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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으로 본 정치

17일짜리 국회의원 탄생…한국정치사의 ‘블랙 코미디’

  • 글: 정용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yongari@donga.com

17일짜리 국회의원 탄생…한국정치사의 ‘블랙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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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대 국회의 해산을 앞두고 17일짜리 초단기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민주당 비례대표 35번 안희옥씨가 그 주인공. 이 희대의 정치 코미디 배경에는 입각과 신당행, 보궐선거 출마 등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는 한국 정치판의 씁쓸한 구태가 깔려 있다.
17일짜리 국회의원 탄생…한국정치사의 ‘블랙 코미디’

2003년 11월7일 ‘열린우리당행’ 의원들을 대신해 비례대표직을 승계한 민주당 새내기 의원 5명이 의원선서를 하고 있다. 원내는 ‘초단기 국회의원’이 된 안희옥 의원.

‘17일짜리 국회의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민주당 안희옥(安熙玉·64) 의원. 비례대표 35번을 배정받았던 그는 16대 국회의원 임기가 거의 끝나가던 지난 5월12일 마침내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하게 됐다. 안 의원의 파란만장했던 4년간의 정치 경험은 본인 표현대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한국 정치사의 또 하나의 ‘블랙 코미디’다.

그보다 앞선 5월3일 오후 2시경. 외부 강연을 마치고 서울 여의도 ‘청소년 여가선용 지도협회’ 사무실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뉴스를 읽던 안 의원의 눈에 충주발 연합뉴스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민주당 비례대표 박종완 의원이 무소속으로 충주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탈당했다는 기사였다. 안 의원은 협회 부회장인 정성현씨를 불러 말했다. “이 기사 좀 봐라. 박종완 의원이 탈당했다. 정말 재미있다.”

정씨는 곧 수화기를 들었다. 예전에 양승부 의원이 무소속으로 17대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했다가 번복한 적이 있는 터라 박 의원의 탈당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 원내대표실의 당직자는 “모르겠는데요?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안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임혜자 당 부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임 부대변인도 금시초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임 부대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의원님, 축하합니다.”

‘짧은’ 금배지 달고 눈시울 붉어져



주요 일간지들은 ‘26일짜리 초단기 국회의원의 탄생’이라며 안 의원의 비례대표 승계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30여년의 행정경험을 가진 안 의원의 생각은 달랐다. “행정절차 때문에 26일짜리 의원도 될 수 없을걸? 민원서류 처리기간이 1~2주일은 걸리니까 더 짧아질거야.”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박 의원의 의원직사퇴서가 접수된 다음날인 5월4일, 비례대표 승계자가 중앙선관위에 통보됐다. 그러나 선관위 측은 “선관위 전체회의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아 서면으로 개별 회람을 거쳐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금쪽 같은 시간이 흘러 어느덧 5월12일. 국회사무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선관위로부터 ‘의석 승계자 결정 통지서’가 도착했으니 국회의원 신분증과 금배지를 찾아가라는 전갈이었다.

정성현씨가 국회에서 받아온 금배지를 달아주는 순간, 안 의원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2000년 1월 대통령비서실 여성정책비서관(1급)으로 있다가 “당에 가서 일하라”는 특명을 받고 정치판에 들어온 지 4년.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한꺼번에 회한이 밀려왔다.

안씨는 이날 기자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농담 섞어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직을 마음껏 누려라. 금배지를 양쪽에 두 개 달고 더블로 누려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시울은 불거졌다.

4년 전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여성위원장으로 발탁되어 정치판에 몸담게 된 안희옥 의원은 행정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지만 정치에는 그야말로 ‘유치원생 수준’이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로부터 “집권당으로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 선대위 여성위원장을 맡으라”는 언질을 받았지만, 여성계 영입파와 기존 당료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견제가 심해 결국 선대위 체제가 꾸려질 때 ‘순진하게도’ 여성위원장직을 다른 영입인사에게 양보했다.

“선대위 고위관계자가 ‘선대위 여성위원장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프다. 여성계 영입인사 H씨의 압력이 거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 여성위원장은 제가 하고 선대위 여성위원장은 H씨가 맡으면 되죠. 역할을 분담하면 더 큰 효과를 내지 않겠어요?’ 했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법이다. H씨는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배정 받았지만 안 의원은 35번으로 밀려났다. 평소 친분 있던 모 기자로부터 당시 실세인 K씨를 만나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지만 거절했다.

“처음에는 ‘당으로 보내놓고 이렇게 망신 줄 수 있느냐’며 분노했죠. 저를 당으로 보낸 청와대 고위관계자에게 항의했더니 ‘그럴 리 없다. 내가 아침에 명단을 봤을 때만 해도 훨씬 앞 번호였는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2년쯤 지나 정치권의 ‘서당개’가 되어 정치 메커니즘을 터득한 후에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성년자도 아니고, 나 스스로 일어났어야 했는데….”

입각과 분당…줄줄이 금배지 반납

비례대표 35번을 배정받은 후 주위로부터 ‘언제쯤 금배지를 달게 되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농담 삼아 “의원들이 다 죽어도 안될 걸”이라고 응수했다는 안 의원. 그러나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지난 1월, 마침내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듯했다.

2000년 9월 김한길 의원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김화중 의원 승계, 2000년 12월 서영훈 의원이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되면서 최명헌 의원 승계, 2001년 1월 한명숙 의원이 여성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박양수 의원 승계, 2001년 9월 유삼남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조배숙 의원 승계, 2003년 2월 김영진 의원이 농림부 장관, 김화중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오영식 구종태 의원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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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용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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