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초자연적 생명력 ‘냐마’에 순응하는 오지(奧地)의 순수

  • 글: 유종현 전 주(駐)세네갈 대사·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입력2004-01-29 18: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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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의 거센 흐름은 아프리카대륙의 순수성마저 퇴색케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소수민족사회에서는 그들만의 고유문화를 영원으로 이어가려는 눈물겨운 시도가 계속된다. 후진사회라는 고정관념을 뒤엎는 아프리카 말리의 이색적 풍물과 역사.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2003년 7월29일부터 8월5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아프리카 말리의 오지(奧地) 젠네(Djenn?와 몹티(Mopti), 그리고 도곤(Dogon) 마을을 답사했다. 필자가 말리의 내륙지방, 특히 험준한 지역을 방문하게 된 것은 8명으로 구성된 현지답사 및 촬영팀의 자문역 겸 안내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촬영팀은 사진가로 이름 높은 김중만 선생 부부와 그를 돕는 스태프, 기획사 MEDIX KOREA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장인 최동인 PD, 카메라맨과 보조, 그리고 이번 답사 촬영사업을 기획사와 공동주관한 아프리카미술박물관(서울 동숭동 대학로 소재)의 한종훈 관장으로 구성되었다.

    일행이 파리를 경유하여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 도착한 것은 7월29일 밤 10시경이었다. 바마코 국제공항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무질서와 후진성,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출발에 앞서 조일환 주(駐)세네갈 대사를 통해 바마코 주재 한인회의 김치년 회장을 소개받아 사전준비를 부탁한 덕분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바마코에서 최종 목적지인 도곤 마을까지는 700km. 그러나 도로포장 상태와 검문소를 감안하면 2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때문에 일행은 중간지점인 첫 방문지 젠네에서 2박하며 그곳에 있는 대사원을 촬영하기로 했다.

    젠네 대사원의 독특한 흙기둥 건축양식



    젠네는 인구 약 2만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세계적인 이슬람 대사원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다. 12∼13세기경 이슬람교가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남으로 전파되면서 이 사원이건조됐다고 한다. 사원 앞에는 빛바랜 하늘색 페인트 간판 2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하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사원의 약사(略史)를 프랑스어로 기록한 표지판이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1280년 젠네 제26대 왕 코이 콤보로(Ko Komboro) 건립, 1834년 9월 세쿠 아마두(S kou Amadu)가 폐쇄, 1905년 10월 재건’이라는 내용이다.

    표지판의 내용과 같이 젠네 대사원의 운명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1815년 당시 젠네 통치자 세쿠 아마두는 대사원 부지에 학교를 건립하고 1834년 사원을 폐쇄했다. 이후 사원은 70여 년 동안 폐쇄되었다. 20세기 초반 들어 학교 건물을 철거하고 현재의 대사원을 다시 건축했다고 한다.

    대사원의 건축양식은 독특하다. 진흙벽돌로 쌓아올린 건축물로 그 특이함과 희귀성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높이 약 20m,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55m인 건물의 웅장함은 말할 것도 없고 외벽 군데군데에 세로 1.5m, 가로 0.6m 정도의 간격으로 총총히 박혀 있는 나무토막이 인상적이다. ‘토론’이라 불리는 이 나무토막은 서부아프리카 사헬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건축양식이다. 토론은 팜(종려나무)의 가지나 둥치를 세로로 쪼개 다발로 뭉친 것이다.

    토론은 해마다 대사원의 내외벽에 진흙옷을 입히는 크레피사주(cr럓issage) 작업 때 발판으로도 사용된다. 크레피사주 작업에는 주변 무슬림들이 자원봉사로 참가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작업이지만, 그들은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행사를 참가자 상호간의 경쟁이자 즐거운 축제로 여긴다. 이 연례행사는 오늘날 젠네 주민의 전통문화로 자리잡았다.

    유럽의 한 건축미술사학자는 “토론이야말로 대사원 유지보수의 핵심이다. 크레피사주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 건축물은 완료형인 동시에 영원한 진행형으로, 아프리카인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라 평가했다. 젠네 사람들의 믿음에는 ‘냐마’라고 하는 초자연적 생명력이 있다.

    대사원의 건축양식을 두고 관련학계에서는 사하라 이남과 북아프리카 양식이 절충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학자는 이슬람교가 이곳으로 전래되기 전인 BC 250년경 형성된 고대유적지 젠네제노(Djenn?Dj뢮o, 젠네에서 3km 거리)에서 유래된 고유양식이라고도 한다. 젠네제노 유적지 역시 대사원과 묶어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여하튼 1890년에 젠네 대사원을 처음 본 한 프랑스인은 “이 지역에 와서 인간이 만든 작품에 감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까지 말했다 한다.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도곤족의 춤.

    흙기둥 건축양식은 비단 대사원뿐 아니라 젠네 주민의 일반 가옥에까지 옮겨졌다. 사하라 가장자리의 삭막한 불모지에 위치한 젠네는 특이한 건축양식으로 스스로를 신성하고 우아한 요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영향으로 젠네 사람들은 옛 전통에 의지하여 가뭄, 정치적 혼란, 외침 등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굳건히 살아 남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새벽부터 대사원으로 달려가 촬영에 열을 올렸다. 지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은 건축물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촬영은 장소를 옮겨가며 각도와 원근을 달리하여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어디선가 코란을 읊는 구슬픈 가락이 울려퍼진다. 그러나 젠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록 이슬람 교육을 받고 코란을 암송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이슬람이 전래되기 이전부터 신성하며 초자연적 생명력인 냐마가 살아 숨쉬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와 같은 저력 덕분에 젠네는 주변의 여러 왕국, 여러 제국보다도 더 오래 존속해 흙과 인간의 의지가 이룩해낸 도시로 우뚝 선 것이다. 젠네의 미래에 관하여 한 젊은 이슬람 수도사는 “사람들은 젠네가 가치를 잃게 되고, 주민들이 버릴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젠네의 인구는 예전보다 늘 것입니다. 미래의 젠네는 곧 과거의 젠네입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최근 현지를 답사한 서양인 캐런 E. 랭은 “젠네의 생존과 미래는 과거의 정수(精粹)를 보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도시는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영원한 것을 지켜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젠네를 지속시켜주는 궁극적인 힘 냐마다”라고 나름대로 냐마의 생명력을 평가했다.

    흥미로운 외형과 구조

    대사원의 구조는 흥미롭다. 우선 사원이 위치한 자리는 길이 400m, 너비 150m의 장방형 광장이다. 건축물이 서쪽 깊숙이 들어앉아 동편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남아 있다. 이 광장에 한 면이 70m 가량인 정사각형 토대가 마련되어 그 위에 건물이 서 있다. 토대는 지면에서 4∼5m 높이로 조성됐고 광장에서 정면과 양 옆, 그리고 뒷면 네 방향으로 둘러서 있다. 정면과 양 옆면에 이 토대로 오르는 널찍한 진흙 계단(10여 개의 층디딤판)이 놓여 있다.

    본 건물에 접근하려면 일단 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널판지로 만든 문짝 2개가 출입을 통제한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의 사립문처럼 엉성하지만 빗장을 달아 안쪽에서 잠그게 돼 있다. 건물 둘레에 넓은 테라스가 있는데, 그 가장자리에 꽤 높은 흙담장을 울타리처럼 쌓아놓았다. 테라스는 4면으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계단으로 오르더라도 본 건물의 어느 출입문에나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출입문은 광장에 면한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왼편 남쪽 날개의 모퉁이를 끼고 돌면 문이 하나 있고, 오른편 북쪽 날개에는 모두 네 군데에 문이 있다.

    북편 테라스 한가운데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눈앞에 쌍으로 된 출입문 2개가 나타나고 거기서 왼편 정면 동쪽 날개 쪽으로 맨 끝에 또 하나의 문이 있어 출입을 막는다. 여기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서쪽 날개의 회랑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출입문의 바로 위 이마부분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아담한 파사드(Facade)가 장식돼 있다.

    사원 내부는 크게 3개 공간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동쪽 정면 테라스의 반지하에 많은 기둥을 세워 만든 큰 홀로, 이곳은 남성들이 예배하는 공간이다. 둘째는 건물의 북쪽 오른편 비밀통로로 지붕 덮인 회랑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넓은 정원을 낀 공간이다. 셋째는 이 회랑 끝 서쪽 날개 안의 밀폐된 공간인데, 여기는 여성들의 예배장소다.

    동서남북이 각기 다른 형태

    대사원의 외형을 살펴보면 동쪽 정면과 남북쪽 양 측면 그리고 서쪽 뒷면의 구조가 각기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각 날개에 나 있는 출입문과 파사드 역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광장에 면한 정면 동쪽 날개는 한가운데에 밀합(Mirhab)이란 첨탑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밀합 탑은 양 옆에 탑신이 보다 좁고, 첨탑 높이가 약간 낮은 두 개의 탑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중앙의 세 탑신은 진흙 토담을 네모꼴로 쌓아올린 것이며, 이들 사이에 각각 5개의 원통형 흙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정면 날개의 양 모서리에는 이보다 훨씬 작고 낮은 네모꼴 탑신을 세워 남서쪽 양 날개를 잇는다. 이렇게 연결된 벽면의 외형은 요철(凹凸)의 조화를 이룬다. 즉 네모꼴 탑신들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원통형 기둥 벽들은 뒤로 물러선 형상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도곤족의 갖가지 가면들.

    원추형으로 가장 높다랗게 솟아오른 밀합 첨탑은 바로 옆에 비슷한 모양의 작은 첨탑 4기를 거느리고 있다. 이 4기의 첨탑도 2기씩 쌍을 이뤄 위치와 높낮이가 각각 다르다. 정면에 서 있는 모든 첨탑 꼭지에는 토기 항아리가 씌워져 있는데, 비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동쪽 정면 날개에 서 있는 모든 첨탑 위에는 십자가 모양의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남쪽과 북쪽 날개의 첨탑은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으며, 정면 동쪽 날개에 비하면 겸손하고 여성다운 모습이다. 신도들은 주로 북쪽 날개에 나 있는 출입문을 이용한다. 이는 북쪽 출입문이 쌍으로 되어 가장 편리하기 때문이다. 일단 북쪽 테라스에 오르면 곧바로 2개의 출입문이 보이며 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현관이 예배공간까지 이어진다.

    이들 출입문은 우람한 네모꼴 탑신과 마찬가지로 지면에서부터 쌓아올렸다. 두 문 위쪽으로 높다란 동굴형의 두 줄기 아케이드가 마련돼 있다. 또한 그 위쪽엔 왕관 모양을 한 덮개에 가로 5기와 세로 3기의 낮은 원추형 첨탑들을 꽂아두었다. 왼편으로 동쪽 정면 날개와 이어지는 모서리의 네모꼴 기둥 사이에는 4개의 원통형 흙기둥이 서 있으며 기둥 꼭지에는 각각 키 낮은 첨탑들이 서 있다. 쌍으로 된 두 출입문에서 왼편으로 가면 서쪽 날개로 이어지는 원통형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 끝에는 밀합 탑신과 같은 규모의 네모꼴 토담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 토담을 지나면 서쪽 날개로 통하는 출입문이 나온다. 그리고 이 문으로 들어가면 서쪽 회랑으로 연결된다.

    남쪽 날개의 외형은 북쪽 날개와 비슷하지만, 중앙에 큰 출입문이 없는 대신 작은 출입구가 네 군데나 있다. 그리고 뒷면 서쪽 날개에 서 있는 첨탑들은 다른 세 방향에서 보는 외형과 달리 조금 더 낮아 전반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외부에서 사원을 바라볼 때 유독 눈길을 모은 것은 벽의 군데군데에 두 줄로 크기가 일정치 않고, 불규칙하게 뚫어진 창들이다. 이는 내부 공간을 밝게 하는 자연조명 방법이다.

    이렇게 웅장한 대사원 앞의 광장에선 격주로 월요일에 장이 선다. 장터로 물건을 실어오는 짐수레, 노새가 끄는 달구지, 머리 위에 두툼한 보따리를 인 아낙네들. 이런 광경은 수천 년 전부터 수없이 되풀이돼온 젠네의 전통이자 미풍양속이다. 사원 광장 동쪽으로 구 모로코 술탄의 궁전에 이르는 상코레(Sankor) 거리가 있다. 이 거리에는 매일 영업하는 가게가 줄비하다. 그 중에는 자동차 수리소, 고깃간, 싸구려 식당도 있다. 상코레 거리 끝에는 모로코 술탄의 화려한 궁전이 남아 있다.

    흥망 거듭했던 젠네의 역사

    관련 문헌에 따르면 젠네는 니제르강과 지류인 반니강이 범람하여 형성된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다. 이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옥토에 농사를 짓는 한편 이 두 강의 수로를 이용해 인근도시 세구와 몹티를 거쳐 사하라 사막의 캐러밴과 연계되는 톰북투(Tombouctou)까지 물자를 거래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각광받았다.

    이러한 역사는 프랑스 탐험가 르네 카이에(Ren Caillie)가 1828년 이 지역을 답사하고, 또한 타리크 출신 현지인 작가 알 사디(al-Sadi)가 아랍어로 젠네의 역사를 기술한 책을 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알 사디의 기록에 의하면 젠네는 12세기부터 500여 년 동안 말리의 상업중심지로서 낙타대상이 남쪽에서 생산되는 황금과 곡물, 그리고 니제르강에서 잡은 생선(건어)을 젠네로 싣고 오면 수로로 몹티와 톰북투 쪽으로 반출했다고 한다.

    또한 젠네는 9세기경부터 13세기까지 가나제국이, 13세기부터는 말리제국이, 이어 15세기엔 송가이제국이 현재의 말리 전지역과 그 주변을 지배하면서 서부아프리카 역사상 대국의 흥망을 거듭한 원고장이기도 하다.

    당시 이 일대는 톰북투를 중심으로 황금과 소금의 교역이 활발했고 이슬람교와 학술의 십자로를 이뤘다. 이런 번영은 멀리 사하라 사막 너머 유럽까지 알려졌다. 그러나 16세기 말 모로코가 침입하여 기존 제국은 붕괴되고 약 1세기 동안 모로코 술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후 19세기 전반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기 이전까지 이 지역엔 군소왕국들이 난립했으며, 결국 군웅할거시대는 유럽인의 침입으로 막을 내렸다.

    젠네의 역사는 1970년대에 젠네제노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BC 1000년∼BC 200년경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많은 주거지 흔적과 석기, 토기, 철기, 곡물의 씨앗 등으로 미뤄 석기시대부터 세네갈의 세레르(S럕er)족과 우오로프(Wolof)족, 그리고 모리타니의 모르(More)족이 물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해왔고 농경 목축과 어로를 생업으로 하던 원주민과 더불어 쌀, 밀, 옥수수, 조 등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점차 보석 세공업이 발달하였는데, 유적지에서는 로마와 그리스 원산의 유리구슬이 발굴됐다고 한다. 이로 미뤄보면 그때부터 사하라 낙타대상들이 지중해 너머 유럽과 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번창하던 젠네제노는 근대로 접어들어 1400년경부터 주민들이 떠나면서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슬람이 전래되어 젠네가 신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인구가 그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자가 사헬지대에 해마다 거듭되는 가뭄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하는 농경 목축 주민들을 더 이상 지원할 수 없었던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필자는 젠네 문화의 뿌리가 인근 젠네제노 유적지라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펠족 여인들은 몸치장에 온갖 정성을 다한다.

    젠네에 머무는 동안 하루는 인근 몹티로 가서 유목민인 펠(Peul)족의 주거지를 찾았다. 펠족 여인들은 큼직한 귀고리와 목걸이, 팔찌 등 요란한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다. 우리는 7월31일 몹티로 향했다. 젠네와 몹티를 잇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건너왔던 반니강의 페리편으로 또 다시 건너는 수밖에 없다. 육중한 버스는 페리로 강을 건너고 몇 군데 검문소를 거쳐야 했다.

    몹티에서 보는 니제르강은 강폭이 호수처럼 넓었다. 특히 우기를 맞아 수량이 풍부하여 그야말로 사하라 대상과 남쪽의 교역을 중계하는 큰 항구를 방불케 했다. 선창가에는 크고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화물수송선도 있고 어선과 재래식 목선인 피로그 등도 눈에 띄었다.

    펠족은 일명 풀라니(Fulani)족이라고도 하며, 인구는 약 600만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소, 양 등 가축의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거주지역은 대서양 쪽의 세네갈로부터 말리, 니제르, 나이지리아를 거쳐 차드 호수에 이르기까지 사하라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널리 퍼져 있다. 유목민이라 원래 정착마을이 없지만, 오늘날에는 일정한 주거지를 두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만나려면 원래 니제르강을 건너야 하지만, 수소문 결과 몹티 시내 한 곳에도 펠족의 밀집지역이 있다고 하여 그곳을 찾았다.

    한낮의 날씨는 대단히 더웠다. 토담집 사이로 난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 어느 집 안뜰로 들어갔다. 펠족 남자들은 가축을 몰고 한번 집을 떠나면 2개월 동안 돌아오지 못한다. 여인들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들을 기쁘게 맞으려 몸치장에 온갖 정성을 다한다. 때문에 옛부터 펠족 여인의 장신구가 특히 발달한 것이다.

    펠족 여성들은 짧은 치마에 소매 없는 면저고리를 입는다. 헤어스타일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니제르 강변의 말리에 거주하는 펠족 여성은 닭벼슬처럼 머리 한가운데를 높다랗게 땋아 올린다. 그 모양이 마치 투구꼭지와 비슷하다. 더 남쪽지방으로 내려가면 머리 위쪽은 평평하게 하고 양쪽 귀 밑으로가느다란 머리다발을 여러 갈래로 주렁주렁 늘어뜨린다. 머리 위에는 진주, 호박, 유리구슬 등 보석을 가죽고리에 엮어 장식한다.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오늘날에는 각기 개성과 외모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한다.

    우리가 찾은 펠족 거주지의 여성들은 촬영에 응하려고 치장들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한쪽 귀에 큼직한 쇠고랑을 9개나 매단다. 쇠고랑의 직경이 무려 8cm나 돼 귓바퀴와 귓불을 감쌀 정도다. 또 어떤 여성은 황금색 방울로 된 여러 개의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머리에는 큼직한 바가지를 이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펠족의 조상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녀 모두 외모가 일반 흑인과는 판이하다. 이들은 원래 백인이었다가 아프리카대륙에 오래 거주하면서 현지 흑인계와 혼혈이 되었고, 열대지방의 생활환경 때문에 피부도 검게 변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부가 검다 해도 흑인계보다는 맑은 편이며, 후리후리한 몸매에 얇은 입술이며, 웨이브가 진 긴 머리카락 등 전체적으로 백인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다.

    구릉과 암벽으로 이뤄진 도곤 마을

    8월1일 일행은 젠네를 뒤로하고 도곤 마을로 향했다. 도곤 마을의 인구는 약 30만으로 말리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한다. 19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셀 그리올 교수와 그의 연구팀이 현지답사를 통해 도곤족의 실상 을 세상에 알렸다. 그 후 그들의 전통문화, 특히 장례식과 제례의식, 각종 축제, 그리고 추상성이 강한 조각과 마스크 등 예술작품이 유럽인들에 의해 높이 평가됐다.

    도곤 마을은 약 200km에 달하는 기암절벽의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다. 한 마을에 평균 3000명이 모여 사는 100여 개의 마을이 암반 구릉지대와 암벽 아래 비탈에 산재해 있다. 도곤족들은 암벽 밑의 비탈진 바위틈에 토담집을 짓고 산다. 목축과 농경이 생활수단이며 재배작물은 조, 옥수수 등이다.

    도곤 거주지역의 암벽은 지구상에 흔하지 않은 환경으로 특기할 만하다. 이 암벽은 니제르강 서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의 방카스(Bankas)로부터 남쪽의 두엔짜(Douentza)까지 뻗어 있다. 암벽의 최북단은 말리에서 가장 높은 홈보리산(해발 1115m)이다.

    연속되는 암벽은 마치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서 있다. 암벽에는 천연동굴이 군데군데 있는데, 원래 도곤족 이전에는 체구가 아주 작고 사람을 피해 나무 위에서 살았던 원주민 예반(Yeban)족이, 다음으로는 난쟁이 피그미와 비슷한 텔렘(Tellem)족이 이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도곤족은 타 부족과의 전투를 피해 14세기경 이 지역으로 이주, 텔렘족을 몰아내고 삶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외침이 있을 때마다 암벽 동굴에 숨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동굴은 지금 주거용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유해를 안장하는 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도곤 거주지역은 크게 3개 지대로 구분된다. 바위로 형성된 구릉지대, 높이 300∼600m의 암벽지대, 그리고 부르키나파소 접경의 특구지대가 그것이다. 암반 구릉지대는 불모지로 경작이 어려워 겨우 몇 개의 마을만 있을 뿐이다. 반면 암벽지대에는 가파르고 험한 절벽 밑 언저리의 바위틈에 토담집을 짓고, 약 4개월간의 우기 중 비가 내린 후 잠시나마 개울에 물이 고일 때 멀리 마을 앞의 모래밭을 일궈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부르키나 접경의 특구지대는 원래 유목민인 펠족의 거주지였으나, 도곤족이 대거 이주했으며, 이들 도곤족은 부르키나파소와 내륙 도곤 마을 사이에서 상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도곤족의 철저한 계급사회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암벽지대에서 살아온 도곤족은 수준 높은 예술 감각을 살린 각종 공예품을 제작하는 등 그들만의 고유문화를 지니게 됐다. 도곤족은 철저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다. 특권층은 성직자, 추장에 이어 대장장이, 금세공과 피혁을 다루는 장인, 사냥꾼 등이며 하층민은 농민이다. 또한 대가족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그 중 연장자가 추장이 된다. 한편 마을 단위로 호선하여 종교지도를 맡는 성직자 호곤(Hogon)을 뽑고, 마을의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 렐레(L?l?를 선정한다.

    마을 호곤 위에는 전지역을 총괄하는 최고의 호곤이 있다. 호곤의 의상과 행동은 도곤족의 창세신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들 종족 집단의 사회조직과 전통문화와 직접적 연관성을 갖춘, 격이 높은 추상성이 내포돼 있다고 한다. 도곤족의 창세신화는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편 이야기와 비슷하다. 태초에 창조신 암마(Amma)가 하늘나라에서 씨앗을 만들어 지상에 있는 두 개의 태반에 심었다. 그 결과 양성구유(兩性具有)의 8쌍둥이 신 놈모(Nommo)를 낳게 된다. 8쌍둥이 중에는 비를 내리게 하는 물의 신, 불을 지상으로 갖고 온 신, 대장장이 신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신 가이야, 천공의 신 우라노스,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신, 그리고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간세계에 갖다 준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들이 존재한다.

    도곤족 대대로 구전돼온 신화에 따르면 창조신 암마가 지상에 내려와서 점토로 사람을 빚어 생명을 부여했으며, 흑인들은 태양의 자손이라 피부색이 검고, 유럽인들은 달의 자손이기에 피부가 희다고 믿는다. 8쌍둥이 신 놈모 형제 가운데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로 인간에게 재앙을 갖다준 것과 같은 사악한 신 율그(창백한 여우 또는 쟈칼)도 있으며, 반신반수의 괴물신이 있듯이 이들의 신화에도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뱀인 신도 등장한다. 또한 3000년 전 밤하늘의 시리우스 성좌에서 귀인이 양떼를 몰고 도곤 마을로 내려왔다는 전설도 있다.

    이러한 신화와 전설을 근거로 도곤족은 장례식과 조상들에 대한 제례를 치를 때 여러 형태의 가면 춤을 추는 특유의 문화를 지니게 됐다. 또한 50∼60년 주기로 시귀이(Sigui) 축제를 갖는데 이는 시리우스 성좌에서 귀인이 내려온 것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야영 본거지로 삼았던 놈보리 마을에서는 1966년에 시귀이 굿을 벌였다고 하며 앞으로 30여 년 이후 다시 시귀이 축제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아바그룹과 마스크춤

    우리는 촬영을 목적으로 놈보리 마을 청년 40명을 동원, 제례의식을 재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이 춤판에 쓰고 나온 가면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시리게(Sirige)라 불리는 마스크는 높이 6∼7m나 되는 나무막대를 얇게 깎은 뒤 그 양면에 직사각형과 원형 등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붉은색과 흰색을 번갈아 칠해 계단식으로 장식했다. 춤을 출 때는 머리 위로 치솟아 올라간 가늘고 긴 막대를 360도로 회전시킨다. 시리게 마스크 춤은 창조신 암마가 무수한 별들이 회전하는 우주를 창조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고 또 시리우스 성좌에서 귀인이 내려올 때 시리게 마스크 모양의 긴 사다리를 타고 온 것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이 행사는 도곤족 사회에서 각 마을 단위로 성인식을 거친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바(Awa) 또는 아베(Ave)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전담한다. 이들 그룹은 마스크의 제작과 사용, 보관 등을 전담한다. 아바그룹을 비밀결사라 보는 것은 회원이 아닌 사람, 특히 어린이와 여성에게는 마스크의 제작, 사용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례 때 누가 어떤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춘다는 것까지도 비밀이라고 한다.

    아바그룹의 구성원은 그 마을의 청소년들이다. 일단 가입한 자는 백발이 되도록 조직원으로 남아 있다가 일정한 통과의례를 거쳐 장로계층으로 승격한다. 마을 소년들이 할례의식을 마치면 가입 자격이 부여된다. 가입 이후 2년간 선배들로부터 마스크의 제작과 관리능력을 익힌 다음 각자의 체질과 자질에 알맞은 마스크를 택하여 쓰고 춤을 추게 한다. 마스크 춤을 추려면 나이가 반드시 15세 이상이어야 한다. 아바그룹의 우두머리는 최고령자인 물로노(Mulono)이며, 물로노는 두 사람의 보좌 시지(Sigi)를 둔다. 두 사람의 시지 중 연장자가 그룹의 실제 지휘자가 된다. 그 다음 서열은 다른 한 사람의 젊은 시지고, 그 다음이 젊은 그룹원들 순서대로다.

    그룹의 우두머리와 고령자들은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한다. 우두머리 물로노는 아바그룹의 비밀 아지트에 은둔하여 3개월간 시지와 비밀언어를 익히고, 도곤의 신화와 마스크에 대한 금기사항 등을 배운 다음 장로계층이 선정하는 사범(Ma븊re de la Brousse)으로 승격하고, 아바그룹은 새 우두머리를 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대교체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는 전수됐고 오늘날까지도 도곤족의 전통이 이어져온 것이다.

    금기사항으로 여성과 아이들은 아바그룹에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지만, 점쟁이 여성 야시긴(Yasigine)만은 예외다. 야시긴은 장례식이나 제례 때 주인공(상주)인 안둠불루(Andoumboulou)가 쓸 마스크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접근을 허용한다.

    입체파에 도움준 도곤의 조각

    우리 일행에게 주민들이 선보인 놈보리 마을의 춤은 촬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 의식이 아니라 모든 제례의식을 총괄한 것이었다. 마을의 장례식과 조상의 제사 등 행사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마스크가 등장한다. 마스크는 동물 모양도 있고 형이상학적, 기하학적 무늬도 있다. 동물 모양 마스크는 하이에나, 치타, 크로커다일, 원숭이, 토끼, 영양, 가젤, 물소, 코끼리, 타조, 앵무새, 수탉, 암탉 등 각종 동물과 사람의 형상 등 수백 종에 달한다. 예컨대 원숭이 가면만 하더라도 흰 원숭이, 붉은 원숭이, 검은 원숭이 가면 등이 있으며, 사람 형상 가면도 처녀, 남성, 도둑, 대장장이, 사냥꾼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한자의 날 출(出)자처럼 생긴 카나가(Kanaga) 마스크는 높은 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창조신 암마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암마신은 원래 스스로 회전하면서 공간을 넓혀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날 출자 모양의 윗부분은 하늘을, 아랫부분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수준 높은 신화와 전설은 도곤족의 조각에도 주요 모티브가 됐다. 때문에 일찍이 유럽화가들, 특히 피카소 등 저명한 입체파 화가들은 도곤족이 만든 특이한 형태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입체파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놈보리 마을 학교의 아나사구 고이바(47) 교장과도 만났다. 그는 이 고장 출신이 아닌 듯 필자의 질문에 이 마을 출신 농부인 다니엘 긴도(46)에게 현지 말로 되물어 대답하곤 했다. 도곤족 청년들이 돈벌이가 좋은 외지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서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유를 묻자, “사실은 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외지로 돈을 벌러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향후 도곤족의 전통문화 보존을 걱정했다.

    주술사와 전통의 퇴색

    하루는 한나절을 할애하여 이웃 마을 티렐리(Tireli)와 코마카니(Komakani), 그리고 이델리 나(Ydeli Na)를 차례로 방문했다. 그 마을에서는 우연히도 호곤을 만났다.

    호곤은 마을의 성직자이며, 도곤족의 전통 종교지도자다. 우리가 만난 호곤은 이름이 아마 이케레(Ama Ikere)라고 하며 나이는 칠순이 넘어 보였다. 그는 주술로 점도 치고 병도 고친다고 했다. 필자는 호기심에 약간의 돈을 놓고 점을 보았다. 그는 호리병박과 조개껍데기 같은 여러 가지 주술도구를 흔들어 잠시 점괘를 보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객지에서 꽤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것이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당신 나라에서는 고명한 사람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이 귀국하기 전에 좋지 못한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필자는 속으로 픽 웃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은 귀로에 바마코에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 뉴스를 듣게 되었고, 일행 중 두 사람이 여권을 잃어버리고 6명이 항공권을 도난당하자 도곤 마을 호곤의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도곤 마을을 가다

    젠네 마을의 여인들이 곡물을 찧고 있다.

    우리는 그 마을에서 장로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는 토구나(Toguna)와 월경중인 여인을 감금하는 이색적인 집,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제당을 답사했다. 그러나 어느 마을이든 가톨릭 교회가 하나씩 세워져 있었고, 주민의 절반은 이슬람으로, 절반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 오래됐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의 전통종교가 점차 전설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지 않나 하는 기우를 떨칠 수 없었다.

    다음날에는 반디아가라에서 도곤 마을로 들어가는 남쪽 관문인 상가(Sanga)로 이동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바나니(Banani) 마을로 접근했다. 그곳에서는 50여m의 높은 절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폭포와 수없이 많은 천연동굴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목각과 가면 중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물건은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놈보리박물관이나 바나니에 신축중인 박물관의 소장품, 그리고 여러 목각 판매 가게를 둘러봐도 그러한 예술작품이나 골동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곤 마을을 답사한 소감은 솔직히 허탈했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도곤 문화재의 오리지널은 모두 유럽 등지로 유출돼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인류박물관, 국립자연사박물관, 국립아프리카-대양주미술박물관, 다페르박물관, 퀘 뒤 블랑리박물관 등에, 그리고 독일의 리트베르그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다.

    도곤족의 우수한 전통문화가 세계화의 거센 흐름에 밀려 현대문명과 외부의 자극에 견디지 못하고 그 순수성이 점차 퇴색되고 있다는 점도 우리 일행을 서운하게 했다. 나무로 만들던 가면은 점차 플라스틱 가면으로 바뀌고, 춤꾼들의 옷치장도 옛날의 밀짚이 아닌 인조섬유로 바뀌었다. 축제와 제례의식 때 추던 춤이 관광상품으로 전락해 아바그룹은 이제 일당을 받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척박한 땅, 메마른 환경에서 가뭄과 가난에 시달리던 도곤족의 엘리트들은 돈벌이를 위해 외지로 다 떠나버렸고, 고향마을과 전통문화를 지키는 일은 고령자와 무능한 사람들의 몫이 되어 있었다. 이런 도곤족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하기야 이것은 21세기 문턱에서 지구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곤 마을에서의 마지막 날인 8월4일, 반디아가라에서 북쪽으로 약 36km 떨어진 송고(Songho) 마을을 찾았다. 마을에 들어서자 의무적으로 유료안내원을 쓰게 했다.

    안내원이 이끄는 대로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가옥의 형태와 용도였다. 네모꼴 토담의 밀짚지붕은 보통의 살림집이고 고양이 가죽을 주렁주렁 매단 토담집은 곳간이다. 원추형 토담벽 여러 곳에 사람 형상을 부조(浮彫)로 새긴 집은 놀랍게도 월경중인 여인들을 감금하는 마을회관이라 했다.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독특한 모양의 토구나(장로들이 모여 마을의 일을 의논하는 장소) 등은 그간 놈보리에서 야영하며 둘러본 집들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을 뒤편에 있는 원추형 토담은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제당이다. 거기서 좀더 떨어진 외딴 곳에는 같은 모양의 토담집이 또 하나 있었는데, 안내원은 그곳이 창조신 암마를 모시는 가장 신성한 신전이라고 했다.

    할례에 얽힌 이야기

    마을의 골목길을 벗어나 뒷산 언덕으로 올라가자 높이 30m, 폭 40m에 이르는 큼직한 바위가 마치 현대 도시의 높다란 빌딩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암벽 곳곳에는 수백수천을 헤아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일행의 눈길을 끌었다. 송고 마을에 거주하는 말리크 야노게(41)씨는 이 벽화의 유래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 소수민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령계층제에 따라 도곤족도 어린이가 자라면 통과의례인 성인식을 거친다. 이곳은 성인식을 결행하는 장소로서 3년마다 인근마을의 12∼15세 소년들이 이곳에 모여 극기훈련과 할례시술을 받는다고 한다. 할례시술 열흘 전 해당 소년들을 소집하여 합숙훈련을 시작한다. 소년들은 성인이 되기 위한 체력과 인내심을 기르는데 10일간의 극기훈련이 끝나면 할례시술을 받게 된다.

    우선 의식을 주관하는 사제(렐레)가 큰 뱀을 잡아 바위 밑에 갖다 모신다. 도곤 사회에서는 뱀을 신성시한다. 아마도 신화에 얽힌 네이(Nay)라는 뱀일 것이다. 소년들은 사제의 구령에 따라 차례로 뱀에게 닭 한 마리씩을 제물로 바친다. 던져진 닭을 뱀이 삼키면 소년들의 할례시술이 시작된다. 이런 순서로 100여 명의 소년들이 한꺼번에 할례의식을 치른다.

    시술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암벽 옆에 있는 별도의 공간에 이들 예비성인을 한 달 동안 격리 수용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한 채 고된 훈련을 계속한다. 매일 아침수용소가 있는 바위산에서 내려가 약 500m 지점의 들판에 있는 바오밥 나무를 돌아서 다시 바위산으로 올라오는 왕복 1km의 구보를 반복한다. 구보훈련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경주시합을 벌인다. 경주에서 1∼3등을 한 입상자에게는 출신마을로 돌아가면 마음에 드는 처녀를 결혼상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또 한 가지 시합은 암벽 밑에서 돌팔매질을 하여 높이 30m 가량의 암벽 정상까지 던져올리는 것인데 성공할 경우 역시 경주에서 입상한 것과 같은 영예를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혹독한 과정을 거치면 명실공히 어른이 되어 결혼자격을 얻고 소질에 따라서는 비밀결사 아바그룹의 회원이 되는 등 출신마을 사회에서 어엿한 한 사람의 구성원이 된다. 이 어려운 성인식 과정을 무사히 마친 소년의 부모는 감사의 표시로 이곳 암벽을 찾아와서 기념으로 그들의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을 한 점씩 그린다. 도곤족 소녀들 역시 합숙장소와 방식이 다를 뿐 결혼 전에 반드시 할례시술과 성인식을 거쳐야 한다.

    음핵과 전갈

    아프리카 소수민족사회에서는 할례의식이 전통적으로 보편화돼 있다. 할례의식을 치르는 이유와 목적, 방식은 집단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 중 공통된 이유와 목적은 성인이 되기 위해, 결혼 준비를 위해,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청결을 위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도곤족의 할례의식에는 색다른 이유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남녀의 성별을 확실히 구분하기 위함이다. 이들의 신화 중 할례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

    8쌍둥이 놈모 신들은 모두 남녀 양성을 구유한 존재였다. 놈모 신의 후예인 인간은 그러므로 본래 양성의 영혼을 소유한다. 즉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상이한 두 성(性)에 상응하는 두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 여성적 영혼이 음경의 포피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성의 경우 남성적 영혼이 음핵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놈모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의 해결책을 강구했다. 인간은 이중적 존재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더 나은 성을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마침내 놈모는 남자에게 할례를 하여 음경 포피의 여성성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 표피는 뱀과 같은 동물로 변했다. 그것이 ‘네이’라는 동물이다. 네이는 죽은 자의 시신 덮개처럼 흑백으로 얼룩덜룩한 도마뱀의 일종으로 그 이름은 여성의 상징 숫자인 ‘4’ 와 여성의 실체인 ‘태양’을 의미한다.



    네이는 할례의 고통과 아울러 남성도 여성처럼 성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놈모는 첫 번째 인간 부부의 남성은 여성과 결합토록 했고, 얼마 후 여성은 도곤족의 조상이 되는 8명 중에서 두 아이를 출산했다. 이때 분만의 고통이 음핵에 집중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음핵을 절제하자 음핵은 여성의 몸에서 떨어져나가 전갈로 변했다. 전갈의 독침과 독주머니는 인간의 내장을 상징하고, 독은 고통의 물이자 피를 의미한다. 필자는 도곤족의 이런 특이한 할례 풍습과 전설에서 또 한번 수준 높은 그들의 전통문화를 평가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에서 필자는 도곤족의 전통문화를 좀더 폭 넓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뜻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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