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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②

‘변신의 귀재’ 야설록

고독, 허무, 퇴폐로 무장한 자학적 반항의 변주곡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변신의 귀재’ 야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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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귀재’ 야설록
‘변신의 귀재’ 야설록

야설록과 그의 주요 작품들.

이쯤에서 우리는 능조운의 죽음 이후 ‘마객’의 무림 세계가 어찌 될 것인가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정파의 위선적 지배라는 종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마객’은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을 드러낸 뒤 다시 길들이고(마치 위험한 욕망의 위험하지 않은 분출을 통해 그 위험성을 제거하듯이),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성 질서의 불가피함을 선양하는 작품이 되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림 세계 자체의 일정한 성숙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그 성숙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앞에서 말한 모순으로서의 진실과 관계되는 성숙이리라 짐작할 수는 있겠다.

고독한 늑대

그렇다면 능조운의 반항과 비극적 죽음은 일종의 희생양인 것이 아닐까. 그것을 통해 외적으로는 세계 질서의 거듭남이 가능해지고 내적으로는 사춘기 청소년에서 성인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지는 그런 희생양 말이다. 바로 그런 희생양을 과장되게, 그리하여 강렬하게 그렸기 때문에 청소년층 독자들 사이에 야설록의 인기가 그토록 높은 게 아닐까.

작가는 흔히 첫 작품에서 자신의 여러 모습을 다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야설록의 경우도 그러하다.



우선 ‘마객’과 같은해에 나온 ‘강호벽송월인색(江湖碧松月人色)’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엔 대만 무협소설의 흔적이 뚜렷하다. 서장(티베트)에서 온 신비고수가 중원의 고수들을 꺾은 후 20년 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중원에서는 그 신비고수와 대결할 청년 고수를 선발한다는 이야기는 워룽성의 이름으로 번역 출판된 한 작품(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에 나온 것이고, 쌍둥이 형제가 어려서부터 각각 정파와 사파 인물들 손에서 자라나 훗날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구룽(古龍)의 ‘절대쌍교(絶代雙驕)’에 나온 것이다(그러고 보면 야설록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작가는 구룽인 것 같다. 구룽에게도 ‘고독’은 주된 테마다).

구룽이 그랬던 것처럼 야설록도 사파 인물들 손에서 자라난 야유랑(夜遊狼)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야설록은 야유랑을 신비고수의 잃어버린 아들로 설정하여 살부(殺父)를 핵심 모티프로 삼음으로써 자기 나름의 서사를 구축했다. 야유랑이 어머니뻘인 화중성 설지를 두고 신비고수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마지막 비무(比武)에서 신비고수를 죽이는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점에 주목하면 이 작품 역시 반항 주제의 한 변주이자 일종의 성인식(成人式)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1983년작 ‘영웅비파행(英雄琵琶行·1996년에 재출판하면서 ‘협객’으로 개제)’은 ‘마객’과 상반되는 설정이다. 주인공 무검혼(武劍魂)은 팔려온 노예로 등장하여 온갖 고초를 겪는 데다 무심한 표정에 괴팍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마객’의 능조운과 유사하지만, 정파의 고인 논검기재에게 배우고 다시 소림사의 공공대사에게 배워 고수가 되는 데서부터 능조운과 달라진다(무검혼의 본래 신분이 귀족이라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검혼은 무도를 추구하기 위해 비무행에 나서고 이로 인해 정·사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나는 늑대를 좋아하지. 그들은 고독하며 또한 그 고독에 가장 충실한 특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의 무검혼은 능조운과 흡사하다. 그러나 중원 제일화라는 상품을 거부하며 군중을 향해 “무림은 부패했소. 무인들의 마음은 썩었소. 협의는 사장(死藏)되고 이기(利己)와 배덕이 그 위를 판치고 있소”라고 질타할 때의 그는 이미 대협(大俠)이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정·사의 구별을 초월한 대협 무검혼의 탄생으로 종결되는바, 필자에게는 야설록의 ‘반항’이 1980년대 한국 무협소설의 유행 사조와 타협해가는 과정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질서, 그리고 파멸

‘북경야(北京夜·발표연도 미확인)’의 주인공 최세옥(崔世玉)은 남옥(藍玉) 대장군 휘하의 소년 장군이다. 역적으로 몰린 남옥을 끝까지 수행하다 체포당한 그는 감옥에서 5명의 동지를 만나고 함께 탈출, 중원겁화방을 세운다. 가문의 발원지를 찾아 무공을 완성한 최세옥은 “천하의 억울하고 불행한 자들은 모두 모여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구대문파에게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일반 문파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한다.

정치에서 무림으로 장소가 옮겨졌지만 최세옥이 하고자 하는 것은 기성 질서를 해체하고 ‘억울하고 불행한 자들’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창방 1년여 만에 중원겁화방은 중원을 제패하는 데 일단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 뒤에 오는 것은 새로운 질서 세우기가 아니라 급속한 파멸이다. 6명 동지 중 한 사람인 위무웅이 내분을 일으킨 데다 무림맹의 총사 백선하(그녀는 ‘마객’의 백연하를 연상시킨다)가 무섭게 공격을 해와 중원겁화방은 급속히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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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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