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는 ‘노무현 2기’ 경제정책

질적 성장이 유일한 대안… 그러나 노조가 문제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05-31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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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유가와 중국 쇼크, 미국 금리 등 3대 악재 속에 노무현 정부 2기가 출범한다. 내수는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고 기업들은 투자할 맛이 안 난다며 불평인데 여당과 정부에선 경제정책의 방향을 놓고 서로 ‘딴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외국인 투자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노무현 정부 2기 출범을 바라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기대와 우려.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는 ‘노무현 2기’ 경제정책

    외국인 투자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정치적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 6개월 뒤인 지난해 9월. 미국계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 한국지사는 ‘독선이냐 실용이냐? - 한국경제의 선택(Dogmatic or Pragmatic? - Key for Valuation Multipl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모건스탠리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정부가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일자리 창출에 중점을 두는 실용적 정책(Pragmatic)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한국 시장의 가치는 몇 배로 뛰겠지만 나름의 원리원칙(Dogmatic)만을 고수할 경우 시장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당시 이 보고서는 ‘친(親)노조’냐 ‘친(親)기업’이냐, ‘분배’냐 ‘성장’이냐를 놓고 정부 내에서조차 논란을 거듭하고 있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외국인들의 시각을 깔끔하게 정리해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제1당을 차지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국면에서 벗어나 업무에 복귀하는 등 정치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노무현 정부 2기의 경제정책이 또다시 논란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논쟁의 양상은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물론 국회내 여당의 수적 열세로 인해 ‘의욕’만 갖고 있었던 당시에 비해 노무현 정부 2기에는 여당 의석이 국회 과반수를 넘김에 따라 ‘실현 가능성’까지 함께 갖추었다는 것은 달라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한 의구심



    대통령 탄핵 결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이틀 앞둔 지난 12일, 당시 모건스탠리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였던 리서치센터 박천웅 상무에게 노무현 정부 2기의 경제정책 전망에 대해 물어보았다. 박 상무는 얼마전 총선 이후 외국계 증권사로는 처음으로 민주노동당을 방문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치지형 아래서 노무현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펴나갈지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구심은 여전합니다. 하루빨리 일관되고 가시적인 정책 방향이 나와야 합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정지 중에 실시된 4·15 총선 이후 정부 경제정책의 방향전환을 암시하는 언급은 외국인 투자자가 아닌 정부 내부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정부내 관료그룹을 대표할 뿐 아니라 대표적인 대외개방론자로 분류되는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하고 민노당이 원내진출을 했다고 해서 정부 정책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선을 긋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왼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한 실장의 ‘직설화법’은 이내 정부 내에서도 눈총을 받았다. 며칠 뒤 국정홍보처가 직접 나서서 각 장관들에게 “참여정부의 정책을 설명할 때 ‘좌파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일단 열린우리당이 논란 끝에 ‘실용적 개혁노선’으로 당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청와대가 경영 마인드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강조해온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국무총리로 사실상 내정하면서 노무현 정부 2기의 경제운용 전략은 1기 때와 큰 변함 없는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동영 의장이 영입해 총선 당시 민생경제특별본부장을 맡았던 정덕구 비례대표 당선자(전 산업자원부 장관) 같은 경우는 장관 재직 당시 ‘외국인투자 옴부즈만사무소’라는 이름의 주한 외국기업인 애로사항 접수창구를 처음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게다가 정 의장과 정세균 당시 정책위 의장, 정덕구 당선자 등은 총선 직전 이 사무소 관계자들을 만나 ‘외국인 투자여건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약속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내각 경제팀을 봐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청와대에서는 관료 출신의 박봉흠 정책실장과 권오규 정책수석이 여전히 경제 현안을 챙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근무 경험을 가진 조윤제 경제보좌관 역시 외국인 투자가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정책 조언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헌재’에 대한 시장의 신뢰

    내각에서는 이헌재 부총리를 비롯해 이희범 산자부 장관, 강동석 건교부 장관, 김병일 기획예산처 장관, 장승우 해양수산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이 모두 안정 성향의 관료 출신들로 짜여져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정’ 성향의 경제 라인업에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이헌재 부총리는 지난 4월말 홍콩 런던 뉴욕을 돌며 개최한 한국경제설명회에서 일관되게 ‘열린우리당의 정책노선은 중도개혁 성향으로 정부의 개혁정책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에 화답하듯 모건스탠리 박천웅 상무는 “이헌재 부총리는 외국인들에게 시장친화적 정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따라서 향후 개각에서 현 경제팀이 교체된다면 시장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나라당과 재계에서 노무현 정부 2기의 경제정책 운용이 분배와 사회복지 정책 위주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은 일단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한 외국기업인들의 애로사항 접수창구인 외국인투자 옴부즈만사무소 김완순 소장은 “아직 어떤 판단을 내리기는 이르다”고 전제하면서도 “총선 이후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총선 이전에는 ‘열린우리당의 노선이 약간 왼쪽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는데 당 지도부가 실용주의 노선을 들고 나오면서 이같은 우려가 불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불안한 노사관계 때문이다. 2기를 맞은 노무현 정부가 개혁정책을 표방하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노조의 경영참가 범위 확대 등의 조치를 잇따라 추진할 경우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덧붙여 열린우리당내 소장그룹이 민주노동당과 연대해 친노조적인 법안을 밀어붙일 가능성도 함께 제기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가능성의 현실화 여부는 반반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시절 노동특보를 맡았던 이목희 열린우리당 당선자를 통해 참여정부 2기의 노동정책 진로를 점쳐보았다. 청와대 노동개혁 태스크포스에도 참여한 바 있는 이 당선자는 의욕에 넘쳐 있었다.

    “노무현 정부 2기는 IMF 당시보다도 노사관계 개혁을 추진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노사관계 개혁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 과제이다.”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

    이목희 당선자는 노사문제 개혁의 최우선 순위를 비정규직 차별 철폐에 둘 것임을 분명히 했다. 현재 75% 수준인 공공부문 정규직 비율을 오는 2006년까지 95% 수준으로 높이고 이를 민간부문에도 권고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경우 노동시장이 더욱 경직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메릴린치증권 이원기 전무는 “비정규직은 해고가 불가능한, 경직된 노동시장이 만들어낸 산물인 만큼 비정규직 문제 자체만으로 풀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임으로써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번 총선을 통해 원내에 처음 진출한 민노당의 노동관련 공약과 열린우리당의 노동정책 사이에는 또 다른 커다란 간격이 있다. 17대 국회 개원 후 입법과정에 들어가면 부딪히게 될 사안도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산별교섭체제 도입여부를 놓고 열린우리당은 ‘기업별이냐 산업별이냐의 문제는 노사 자율에 맡길 사항이지 정부가 강제할 사항은 아니다’는 입장이고 민노당은 ‘산업별 사용자단체를 단체교섭 당사자로 인정해 산별교섭체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복수노조 허용여부 역시 열린우리당은 ‘복수노조 허용을 앞당기려면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중단조치도 함께 앞당겨야 형평성이 맞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노사정 합의 당시 사용자가 한발 양보해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시점을 2007년 이후로 미루는 대신 복수노조 허용시기 역시 함께 미루기로 한 만큼 복수노조 허용시기만을 앞당기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논리이다. 이에 반해 민노당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여부는 노사 자율에 맡겨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복수노조 설립을 즉각 허용한 뒤 교섭주체 문제는 노사간 또는 노노(勞勞)간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물론 민노당이 열린우리당을 사사건건 공격하고 나오는 데 비해, 열린우리당은 일단 민노당에 대한 직접 공격을 자제하고 있다. 이목희 당선자도 “이수호 위원장 체제 출범 이후 민주노총에서 ‘총파업’ 구호가 사라진 것에 주목하라. 민노당 역시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해 민노당에 대한 시장의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노동정책을 놓고 구체적으로 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 역시 대부분 “민노당 변수보다는 열린우리당이 노사관련 현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노조 경영참여는 ‘뜨거운 감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는 또 다른 ‘핫 이슈’는 바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문제. 현행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은 노사협의회체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주요 경영사안에 대해 노사간 ‘협의’ 수준을 뛰어넘는 노조의 경영참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방침이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등은 ‘노사협의’ 규정을 ‘노사합의’ 규정 등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고 열린우리당 역시 협의의 범위를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주한 외국기업 관계자들이 문제삼고 있는, 경영에 대한 노조의 과도한 개입이 대부분 인사위원회 노사 동수 참여 보장, 징계위원회 의결시 노조 참여와 같은 ‘인사’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노조의 경영참여 방식은 재무제표 및 경영실적 공개와 같은 초보적인 단계부터 신규투자나 설비이전 결정과정에서의 노사합의와 같은 경영상 판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해외 본사에 비해 노사분쟁이 빈발하는 한국 현실 탓에 외국기업 임원들은 당장 인사 및 징계위원회 운영과 관련해서 국내 노조와 부딪히는 경우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현재 열린우리당 내에는 인사 및 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구성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우세한 실정이다. 노사 동수로 구성하게 되면 사실상 경영상 판단에 따라 노조원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 반면 민노당은 근참법상의 ‘협의’ 조항을 ‘합의’ 조항으로 바꾸고 노동자 이사제와 노동자 감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사정위원회를 없애고 실질적인 노·사·정 합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직종 전환이나 사업장 전환배치 등과 관련한 노조의 과도한 요구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직장폐쇄와 한국철수설로 이어지기까지 했던 한국네슬레 사태 역시 발단은 영업부 직원의 전환배치였다. 한국네슬레측이 외주업체와 판매대행 계약을 하고 기존 영업부 직원 44명을 신규부서로 전환배치하자 노조가 ‘구조조정시 노조와의 사전협의’조항을 들고 나오면서 장기 파업사태의 불을 붙인 것. 이에 대해 한국네슬레측은 경영권 간섭이라며 직장폐쇄로 맞서는 등 노조의 경영참가 부분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한국네슬레 사태에서 보듯 노조의 경영참가 수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는 한국에서 신규사업에 나서는 외국기업들에게는 투자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외국인투자 옴부즈만사무소 김완순 소장은 “특히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외국기업 관계자들은 노조전임자 문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실제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한국오웬스코닝 노사분규 당시에는 근로자 30~40명의 기업에서 노조전임자 3명을 두겠다고 해서 극심한 노사갈등을 빚기도 했었다는 것.

    경영 실패의 책임은?

    일본계 다이와증권 이창희 이사는 “자본주의의 룰을 벗어나는 수준의 노조 경영참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노조의 참여로 인해 경영성과가 좋다면 모를까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경우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결국 경영진의 책임 아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런 인식은 외국계 투자자들이 노조의 경영참가 요구에 대해 특히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를 잘 나타내준다.

    노무현 정부 2기 출범을 바라보는 미국 월가의 시선은 어떨까. 굿모닝신한증권 뉴욕현지법인 세일즈 담당인 리처드 정은 “월가 투자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초기 ‘친노조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던 만큼 이에 따른 학습효과로 인해 2기 정부에서도 지나치게 노조편향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낙관했다. 오히려 대통령의 업무 복귀가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투자환경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리처드 정은 “5월 중순 한국 증시의 폭락장세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다시 한국 주식을 사들일 태세”라고 전했다.

    종합주가지수 800선 붕괴 등 외국인들의 연이은 매도공세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주도하는 증시 주변에서 이를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과 연관짓는 시각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브릿지증권 김경신 전 상무이사는 “중국 쇼크와 미국 금리인상 우려가 겹쳐 외국인들이 매도공세에 나섰지만 경제정책 불신에 따른 외국인 자금 이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최근 한국내 사업 규모를 늘리겠다고 선언한 리먼브러더스 윤용철 상무도 외국인들이 아직까지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 열린우리당이나 참여정부 2기의 경제정책에 대해 갖는 의구심은 미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외국인들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열린우리당이 분배 쪽에 무게를 둔 정책을 펴지 않겠느냐는 느낌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게다가 재벌개혁과 관련한 정책들은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투명성 강화’ 차원에서 환영할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당장 외국인들이 참여정부 2기 이후 경제정책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특히 서울 증시에 참여하는 외국계 증권사들 일부에서는 최근 들어 삼성물산 금호산업 한화 등 그룹내 지주회사 주식을 외국인들이 사들여온 것을 놓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주목하고 있는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외국인들도 이제 무조건 업종주도주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회사 수익에 의존하는 지주회사 주식 매수에 나서는 것을 보면 한국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노력이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예상밖 선전은 외국인 투자자들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만큼 민노당 변수에 대해 외국인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대다수 외국인 투자자들은 민노당의 원내 진입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도권 진입은 긍정 평가

    일부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제도권에 진입하고 이수호 위원장이 이끄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중노선을 표방함에 따라 불법파업이나 과격시위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윌리엄 오벌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소장 같은 사람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인사. 오벌린 소장은 세계경제연구원 초청 특별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회내 민주노동당의 존재는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민노당의 원내 진입은) 토론이 가능한 국회로 모든 문제를 가져오게 될 것이고 원내 진입으로 인해 주어지는 사회경제적 의무 역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텐트 안으로(inside the tent)’ 들어오는 것은 늘 좋은 일이다. 민노당이 ‘시스템’의 일부로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긍정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는 ‘노무현 2기’ 경제정책

    4·15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외국계 증권사 중 처음으로 모건스탠리 관계자가 민노당을 방문했다.

    총선 직후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 가운데 처음으로 민노당을 방문해 화제를 모았던 모건스탠리 박천웅 상무도 “외국인 투자자들은 민노당의 원내 진입 역시 한국정치 변화의 일부로 바라볼 뿐”이라며 지나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일부 언론이 민노당의 경제정책을 놓고 필요 이상의 우려를 쏟아내는 것을 문제삼는 목소리도 있다. 메릴린치 이원기 전무의 지적이다.

    “노동자들의 대표가 어느 정도 의회에 진출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공통적 현상이다. 민노당이 원내 다수당으로서 정책 입법을 주도할 수준이라면 모를까 현재 수준에서 외국인들은 전혀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민노당의 원내 진입 자체만으로 외국인들이 불안해하고 조바심을 낸다면 진보정당은 영영 의석을 갖지 말란 말 아닌가?”

    리먼브러더스 윤용철 상무 역시 민노당 변수에 대해 “정작 외국인들은 이제 원내에 겨우 몇 석 진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민노당의 파워가 언론을 통해 실제 의석에 따른 영향력보다 부풀려져 과도하게 평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외국 자본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놓고 민노당과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 넘지 못할 선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민노당은 기본적으로 외국자본의 국내투자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투기자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들은 노회찬 사무총장이 미국의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17대 국회 개원 직후 경제자유구역법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발언한 것이나, 대우종합기계 매각과정에서 노조에 동등한 입찰자격을 넘어 사실상 특혜를 요구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 등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우종합기계 문제와 관련해 정부 내에서 서로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가 대우종합기계 노조의 입찰참여 방침을 밝힌 뒤 이 문제가 총선 이후 정부의 대표적 ‘친(親)노조’ 행보로 비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곧 ‘(노조의) 입찰참여는 참여 자격을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혼란을 노출해왔다. 이 와중에 대우종합기계 입찰 마감 날짜가 연기되는 등 진통에 진통을 거듭해왔다.

    열린우리당 입장이 더욱 중요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다양한 이념 성향을 가진 당선자들이 모인 열린우리당이 노사문제나 분배정책 문제와 관련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당이 앞장서서 정부의 경제정책을 이끌고 나가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라 열린우리당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브릿지증권 김경신 전 상무이사는 “열린우리당 내에서 정체성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이 오히려 경제정책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또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결같이 경제정책과 관련해 당정간에 ‘딴소리’가 나오거나 정책 조율이 늦어지는 바람에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불확실성의 제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런 주문에 대해 열린우리당이나 민노당에서는 모두 ‘과도한 엄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경제부처 관료 출신 의원 및 당선자들과 노동계 출신 당선자들 사이에는 또 다른 시각 차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을 지낸 열린우리당 이목희 당선자는 “노사관계 개선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요구는 정부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 대부분 과장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열린우리당 정책위의 한 관계자는 “참여정부의 개방개혁 정책은 외국인들로부터도 호평을 받고 있는 만큼 노무현 정부 2기에서도 이러한 정책 기조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해 하향곡선을 그리던 외국인 투자유치 실적이 올해 들어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산업자원부가 발표한 올해 1·4분기(1~3월) 외국인의 한국 투자규모는 30억4900만달러(신고 기준)로 지난해 같은 기간(11억800만달러)보다 175.2%나 늘어났다. 이러한 수치는 2002년 1·4분기 이후 최대 실적이며 같은 해 4·4분기(10~12월) 이후 지속됐던 감소세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인수(17억달러)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씨티그룹의 투자를 제외한 외국인 투자규모는 지난해보다 21.7% 증가한 13억4900만달러 수준.

    결국 이러한 상승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노무현 2기 정부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올라 있는 셈이다. 게다가 외국인들이 한국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아직까지도 경제적 관점에 따른 투자판단보다 북핵문제 등 정치상황에 대한 고려가 우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국가위험도’를 어떻게 조기에 해소하느냐도 2기 정부가 하루빨리 풀어야 할 과제이다. 해외에 나가 외국 투자자들을 상대로 투자설명회를 가졌던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문제 역시 바로 이 부분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오는 6월 홍콩 뉴욕 등을 돌며 투자설명회를 열면서 이 자리에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뿐 아니라 아예 외교안보 분야 고위 관계자를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와대측에 요청해놓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보면 열린우리당이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해 명실상부한 여당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국면을 벗어나 업무에 복귀하는 것이 정치적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측면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경련 장국현 국제협력팀장은 “노 대통령의 힘이 강화되면 대북관계 등에서도 적극적 입장을 취할 수 있고 한미관계의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셀 코리아(Sell Korea)’ 행렬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정치에 우려의 시선을 거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이번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3당 구도를 놓고 유권자들이 성장과 분배의 균형 발전을 요구하는 가운데 개혁 쪽에 다소 무게를 실어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려의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다이와증권 이창희 이사는 “한국경제는 IMF 사태와 함께 양적 성장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질적 성장만이 유일한 대안인데 노조의 입김이 강화되면 이러한 질적 성장의 동력이 분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우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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