을 통해 작은 조정을 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20년, 30년이라면 먼 훗날의 얘기이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10년을 주기로 세대간에 권력을 교체하는 관행은 이제 하나의 정치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아니지만 세대간에 이루어지는 중국의 지도부 교체는 특기할 만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사회에서도 인맥과 파벌의 위력은 정평이 나 있다.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관시(關係)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한국인에게도 상식이 됐을 정도다. 오래 전부터 중국정치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중의 하나도 바로 이 파벌 문제다. 장쩌민 주석 시절에는 상하이방이 뜬다는 말이 나돌았고, 요즘은 또 궁칭방(共靑幇)이니 칭화방(淸華幇)이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다.

    -중국정치에 파벌이란 개념이 부각된 연원은 어떤 것입니까.

    “파벌의 기원은 역시 1949년 중국공산당 정부수립 이전의 항일전쟁시기(1937~45)와 국민당과의 내전시기(1946~49)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공산당의 각 군대가 4개의 야전군으로 나뉘어 국민당이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속에서 서로 고립되고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4개의 외딴 섬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한 야전군에 배속을 받게 되면 다른 야전군으로 전근을 간다거나 왔다갔다 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같은 야전군에서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게 1949년 이후 중국정치의 인맥을 형성하는 근거가 됐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은 제2야전군에, 린뱌오는 제4야전군에 오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린뱌오가 득세할 때는 제4야전군 인맥들이 따라서 출세하고, 또 제2야전군 출신들은 덩샤오핑과 정치적 부침을 함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서방학자들이 파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그걸 통해서 중국정치를 보는 게 한때 유행했습니다.”

    -그런 인맥과 파벌의 정치행태 역시 지금은 상당히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출신대학이나 출신지역에 따라 인맥형성이 활발하다는 말도 들립니다.

    “정치라는 게 조직이 하는 것이고, 파벌도 하나의 조직이라고 본다면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형태를 달리할 뿐 파벌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군 근무경력보다는 방금 말씀하신 출신지나 성장지역, 출신학교나 사회생활 경력 등에서 경험을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조직을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죠. 상하이방과 같은 지방(地幇)이 있고 칭화방 같은 학방(學幇)이 있는가 하면 단방(團幇)이나 직방(職幇)도 있습니다.

    단방은 꼬마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청년단 인맥을 말하는데 후진타오나 왕자오궈(王兆國), 후야오방 등이 대표적 인물로 꼽힙니다. 직방은 직장의 근무인연을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조직적인 권력기반이 될 수 있는 거죠. 이를테면 장쩌민이 1950년대 초 소련유학에서 돌아온 후 처음에는 창춘(長春)에 있는 창춘제일자동차공장에서 근무했고, 그 뒤에는 베이징으로 와서 제1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에서 근무를 하거든요. 이런 인연으로 장쩌민이 당총서기로서 권력의 정상에 있었을 때 자동차방이니 기계방이니 전자방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무차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파벌이라는 개념은 중국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다만 흔히 상하이방 얘기를 많이 하는데 상하이방이 과연 그렇게 응집력이 있느냐에 대해서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방에 속하면서 궁칭방에 속할 수도 있고 칭화방에 속할 수도 있거든요. 상하이 출신으로 칭화대학 나와서 궁칭단에서 일하면 셋 다에 속하니까요.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중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같은 상하이방이라 하더라도 맡고 있는 업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하이방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사불란한 행동을 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정치 가운데서도 마오쩌둥 사상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 ‘대약진운동의 등장과 마오쩌둥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중국정치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심이 많다. ‘주의’와 ‘사상’ ‘이론’이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중국 정치현실에서 이데올로기의 현주소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중국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등이 정치행위의 기준이랄까 원리원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장쩌민대에 와서는 3개 대표론이 있었고요. 이런 이데올로기가 정치과정이나 권력투쟁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상징적 측면에선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고 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게 원래 이데올로기의 차별성을 근거로 출발했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게 세계관이나 역사관 같은 추상적 이론이지만 동시에 당의 지도노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이데올로기나 사상, 그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 당장(黨章)에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956년 8월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가 열렸을 때 당장이 수정돼 당의 지도이념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빠졌습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난했기 때문이지요. 마오의 권력장악력은 그때부터 내부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중국공산당의 당장을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그리고 3개 대표, 이 4가지를 지도이념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3개 대표는 3개 대표론이라 해야 표현이 맞는데, 무언지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실제 그렇지요.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게 바로 권력층 내부의 복잡한 역학구도를 대변하는 거지요. 처음에는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 했는데 그렇게 되면 장쩌민이 덩샤오핑과 동격이 되기 때문에 내부에서 반대가 일어 애매한 채로 3개 대표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당장에 특정인의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상당히 강화되고 보장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장쩌민이 3개 대표론을 당장에 삽입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고 또 내부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장쩌민으로서는 자신의 이론이 당장에 명문화될 경우 권력을 잡고 있든 아니든 간에 공산당 역사에서 지위가 엄청 강화되기 때문에 넣으려 애를 썼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 중국 신문들을 보면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금년 3월에 전인대가 열리면 여기서 국가 헌법을 고쳐 3개 대표론을 국가 지도이념으로 삽입하기로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결정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그만큼 역사에서 장쩌민의 몸 만들기 작업이 아직도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도 자세히 구분해보면 주의(ism)와 사상 이론 혹은 특정한 명칭이 붙지 않는 정치적 논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실제 중국정치에서 어떤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차이가 있죠. 마오쩌둥사상은 마오쩌둥주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론을 덩샤오핑사상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중국에서는 이 점을 굉장히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주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론을 의미하고, ‘사상’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이론을 중국에 적용시킨,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구체적이고 제한된 의미로 사용됩니다. 또 ‘이론’이라는 것은 흔히 주의나 사상의 하위개념이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오쩌둥사상이 덩샤오핑이론의 상위개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만 마오쩌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무시당하고 마오쩌둥사상은 부정당하는 게 오늘의 중국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덩샤오핑이론이에요. 소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든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바로 덩샤오핑이론 아닙니까. 장쩌민의 3개 대표라는 것은 이론보다는 조금 더 제한된 의미를 갖는 거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사상이나 이론의 현실적 적응이나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수용이 아니라 새로운 변혁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다시 말해 주의와 사상과 이론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위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거꾸로 올라가지 않나 싶어요.”

    -3개 대표란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다수 인민대중의 이익 이 세 가지를 당이 대표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선진생산력은 기업가를, 선진문화는 지식인을 의미하고, 다수 인민대중의 이익이라는 건 결국 노동자나 농민, 사기업가 소시민들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나 기업가까지 다 끌어안고 그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새롭게 정리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업가를 착취계급으로 보지 않고 당이 대표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의 공산주의 논리로 볼 때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이데올로기라는 게 중국 정치현실에서 유명무실해진 것 아닐까요.

    ‘3개 대표’의 등장 배경

    “바로 그 점이 지금의 중국정치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핵심 포인트죠. 지금 중국은 경제 부분에서는 아마 우리나라보다 더 자본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비국유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유 부분을 능가하면서 국유기업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철밥통 이론이 깨져나가면서 실업자가 양산되고 도산기업이 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꾸면서 복권을 사고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증권에 투자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젊은 인재들은 거의 사기업 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들어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죠. 이런 경제부분의 변화를 정치에서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공산당이 변화를 외면하고 노동자 농민의 정당으로 남기를 고집하면 소수정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3개 대표론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 계층의 이익을 정치권에서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문제는 공산당이 모든 계층을 대표하는 국민정당이 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3개 대표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모순도 그렇고, 계속해서 경제가 발전하다 보면 인민의 민주화랄까 자율화, 다원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텐데, 지금의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로 과연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지금까지는 일당독재 체제하에서 정치적 안정이 보장된 덕분에 경제가 상당히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비슷한 개발독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경제만으로는 안 되고 정치와 경제가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게 대충 국민소득 3000 내지 5000달러로 보고 있어요. 그런데 중국은 2020년 중국말로 샤오캉(小康)상태가 되면 1인당 국민소득이 그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 실제 구매력으로 따지면 벌써 3000달러 가까이 될 겁니다. 따라서 그동안 경제성장이란 명제에 억눌려왔던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요구가 급속도로 터져나올 겁니다. 그래서 2003년 10월에 열렸던 중국공산당 16기 3중전회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정치과정을 보다 투명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당 외곽에 머물러 있던 소외계층을 당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공유단계를 넘어 복수의 정당들 간에 정책경쟁을 전제로 한 다원적 정치구조가 정착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이런 정치구조는 당분간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종욱 전 주중대사와 중국정치 내막을 벗긴다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1차회의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후진타오(왼쪽)와 정치국 상무위원들.

    중국정치 탐험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중국공산당일 것이다. 인구의 약 5%인 6600여만명의 당원이 13억 인구를 이끌고 있는 세계최대의 정당이 바로 중국공산당이다. 이 중국공산당의 실체와 그 특성을 파악하지 않고 중국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공산당이 실제로 어떤 시스템으로 대륙을 움직여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자.

    -중국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체가 바로 중국공산당 아니겠습니까. 그런 공산당원도 요즘엔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있더군요. 젊은 사람들 중에는 당원이 돼봐야 도덕적 의무감만 커지고 실속은 없다며 굳이 당원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 풍조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각 분야, 예컨대 어떤 기관이나, 조직, 단체의 장은 100% 공산당원 아닙니까.

    “최소한 정부기구의 장을 비롯한 주요직책은 100% 공산당원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죠.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부의 주요 책임자는 예외없이 당원으로 채워지고 그 밑의 조직, 예를 들면 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현(縣) 같은 일선 지방행정조직의 주요 책임자도 모두 당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민간기업이나 외자기업이 많이 출현했는데, 그런 곳은 사정이 다르겠죠.”

    -중국 공산당이나 당원의 위상을 보면 참 특이해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당-국가체제로 공산당과 국가기관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당서열 1위 후진타오는 영어로 프레지던트로 번역되는 국가주석을 맡고, 당서열 2위 우방궈(吳邦國)가 국회의장 격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이죠. 3위인 원자바오(溫家寶)가 국무원총리입니다. 이런 권력구조의 특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권력이 소수의 엘리트집단에 집중돼 있는 한편 서로 견제도 하는 일종의 분권형 권력구조로 볼 수 있을까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중국에서야말로 모든 권력은 당에서 나와 당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당 내부의 사정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오쩌둥 시절엔 당의 권력이 1인지배체제로 당주석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의 의도에 따라서 권력이 분담되는 형태였어요. 마오쩌둥이 죽고 난 다음에 화궈펑이 잠깐 했지만 그후 당주석제가 없어집니다. 1972년 13차 당대회 때 주석제 대신 총서기제를 도입했습니다. 총서기는 원칙적으로 ‘총(總)’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어도 하나의 서기에 불과합니다. 주석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총서기는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입니다. 당중앙의 결정을 집행하는 부서인 서기처 서기들을 총괄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비롯하여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각종 회의를 주재하지만 투표할 때에는 한 표밖에 행사하지 못합니다. 즉 영향력은 있지만 결정권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권력을 공유하면서 그 안에서 권력의 분담이나 분산이 이루어지는 합의형 지도체제로, 특정 개인보다는 조직에 권력이 집중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당중앙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는 당의 중앙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조직의 핵심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당위(黨委) 혹은 당위원회라는 말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듣기로는 중국의 경우 공산당원이 3명 이상인 기관이나 단체나 조직이면 반드시 당위원회가 조직돼 있다고 하던데요. 실제로 이 당위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국의 통치원리를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당위원회의 파워라든가 역할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당원의 수가 적은 기초조직에서는 당조를, 규모가 큰 곳에서는 당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웬만한 기관에 가보면 예외없이 당위원회가 있고 그 책임자인 당위원회 서기가 최고 실세로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엘 가면 경영을 책임지는 공장운영위원회가 있고 당 조직과 정치문제를 책임지는 당위원회가 있거든요. 그런데 서열상으로 당위원회가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공장책임자는 대개 당원이고, 그가 당원인 이상 당위원회에 들어와 조직원으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죠. 최근 경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결정은 당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당위원회의 위상은 성(省)의 성장(省長)과 당위 서기의 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장을 하다 잘하면 서기로 승진합니다. 반대로 서기를 하다가 성장으로 나가면 좌천입니다. 지금의 정치국에는 베이징시, 상하이시, 푸젠성, 장쑤성 등의 당위 서기는 들어와 있지만 성장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장이 그 성의 모든 행정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서기는 정치문제를 비롯해 전반적인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일은 성장이 더 많지만 위계질서상 서기 밑에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외교부의 예를 들어보죠. 외교부에도 당연히 부장(장관)을 포함한 당위원회가 설치돼 있고 이 기관이 최고 결정권을 갖습니다. 지금 외교부의 당위 서기가 아마 수석부부장인 다이빙궈(戴秉國)일 겁니다. 그런데 외교부장은 리자오싱(李肇星)이거든요. 분명히 리자오싱 부장도 당위원회 멤버일 겁니다. 그러니까 당의 조직으로 따지면 오히려 다이빙궈가 더 높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조금 애매하지요. 아마도 리자오싱은 부장으로서 대외업무를 총괄하고 다이빙궈는 당위 서기로서 인사문제를 포함하여 대내 문제나 당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이빙궈는 원래 당에서 연락부장을 했으니까 장관급이고 리자오싱은 전에 부부장(차관)급 인사였습니다. 대외연락부로 옮겨가기 전에도 외교부에 있었는데 그때도 부부장급으로서 리자오싱보다 직급이 높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 관계로 따지면 다이빙궈가 리자오싱의 상급자란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외교정책과 당 업무를 분장하는 분업체제를 형성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중국은 강력한 일당독재국가여서 국가의 리더십이 매우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경우 핵폐기물처분장 건설이라든가 새만금사업 등등 국책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지지부진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중국은 아직도 당과 정부의 힘이 막강해서 대형 프로젝트를 과단성 있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현장에서 보신 바로는 당정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로 발휘되고 있습니까.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우리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 중앙집권제니까요. 중앙의 힘이라는 게 정책과 예산과 인사권이잖습니까? 중국에서도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정부의 권한 중 상당부분이 지방으로 넘어갔어요. 예산이 특히 그렇고 정책에 관련된 권한도 많이 넘어갔습니다. 덩샤오핑이 조대방소(?大放小)라고 해서 큰 것은 중앙이 잡고 있고 작은 것은 지방으로 내려보내라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도 인사권은 다 중앙에서 쥐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거지요. 우리나라는 지금 중앙의 인사권이 많이 약화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중국에서는 당을 통한 중앙정부의 리더십이 아직까지는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합니다. 비근한 예로 광시(廣西) 자치주에서 당위 서기도 하고 성장도 하고 중앙에서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사람을 부정부패 혐의로 사형시켰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중앙정부의 권한이 세다는 얘기죠.”

    上有政策, 下有對策

    -지난번 사스파동 때 보면 베이징시 외곽에 사스전문병원을 만들었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완공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청량리 위생병원인가를 사스 지정병원으로 삼았다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은 취소했습니다. 아주 대조적이죠. 물론 국가의 리더십이 지나치다 보면 환경문제 같은 것을 도외시해서 나중에 시행착오의 비싼 대가를 치를 가능성은 있지만, 어쨌든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이 중국이 계속 힘을 키워나가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이 서부개발과 관련해서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잖아요. 남방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온다는 남수북조(南水北調) 사업이나 서쪽의 가스를 동쪽으로 가지고 오는 서기동송(西氣東送) 사업 같은 것은 엄청난 역사(役事)입니다. 이런 사업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죠. 아직까지 중국은 정치체제라든지 행정체제가 명령식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 시기에 경험했지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하고 규모가 큽니다. 다만 지적하신 것처럼 그런 명령식 행정체제는 잘못된 결정이라도 한번 시작하면 고장난 자동차처럼 계속 그쪽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문제점이 발생한 다음에도 고치기가 힘듭니다.”

    -중국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로 ‘상부에 정책이 있으면 밑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게 있습니다. 주로 부패현상을 이야기할 때 인용되곤 하는데, 중앙의 지시나 방침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또 한편으로는 중앙은 어떤 원칙이나 방향만 정하고 지방정부가 특성에 맞게 조정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라가 크다 보니까 중앙과 지방의 관계가 주목을 받는데요. 그 실상은 어떻습니까.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 가운데 하나가 중앙과 지방의 관계일 것입니다. 정책의 틀이나 방향 같은 큰 줄기는 아직도 중앙정부가 잡아주지만 구체적 내용은 지방의 특성에 맞춰 실행하도록 일임합니다.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경제개발사업과 개혁조치도 많아졌고요.

    그래서 중앙정부에 가서 어느 지방의 사업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은 대개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걸로 알고 무조건 베이징에 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방정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들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독자성도 강해지는 셈입니다. 전통적으로 중앙정부에 대해서 독자적인 성향이 뚜렷한 지방일수록 더욱 강합니다.

    예를 들어 광둥(廣東)성이 그렇습니다. 광둥성은 재정자립도가 엄청 높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베이징과는 전혀 다른 정서와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베이징 정부에서도 이 지역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광둥성 책임자가 특별히 베이징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 임명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난번까지 리창춘이 광둥성 당서기였는데 지금은 장더장(張德江)이라고 하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당서기로 있습니다. 정치국원이면서 광둥성에 나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 정치국에는 주요 성(省)의 당서기가 7명이나 됩니다. 상하이시 당서기로 있다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황쥐(黃菊)나 산둥성 서기로 있다가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우관정, 비슷한 경우인 리창춘, 왕자오궈 등을 합치면 10명이 넘습니다. 정치국 정원이 24명이니까 40퍼센트가 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정치국에 들어가고 싶으면 지방에서 당서기를 하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입니다. 군이나 당중앙이 정치국원을 독식하던 시기는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지식, 유머감각 뛰어난 지도자들

    -사실 지방이라고 하지만 땅이나 인구의 크기로 본다면 웬만한 하나의 국가라고 할 만한 규모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웬만한 국가보다 큰 경우가 많죠. 충칭(重慶)직할시만 해도 인구가 3500만입니다. 충칭시는 원래 쓰촨(四川)성의 일부였다가 직할시로 독립해나갔습니다만, 현재도 쓰촨성의 인구가 9000만쯤 되니 독립국가라고 해도 상당히 큰 나라지요. 이런 현상이 충칭시나 쓰촨성에 한정된 게 아니니까 중국의 성(省)을 우리의 지방정부 개념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죠.”

    정종욱 전 대사는 장쩌민 전 주석과 후진타오 현 주석 등 당과 정부의 최고위층 인사들은 물론 기업인, 한반도전문가 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중국인들을 접촉해왔다. 정 대사가 직접 만나본 중국 지도층 인사들의 면면은 어땠을까. 또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느낀 중국의 대(對)한반도정책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제 기억에 1997년인가 장쩌민 주석이 미국 방문 도중 하와이에 기착했을 때 하와이 주지사 부인이 피아노를 치고 거기에 맞춰서 장주석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유창하게 불러서 미국사람들한테 상당히 신선한 이미지를 심어준 일이 있었어요. 그때 중국 지도자들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해온 공산당 수뇌의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외국어도 잘하고 국제 무대에도 능숙하게 대처한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지요. 실제로 만나본 중국 지도자들의 진면목은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최고위층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평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만, 그동안의 접촉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대단한 능력과 뛰어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만났던 중국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외국유학이나 연수의 경험이 드문, 주로 국내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는데도 대부분은 국제정치에 대해 상당히 조예가 깊고, 중국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긍지, 사명감이 놀라울 정도로 투철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금 장쩌민의 인간적인 면모를 언급했지만, 역시 직접 만나보니까 근엄한 외모와 달리 농담도 아주 잘하고 유머러스하더군요. 여유가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편안한 느낌을 받았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청렴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후진타오 주석은 1998년 1월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옆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자상할 뿐 아니라 말도 아주 논리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그때 한국의 IMF사태, 국제금융위기, 중국의 국내정치와 한중관계 그리고 전반적인 세계정세 등이 화제였습니다만 그의 지식의 폭, 특히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이 깜짝 놀랄 정도로 넓고 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야기 도중 관련 수치를 언급할 때는 메모도 보지 않고 마치 컴퓨터식으로 나오는 걸 보고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분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2시간 반 동안 얘기를 하면서 자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13억 가운데 지도자로 뽑혔으니까 그러기도 하겠지만 역시 유능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후진타오 주석은 출세한 이후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덩샤오핑도 15세에 쓰촨성 고향 마을을 떠난 이후 죽을 때까지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요. 또 그런 지도자를 배출한 고향이라 해서 특별히 덕을 본 것도 없다고 하죠. 이런 걸 보면서 그야말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지도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죠. 마오쩌둥도 아마 고향엘 가지 않았을 겁니다. 마오는 개인적으로 청렴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희생을 당한 사람 아닙니까. 작은아들은 국민당에 잡혀서 죽고 큰아들은 한국전쟁 때 죽어 사실상 혈육이라곤 리민(李敏)이라는 딸 하나밖에 없었죠. 최근 그 딸이 ‘나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책을 보더라도 마오는 역시 독재는 했을망정 부정이라든지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여성편력이 심했다는 평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피운다거나 여러 명의 여성과 어울린다거나 한 건 아니었죠. 딸 리민에 대한 마오의 사랑도 특별했고요.

    저우언라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없었고 금전문제 같은 건 더욱 더 엄격했고, 주변 친인척 관리를 보면 숙연해질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었죠. 사적으로 그만큼 희생했기 때문에 공적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북핵문제 대책팀장 후진타오?

    -대사 재임기간 중 만난 중국의 유명인사나 공직자 중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제가 베이징에 근무할 때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당시 외교부 부부장으로 한국문제를 맡고 있던 탕자쉬안(唐家璇)입니다. 지금은 국무위원, 그러니까 부총리급으로 중국외교를 사실상 전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스타일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이를테면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가 잘 가는 뒷골목 음식점으로 저를 데리고 갑니다. 개인적인 터치가 아주 강하고 선이 굵은 사람으로 보스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줍니다. 물건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측이 요구했던 것 중 실무 차원에서 잘 풀리지 않았던 걸 하나씩 해결해줘요. 역시 노련한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밖의 고위관료 중에는 우이(吳儀) 부총리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은 부총리로 대외부문, 특히 경제관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만 당시는 대외경제무역부장, 우리로 치면 산자부 장관이었습니다. 한중간 무역문제로 비교적 자주 만났는데 두뇌회전이 빠르고 낙관적이면서도 치밀한 분입니다. 한마디로 여장부지요.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鄧樸方)도 인상적인 사람입니다. 문화혁명 때 베이징대학에 다니다가 홍위병에 쫓겨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쳤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중국 장애자협회 회장이었습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책을 많이 읽어 그런지 참 박식합니다. 당시 막 화제가 되고 있던 책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어요. 한번은 제가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덩푸팡이 문명충돌론을 화제로 얘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 책을 다 읽은 것은 물론이고 상당히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데 그 아래에 소변통 같은 것이 달려 있어 모양이 아주 우습죠. 엄청난 박해를 받아 불구자가 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모습으로 해박한 비전을 내비치면서 논쟁하는 것을 보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고위층 인사들과 개인적으로 친숙한 분위기에서 만나게 되면 공식적인 대좌에서는 말하기 꺼리던, 예를 들어 북한문제 등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기도 합니까.

    “안 털어놓죠. 털어놓을 수가 없지요. 다만 이런 건 있었죠. 황장엽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에 탕자쉬안 부부장과 둘이서 뒤풀이 비슷하게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황장엽 사건 때 중국외교부와 남북한 사이에 치열한 삼각외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탕 부부장이 그러더군요. 한 달 남짓 동안에 한국대사는 14번 만났고 북한대사는 15번 만났는데, 한국대사는 15분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실제로는 30분 이상이 걸렸고 북한대사는 10분이면 끝났다고 말입니다. 북한대사와는 대화가 잘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최근 중국이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셔틀외교에 나서는 등 과거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북핵문제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고 판단을 했겠죠. 특히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대단히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표현했고 북한에 대해서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거론했고요. 그리고 만약 북한의 핵보유가 공식화되면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날 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까지도 핵무기를 갖겠다고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지난해에 당중앙에 북핵문제를 다룰 위기대책반이 가동됐고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책임을 맡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외교부내에 북핵대책반이 설치된 것은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국이 북핵문제가 야가할 사태를 심각하게 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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