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헌정질서 위협하는 포퓰리즘 망령에서 벗어나라

보수가 진보에게 주는 苦言

  • 글: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헌법학

    입력2004-05-27 19: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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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정열이 없는 사람이며, 50~60대에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다. 젊은 학자나 정치인들은 6월항쟁의 민중승리에 도취하고 4·15 선거의 촛불시위 승리에 심취하여 직접민주제적인포퓰리즘을 선호하는 듯하다. 그것이 과연 국민의 뜻인가.
    헌정질서 위협하는 포퓰리즘 망령에서 벗어나라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자의 거리 유세에 환호하는 유권자들.

    4·15 총선은 한국의 정치지평을 변화시켰다. 젊은 정치인이 대거 당선되고 민주노동당이 국회 입성에 성공함으로써 이념과 정책의 다양성을 가지고 경쟁하게 됐다. 이는 노인세대의 퇴장이며 젊은 유권자의 승리다. 결과적으로 보수에서 진보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반드시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사실 이번 선거결과를 보고 헌법학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치 계몽에 소홀했다는 자성(自省)에서 이 글을 쓰게 됐다. 17대 총선은 노무현 정권 1년에 대한 평가와 함께 4년간 정부를 견제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여야 했음에도, 탄핵반대 세력에 의한 ‘탄핵 찬반투표’의 성격을 띰으로써 국민의 의사가 왜곡된 감이 없지 않다.

    탄핵 찬성이냐 반대냐는 이미 국회소추행위가 완료되어 헌법재판소의 심판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정치권이 선거로써 헌법재판관들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다면 그것은 헌정 파괴 행위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은 대의제 민주정치를 채택하고 있고, 국민은 선거인으로서 대표자의 선출기능을 가질 뿐이며, 대통령이 회부한 국민투표와 헌법개정안에 대한 투표만 가능한 데도,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정책을 결정하려 한다. 이는 포퓰리즘의 대표적 악례(惡例)라 아니할 수 없다.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국회의석 과반수인 152석을 얻어 거대여당이 된 것은 소선거구제의 병폐를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 지지는 40%에도 못미쳤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3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이보다 10% 정도 높다. 만약 완전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면 야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얻었을 것이다. 이를 놓고 보아도 이번 선거결과는 탄핵에 대한 국민의 불신임이 아니라, 탄핵소추에 대한 신임이 유권자의 뜻이었다고 해석해야 옳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결정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정치적 투표행위가 헌법재판소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

    4·15 총선결과 국회의원 당선자의 성향이 진보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12%의 지지를 얻어 10석을 얻었고, 열린우리당에서도 진보성향 인사가 다수 당선됐다. 한나라당 당선자 중에도 진보성향의 의원이 많아졌으며 전반적으로 학생운동권 출신이 다수 당선됐다. 이같은 결과가 과연 유권자의 진정한 의도였는지 궁금하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자칭 ‘잡탕’ 정당이라 할 만큼 보수성향에서 진보성향까지 다수를 포섭하고 있어 정당색깔이 명확하지 않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봉합하기 위해 일단 실용주의를 앞세웠지만 이들이 국회 의정활동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원조보수를 주장하는 다선의원을 제외하면 초선의원 상당수가 진보성향을 보이고 있고 전반적으로 중도보수이면서 중심축이 좌축으로 옮겨졌다. 한나라당도 이념면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으로, 16대국회에서와 같이 초선의원들의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보수와 진보만 존재하나

    아직도 언론기관이 국회의원의 성향을 보수, 진보로 이분하는 것도 문제다. 정당의 색깔은 반동, 보수, 자유, 급진으로 나누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과거에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으로만 나누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정당은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고 회고주의적인 반면, 진보정당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것을 성취하려 한다. 그래서 보수정당을 새로운 국정질서와 사회질서에 대한 미래계획이 없는 ‘현실주의 정당’이라 한다면, 진보정당은 장래에 대한 계획을 가진 ‘이상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보수-진보의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정치학자 로렌스 로웰은 현실만족적 집단과 현실불만족 집단, 장래의 개선을 믿는 집단,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프리드리히는 인간집단을 4가지로 분류했다. 현상태에 불만을 표명하고 개선의 가능성을 확실히 믿는 급진주의자(Radicals), 현실에 만족하고 장래 개혁을 믿는 자유주의자(Liberals), 현실에 만족하고 현상태의 개선에 희망을 갖지 않는 보수주의자(Conserva tives), 현상태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개선에 대한 희망도 갖지 않는 반동주의자(Reactionaries)가 그것이다. 이에 따라 정당도 보수당, 자유당, 급진당, 반동당으로 나뉜다(김철수 ‘헌법질서론’, 1963, 45쪽).

    이 도식에 따르면 정당은 극우적인 반동주의당, 중도우파적인 보수당, 중도좌파적인 자유주의당, 극좌파적인 급진당으로 나눌 수 있다. 4·15 총선에 참여한 20개 정당을 이에 따라 분류하면 공화당은 반동주의당, 기독교당은 보수당, 민주노동당은 급진정당이다. 그 이외의 정당들은 자유주의당 또는 진보정당이라고 하겠다.

    또 정당은 ‘세계관 정당’과 ‘기획 정당’으로 나눌 수 있다. 세계관 정당은 특정한 세계관, 종교 등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정당이다. 좁은 의미의 세계관 정당으로는 공산당과 나치스당을 들 수 있다. 또 종교적 정당으로는 아랍이나 독일의 이슬람정당, 구교정당, 신교정당, 불교정당 등이 있다.

    정당은 정책과 정강을 제시하여 국민에게 정책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거준비 조직이다. 유럽의 정당들이 대개 세계관적 정당으로 이념과 정책을 명확히 하여 국민의 선택에 기준을 마련해주는 데 반해, 우리나라 정당은 정강 정책에서 좋은 것만 서로 베껴 내놓는 ‘잡탕’ 정당이 되어버려 국민에게 정책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집권 후 선거공약은 지켜지지 않으며 일부 국민의 의사에 따라 수시로 정책이 바뀐다. 게다가 선거 때마다 과거 행적에 대한 비판이 두려워 새로운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를 좇아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는 점에서 후진적 정당이라 할 수밖에 없다.

    장래에 이들 정당은 이념과 정책에 따라 보수당, 자유당, 진보당, 급진당으로 재편돼야 한다. 정책과 이념에 따라 정치인의 이합집산이 행해진다면 열린우리당의 일부와 민주노동당의 통합 가능성도 있다.

    정당의 성향에 따라 국정의 향방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안정이냐 불안정이냐, 진보냐 비진보냐는 어느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급진주의자나 반동주의자보다 많을 경우 정국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며, 반대로 급진주의자와 반동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하면 정국은 불안정하게 된다. 또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가 많으면 진보적 성향으로 나아갈 것이요, 보수주의자와 반동주의자가 많아지면 비진보적이 될 것이다.

    6월부터 활동에 들어갈 17대 국회는 벌써부터 국회운영 및 방향설정여부와 관련해 미숙이 점쳐지고 있다. 각 정당이 내놓은 공약이 반동에서 급진까지 너무나 다양한 데다 급진반동세력이 다수를 차지한다면 정국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국회가 열리기도 전에 열린우리당 내에서 노선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한나라당에서도 초선의원과 다선의원 사이에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어 지도체제 정비부터 불안한 모습이다. 새천년민주당은 9석의 군소정당으로 급전직하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을지 그 존립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또 민주노동당은 그들이 표방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일 것이며 당과 민주노총이 장외투쟁을 자제할 것인가도 예측하기 어렵다.

    17대 국회는 역사에서 배워라

    젊은 사람은 책과 이성에서 배워 급진적 개혁을 원할 것이고, 늙은 사람은 역사와 경험을 중시하여 건전보수를 원할 것이다. 20~3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정열이 없는 사람이며 50~60대에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 학자나 정치인은 6·8항쟁의 민중승리에 도취하고 4·15 선거의 촛불시위 승리에 심취하여 직접민주제적인 포퓰리즘을 선호하는 듯하다.

    늙은 사람들은 이러한 포퓰리즘이 중국의 홍위병 운동을 낳았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역사를 파괴하고 경제를 30년간 낙후시켰다는 것을 기억한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필리핀의 포퓰리즘이 그 나라를 경제 후진국으로 만들었으며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이상사회를 꿈꾸던 러시아와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정권이 궁핍에서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 백기를 들었으며,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의 지도 아래 유럽공동체에 가입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이념적으로는 매력적이나 실제로는 빈곤의 평등밖에 가져오지 못한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주권을 가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태업으로 급기야 멸망했으며 전인민의 국가인 공산주의 국가에도 개인숭배사상이 존재해 수천 개의 독재자 기념동상과 독재자가 모은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고나 북한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민족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경향이 있다. 중견 정치인까지 미국에 가보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통일을 하자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6·25전쟁 전에는 남북한 모두 가난했으나 불만 없이 살았기에 그 시대의 농경공동사회로 회귀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세계화시대에 개방을 반대하고 고립을 자초한 대원군 정치가 나라의 패망을 가져왔고, 이승만 정부의 완고한 고립정책은 국민에게 가난만 안겨주었다. 또 이번 북한 용천 사건에서 볼 수 있었듯 북한은 아직도 1950년대의 비참한 경제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어떤 형식이든 자주통일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통일비용을 부담하고 북한주민과 같은 수준에서 살라고 해도 과연 그러겠다고 할까.

    과거 전국학생총연맹(전학련) 학생간부들은 북한에 가서 인권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북한은 이미 이상사회가 실현됐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다고 우겼다. 그런데 그들이 북한의 실상을 얼마나 알고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200만명의 특수층이 살고 있는 평양에서도 전력사정이 나빠 최고급 호텔마저 정전이 잦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모든 탓을 미국에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과 국제사회가 지원한 돈과 물자, 식량을 인민을 위해 썼다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빈곤상태는 벗어났어야 한다. 그 돈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만 일삼고 있는 북한정권은 결코 동족이 아니다. 북한동포의 인권을 짓밟고 수용소를 양산하면서 어린아이까지 굶주리게 하는 정권 담당자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 하루빨리 북한주민의 생활이 향상돼야 안심하고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17대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평준화 세대다. 이들은 교육의 평준화를 절대선으로 여기며 과거 명문고교나 대학을 부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도 엘리트는 존재한다. 모스크바대 졸업생이 구소련을 지배했고, 베이징대와 칭화대 졸업생들이 현대 중국을 이끌고 있으며 김일성대 졸업생이 북한사회의 지도층을 이룬다. 노동자, 농민, 병사의 월급이 교수나 의사의 월급보다 많았던 동유럽이 결국 몰락하게 된 데에는 대학 진학자가 없었다는 것도 한 원인이었다. 평등은 무조건적인 평등이 아니라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게 하는 평등이어야 한다.

    해서는 안될 국민소환제

    17대 국회의원들이 입헌주의에 반하는 선거공약을 내건 것은 자승자박이다. 첫째, 헌법의 대표제 민주정치를 부정하고 인민주권적 국민참여제를 강조한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국회의원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4년간 책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한 뒤 당선됐음에도 언제든지 국민의 소환에 응하겠다고 한다. 종신제를 채택하고 있는 판사직에 대해서는 국민소환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경우 정부나 선거민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임기제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독립성과 신분 보장을 위해 형(刑)의 선고나 국회에서의 제명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면직할 수 없도록 법으로 보장한다. 공천하여 당선시켜준 정당에서도 국회의원을 면직시킬 수 없으며 정당에서 제명하더라도 국회의원직은 상실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국회의원소환제를 주장하는 당선자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이나, 선거공약이란 이유로 위헌적인 국회의원소환제를 도입해서는 안된다. 국회의원소환운동은 이승만 정부 시절 야당의원 압살정책으로 이용된 나쁜 선례가 있다. 국회의원소환제를 도입할 경우, 대립낙선자에 의해 계속적인 소환운동이 벌어져 선거운동의 ‘항상화(恒常化)’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헌법과 법률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권력분립주의에 따라 헌재와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며 위헌 선언된 법률은 즉각 개폐해야 한다. 법의 제정자인 국회의원은 헌법과 법률의 수호자가 돼야 하며, 헌법이 부여한 행정부 견제권을 최대한 행사하여 법치행정을 정착시켜야 한다. 국회의원은 헌법과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토지공개념, 부채탕감은 달콤한 毒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성 공약이 난무하지만 정당은 헌법을 위반하는 공약을 추진해선 안된다. 개인소유권의 대폭제한, 토지공개념 도입, 국유화 혹은 사유화 주장, 부채탕감 공약 등이 좋은 예다. 우리 헌법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제19조 2항)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예외규정일 뿐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에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과거 토지공개념 법률이 위헌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은 1950년대에는 필요했으나 농민 소유 토지의 매매를 제한함으로써 농지가격이 폭락해서 농민을 오히려 빈민으로 만들었다. 1950년대만 해도 논 한 마지기 팔면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9000평 농지를 다 처분해도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없을 만큼 농민들에게 불평등을 초래했다. 농지와 산지에 대한 규제도 대폭 해제하여 농민에 거주이전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젊은 정치인들은 우리나라의 수출입량이 세계 10위권에 든다고 해서 경제대국인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순이익은 초라하며, 우리나라 전체의 국부(國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몇십분의 1도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민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웰빙지수’는 중진국 수진이며, 국민소득은 10년 동안 1만달러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반(反)기업적 경제정책으로는 현 정권하에서 도저히 2만달러 소득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재정팽창을 통해 복지를 향상하려는 정책도 재고돼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재정적자로 많은 이자를 물고 있으며 엄청난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재정의 건전화가 문제가 됐다. 삼성전자 주식의 60% 이상을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자본은 극히 빈약한 형편이다. 일부 불로소득자에게 세금을 강력히 징수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기업과 부자를 적대시하는 계급투쟁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외국기업의 국내 유치뿐만 아니라 한국기업의 국외유출을 막아 실업률을 낮추고 국민생활의 향상을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은 그동안의 고압축성장과 복지정책의 미완성으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진보정당을 자처한 새천년민주당의 집권시대에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계급투쟁과 사회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높다.

    여기서 빈익빈현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혹시 그동안의 정책이 사회주의적 빈곤의 평등화를 추구한 결과가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의 희망은 ‘하면 된다’는 것이었고, ‘노력하면 부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재벌이 되고, 대통령이 된 기회의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젊은이들은 이런 대한민국의 꿈 속에서 살아왔는데 근자에 와서 청년실업으로 그 꿈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

    서울 강남의 부잣집 자녀들이 고액과외를 통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부모의 재산과 신분을 세습하여 계급이 고착되는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라도 중·고교의 평준화정책을 시정해야 한다. 가난하지만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서 대한민국의 꿈을 성취하게 해야 한다.

    또 관존민비 사상을 타파하고, 고급공무원이나 대기업 노조원의 고임금을 조정하여 비노조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특히 3D직종 종사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 또 중·고교 졸업의 기능공을 우대하여 대학진학률을 낮춰야 한다. 노임 격차가 커지면 노동자간의 계급대립을 유발할 수도 있다.

    조직폭력배나 범법자는 엄벌하고 불법행위로 치부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정치인의 뇌물수수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한 경제제도도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출세나 치부를 못하게 하고, 법 경시사상을 뿌리뽑으며 대중노선에 의한 폭력지배도 막아야 한다. 고관세 정책을 통해 고급사치생활자나 명품사용자를 줄여 사회적 위화감도 억제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아파트가격 자율화나 고급화 역시 재고돼야 한다.

    실리 없는 反美

    외교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한다. 젊은 국회의원 중에는 반미(反美)와 친(親)중국을 주장하는 이도 많다고 한다. 최근 중국에 대한 수출입 비중이 미국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일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으며 유럽연합은 너무 멀어 관심이 적은 듯하다. 외교의 실리 면에서 미국을 멀리하고 중국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대통령조차 미국과 북한이 다투면 중재역할을 할 것이라며,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소홀히 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은 베이징 6차회담에서 북한의 통역역할만 해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동맹국으로서 신의를 의심받고 있다. 젊은 정치인들의 자주외교, 자주통일 주장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가부터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에서는 북한의 몰락을 기다려 조기통일을 노렸으나 1988년 6공화국에서부터 평화공존정책을 주장해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통일방식에 대해 “우리는 독일식 통일을 원치 않으며 남북한간 국가연합을 하여 개성을 통일수도로 하며, 몇십 년 후 통일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이나 중국이 바라는 통일정책이다. 북한은 연방제를 말하나 실질적으로는 국가연합을 주장해왔으며 김정일체제의 세습을 원하면서도 한국의 경제원조에 기대 경제개발을 노리고 있다. 중국도 완충지역인 북한이 한국과 통일하여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는 것을 우려해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정권의 타도를 포기하고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노태우 정권 이래 일관된 정책이다. 그 결과 소련의 붕괴로 독일이 통일된 예를 따르지 못하고 남북대결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이익이나 일본의 이익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중국, 러시아, 일본 어느 국가도 한국의 조속한 통일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조국의 통일을 수수방관할 것인가. 우리는 북한 내부에서 정변이 일어나면 통일의 기회를 신속히 낚아채야 한다.

    독일통일 전야 콜 수상이 잠정적인 국가연합안을 제안한 적이 있는데 만약 그것이 동독 국민에 의해 수락됐다면 독일은 아직도 두 개의 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통일의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헌정질서 위협하는 포퓰리즘 망령에서 벗어나라

    미국을 멀리하고 중국을 가까이하는 것이 외교적으로 과연 옳은 일인가. 반미를 외치면서 자주국방·자주통일이 가능한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통일과 관련하여 북핵문제가 논의된다. 젊은 사람 중에는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하면 통일 후 그것이 우리 것이 되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위(自衛)’능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일본의 핵개발을 촉진할 것이며, 한국이 북한에 동조할 기미가 있으면 일본이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경우 중국의 핵 억제력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오늘날 상황은 전쟁억지와 평화유지가 자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제 영세중립국가는 희귀하고 동유럽의 나라들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 상태다. 북한도 중국 러시아와 상호방위조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하고 나선다면 향후 미군이 철수할 경우 어떻게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1949년 국회결의에 따라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1950년 북한이 남침했고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불평등조약임에도 한미 대전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합동침공에 대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우리나라가 중립화통일을 원하는 경우에도 주변국가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물며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하려면 중국과 미국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다같이 우방이 돼야 한다.

    국회와 정부는 대북 접촉을 하고 원조를 하는 경우 반드시 북한주민의 인권신장을 조건으로 달아야 한다. 중국이 오늘날 발전한 것은 천안문 저항을 무력 진압했기 때문이다. 북한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된 것은 정치범 수용소나 배급중지, 거주이전의 자유제한, 종교금지 제도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인권 문제에 개입하면 내정간섭이 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북한 노동당은 여전히 적화통일을 지향하는 강령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선거 때마다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지시하고 있는데 우리만 북한동포를 방관해서는 안된다.

    또한 진보정당은 그 강령과 정책이 사회주의라고 하는데 그것이 북한노동당의 강령 정책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다 명확히 해야 하며, 북한노동당의 통일정책에 뇌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정한 사회민주주의를 향해

    이 글을 읽는 진보정치인들은 필자를 반동·보수라고 매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1950년대 독일에서 정당정치를 배웠고, 독일의 사회민주당 인사들과 만나 사회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토론했다. 서독 사회민주당이나 기독교민주당의 전당대회에 참석해 토론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만약 내가 학계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진보정당원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군정하에서는 교수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지만 진보주의적 저술이나 논문 발표를 주저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에 이미 나는 사회민주주의에 입각한 헌법 교과서를 저술했고 1970년대 이후에도 경제제도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계속 주장했다. 특히 생존권적 기본권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론적으로 나는 아직도 이상주의자며 독일식 사회민주주의자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동독과 구소련,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 경험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짓밟히고 자유와 평등이 말살되는 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레닌의 전투적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 이상형이 아니다. 다원적 가치를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일삼으며 민중노선에 따른 폭력혁명을 기도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볼셰비즘, 급진주의일 뿐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59년 11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강령에서 탈피해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했다. 플라톤의 인도주의, 공동체주의에 근거하고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복지를 이념으로 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얻어 법률로 사회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이 정책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집권에 성공했다. 경제정책에서도 ‘최대한의 자유, 필요최소한 계획 규제’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인 것이다.



    평등만이 민주주의 이념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 복지도 민주정치의 이념이며 이것이 조화된 사회가 진정한 사회민주주의다. 진보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뿐 아니라 다른 당의 이념 가치도 중요하다고 보는 가치상대주의에 입각해야 한다. 국회에서 독선적인 독주체제나 가치절대주의에 따른 폭력정치는 사라지고 타협정치, 상생정치가 행해져야 한다. 여야 정당의 간부들이 합의한 상생정치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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