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금강산·무산십이봉 품은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

  • 글:·박재광 parkjaekwang@yahoo.co.kr 사진: 정경택 기자

    입력2004-01-30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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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무 번의 ‘정치권 러브콜’을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노론의 일방적 전횡을 견제하며 소론을 주도했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고택. 조선 선비의 학문적 포부가 집안 곳곳에 스며 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소재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고택은 고건축 전문가들과 전통문화 연구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필수 답사 코스일 정도로 전통미를 잘 간직한 종가다.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 한해 평균 1만5000여명의 답사객이 이곳을 찾는다.

    윤증 고택에서 눈여겨볼 곳은 사랑채 앞에 놓인 석가산(石假山)이다. 사랑채에 앉아 정원을 둘러보면 40∼50cm 크기의 돌들로 조성된 ‘미니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바로 금강산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석가산이다. 화창한 날 사랑채 마루에 앉아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면 계룡산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선을 마당으로 내리면 금강산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사랑채 옆에는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 글씨가 걸려 있는데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 즉 ‘금강산 봉우리에 걸린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란 뜻이다.

    금강산·무산십이봉 품은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

    한때 요긴하게 쓰였던 각종 생활용품.

    금강산을 품은 윤증 고택은 중국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마저 품고 있다. 정원 화단에 12개의 수석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무산십이봉 모양 그대로 맞추어 배치해놓은 것이다. 비록 중국 무산십이봉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어도 사랑채에 앉아 작은 무산십이봉을 내려다보며 저 멀리 있는 중국을 꿈꾼 조선 사대부들. 그들의 ‘글로벌 마인드’와 선비로서의 포부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사람들이 윤증 고택에 주목하는 이유는 집 자체보다는 이 집을 통해 전해내려오는 조선의 선비정신 때문일 것이다. 명재가 남긴 가장 큰 선비정신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명재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벼슬을 수락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금강산·무산십이봉 품은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

    안채 뒤뜰의 장독대. 종가의 유명한 장맛은 종부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가 벼슬이 가져다줄 부귀(富貴) 앞에서 당당하게 ‘노(NO)’라고 말한 까닭은 벼슬을 하다 보면 잡사(雜事)에 시달리게 되고, 그러면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명재가 우의정 자리까지 거부하자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 ‘백의정승’이란 칭호를 선사했다.

    재야에 머무르면서 명재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은 교육이었다. 명재의 후진 교육은 ‘종학당(宗學堂)’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윤씨 일가에서 세운 일종의 문중 사립학교인 종학당은 지금의 중등·대학 과정을 모두 포함해 가르쳤다. 1618년 개교해 1910년 강제합병으로 인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조선시대 인재 등용문인 과거에서 모두 42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낸 종학당은 요즘말로 국가고시 합격자 양성소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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