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카리스마 망령’이 한국축구 망친다

포르투갈의 名將이 왜 한국에선 안 통할까

  • 글: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차장 mars@donga.com

    입력2004-06-01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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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엘류 한국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사실상 경질됐다. 성적부진이 1차적 원인이다. 그러나 쿠엘류 경질의 이면엔 한국축구계의 고질적인 ‘카리스마 숭배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국가대표팀 감독의 카리스마는 과연 만병통치약인가.
    ‘카리스마 망령’이 한국축구 망친다
    한국 국가대표팀 쿠엘류 감독이 지난 4월19일 부임 14개월 만에 사실상 경질됐다. 김진국 축구협회 기술위원장도 이에 따른 책임을 지고 5월10일 전격 사퇴했다. 그러자 벌써부터 차기감독에 대한 하마평이 무성하다. 다만 ‘카리스마 있는 감독’이어야 한다는 데는 다른 의견이 없는 것 같다. 쿠엘류가 사람만 좋았지 카리스마가 없어서 선수 장악에 실패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일본 ‘아사히신문’의 축구 전문기자 나카코지 도르(中小路 徹)의 생각은 다르다.

    “쿠엘류 감독의 취임은 한국 축구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본다. 히딩크 감독 아래 한국은 응축된 조직력을 만들어내 월드컵 4강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개인의 타개력과 창조력의 중요성을 주입하자는 것이 쿠엘류 감독의 기본노선이었다. ‘최후까지 남는 것은 조직전술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남미 축구와 궤를 같이하는 포르투갈인 다운 발상이었다. 이는 또한 한국축구가 한 차원 더 높아지기 위해 불가결한 개념이었다. 그는 히딩크 축구에 플러스알파를 위한 적임자였다.

    이러한 타입의 지도자는 자잘한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재치를 발휘하는 것, 자유로운 발상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연습할 때도 전술을 가르치기보다 선수끼리 서로의 의도를 피부로 느껴 감각적으로 팀을 만들어내도록 한다. 원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에 히딩크 감독보다 연습시간이 더 필요했다. 기자회견에서 쿠엘류 감독이 ‘14개월 중 훈련시간은 72시간밖에 없었다. 축구에서 목적을 이루려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 대목은 그런 뜻이 내포된 것이다.

    한국인들에겐 몰디브와의 무승부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바논 베트남 몰디브를 상대로 한 독일 월드컵 1차 예선에서 한국이 패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좀더 기다릴 수 없었을까. 아시안컵을 위한 7월 합숙훈련에는 유럽파와 J리그파도 합류해 연습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이 대회 성적을 본 뒤에 결정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눈앞의 성적이 아니라 최종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장기적 전망이 중요하다는 것은 친선경기 성적에 개의치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던 히딩크 감독을 통해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히딩크 감독이 ‘족집게 강사’라면 쿠엘류 감독은 ‘가정교사’다. 족집게 강사에겐 시험 때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집중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카리스마형 감독은 정열적이고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을 휘어잡아 앞으로 끌고 간다.

    ‘족집게 강사’와 ‘가정교사’

    카리스마형 리더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들로부터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마틴 루터 킹 같은 종교지도자나 성공한 세일즈맨들이 카리스마적 유형의 인물이다. 그들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수성이 뛰어나고 달변가들이다. 의사전달능력이 좋아 사람들을 순식간에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카리스마’란 단어엔 열정, 확신, 명령, 추종, 희망, 감동, 지도력, 매력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윈스턴 처칠, 마이클 조던, 히딩크, 홍명보, 허재 등은 사람들을 이끌어 목표를 달성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비전을 주고 뭔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카리스마형 리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1930년대 독일의 경제공황은 히틀러라는 카리스마형 인간을 낳았다.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카리스마형 리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한번 방향을 잡으면 누가 뭐라든 개의치 않고 ‘무소의 뿔’처럼 간다. 결국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정하게 내리친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쪽박’이다.

    히딩크가 카리스마형 리더라면 쿠엘류는 자율형 리더다. 흔히 용장(히딩크)과 덕장(쿠엘류)으로도 구분된다.

    2000년 12월17일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히딩크는 “난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 비행기 안에서 한국 안내 책자를 읽었을 뿐”이라고 첫 소감을 말했다. 그는 첫 한식 식사 때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핌 베어벡 코치가 능숙한 젓가락질을 자랑하자 “배고플 땐 젓가락보다 숟가락이 낫다”며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퍼 입에 넣었다.

    이에 비해 2003년 2월3일 서울에 처음 온 쿠엘류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며 수줍게 인사했다. 얼마 뒤인 3월20일 첫 국가대표팀 명단을 발표할 땐 오른손을 불끈 쥐며 한국말로 “우리는 자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 한식 식사 때도 “한국음식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다”며 서투른 젓가락질로 열심히 반찬을 날랐다.

    히딩크는 코칭스태프나 선수들로 하여금 자신을 ‘미스터 히딩크’로 부르도록 엄명했다. 그러나 쿠엘류는 “축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나를 ‘움베르투’로 불러달라. 나도 당신들을 ‘(박)성화’ ‘(최)강희’로 부르겠다”고 말했다. 감독과 코치가 서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유럽에서조차 대단한 파격이다.

    2003년 3월27일 한국 축구대표팀은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첫 훈련에 들어갔다. 쿠엘류는 자신이 직접 플라스틱 콘으로 미니게임을 위한 경계선을 만들었다. 훈련 전 실무자에게 미니게임을 위한 이동식 골대를 준비하라고 했으나 미처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무자가 사정 설명을 하자 쿠엘류는 ‘없으면 없는 대로 하자’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아마 히딩크라면 부산 시내를 다 뒤져서라도 가져왔어야 했을 것이다.

    재임 초기 히딩크는 10개 국내 프로축구팀 감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1시간이나 늦게 나타나고서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강심장을 자랑했다. 그러나 쿠엘류는 부임하자마자 각 프로축구팀의 훈련장을 직접 찾아 개별적으로 감독들을 만나 간곡히 협조를 요청하고 조언을 구했다.

    허정무 전 국가대표감독은 “히딩크는 자신이 정한 틀에 따라 대화를 진행한다. 적극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편이다. 그러나 쿠엘류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얘기를 진지하게 듣는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한다. 히딩크에게서는 강한 자부심과 고집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 쿠엘류에게서는 밝고 온화한 성품이 엿보인다. 물론 자신의 축구철학과 지도방식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하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같다”고 말했다.

    카리스마형 감독은 대체로 독단적이고 주입식이다. 자신의 틀에 선수들을 짜맞춘다. 자칫 선수들을 ‘공차는 로봇’으로 만들 수도 있다. 영국의 유명한 축구칼럼니스트 랍 휴스의 말을 들어보자.

    “2001년 히딩크 당시 감독과 피지컬 트레이너가 한국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을 지켜본 적이 있다. 히딩크는 최전선에 투입될 군인들을 조련하듯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그는 ‘선수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결코 월드컵에서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을 대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선수들의 경기 방식과 삶의 스타일, 본능까지 바꾸는 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가정교사는 당장 성적이 안오르더라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의 실력이 탄탄해지고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쿠엘류에게는 히딩크보다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어야 했다. 더구나 쿠엘류가 가르치는 대상은 시험을 코앞에 둔 ‘고3’이 아니다. 어쩌다 시험한번 잘 치러(월드컵 4강)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아이들’이다. 그 전처럼 죽자살자 뛰지도 않는다.

    카리스마란 원래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신의 은총’ ‘신이 준 재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카리스마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카리스마란 원래부터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간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히딩크가 제아무리 카리스마적이라 해도 그가 재임했던 500일 동안 훈련시간이 겨우 일주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진작 경질됐을 것이다. 축구협회 자료에 따르면 쿠엘류 감독 부임이후 대표선수들을 소집한 기간은 총 65일. 보통 A매치경기 3~4일 전에 소집해서 하루 이틀 몸을 풀고 하루쯤 훈련하는 시늉을 했다가 마지막 날 경기에 임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훈련장 이동, 취침, 휴식, 전체회의, 개별면담, 상대팀 비디오 분석 시간 등을 빼고 나면 실제로 운동장에서 선수들과 훈련한 시간은 쿠엘류의 주장대로 72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겉멋 든 한국대표팀 선수들

    쿠엘류는 현역시절 포르투갈에서 한국의 홍명보 만큼이나 유명한 선수였다. 세계적 명문 벤피카의 주장으로 14시즌 동안 무려 8번이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포르투갈대표팀 주장으로서 A매치에 64경기나 출전했다. 중앙수비수였지만 A매치 13경기에서 6골을 넣은 적이 있을 정도로 ‘골 넣는 수비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포르투갈대표팀 감독 시절 그는 2000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잉글랜드와 독일을 꺾고 포르투갈을 3위에 올려놓았다. 그 유명한 피구, 콘세이상, 후이코스타도 쿠엘류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그는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선수 장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국 축구계는 흔히 말한다. 조직 장악엔 강한 리더가 필요하고 강한 리더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과연 그럴까. 꼭 카리스마가 있어야만 선수 장악을 할 수 있는 걸까.

    물론 능력 있는 축구감독이라면 일단 선수 장악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축구철학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리스마가 없다고 해서 선수 장악력이 모자란다고는 할 수 없다. 있든 없든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세계 수많은 감독들 중에는 카리스마형보다는 쿠엘류 같은 자율형이 더 많다. 카리스마란 선수 장악을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네덜란드 페예노르트에 있는 송종국은 “쿠엘류 감독은 선수들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일단 맡기고 지켜보는 스타일이다. 유럽 감독들도 대부분 쿠엘류 감독 스타일이다. 그러나 유럽선수들은 감독이 간섭을 안해도 훈련 때는 죽기 살기로 뛴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시켜야만 움직인다. 어릴 때부터 강압적인 지도자 밑에서 선수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그만큼 자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아인트호벤의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과 쿠엘류 감독은 용장과 덕장으로 구별될 뿐이다. 쿠엘류 감독이 나쁜 지도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쿠엘류 감독이 일찍 떠나게 된 것에는 선수들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같은 팀의 이영표도 “쿠엘류 감독은 자상하면서도 자율을 중시하는 지도자였다. 선수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히딩크 감독의 카리스마와 쿠엘류 감독의 자율성이 반반 섞인 지도자가 다음 감독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망령’이 한국축구 망친다

    골 세리머니를 하는 거스 히딩크 전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그는 ‘카리스마형’ 감독의 전형으로 꼽힌다.

    눈만 한없이 높아진 한국선수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다. 실력이 ‘월드컵 4강 수준’으로 향상됐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전보다 뒤처진 감이 있다. 겉멋만 잔뜩 들었다. 히딩크 감독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그의 말을 따를지 의문이다.

    올림픽대표팀 김호곤 감독은 “지난 한일 월드컵 이후 우리 선수들이 너무 커버렸다. 정신력과 자세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감독이 아무리 준비를 잘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라운드에서 보여줘야 하는 건 선수들이 아닌가. 우리 선수들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들에겐 자극이 필요하다. 언론도 선수들 정신력에 문제가 있다고 두루 뭉실하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따끔하게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 정말 뛰어난 선수는 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팀과 함께 빛을 발하는 선수다. 팬들을 의식해 화려한 개인플레이를 펼치는 베컴보다는 적재적소에서 성실하게 플레이하는 지단이 팀에는 훨씬 유용하다”고 말했다.

    한국대표팀 주장 유상철(33·요코하마 F 마리노스)은 “이제 2002월드컵 4강의 추억은 잊어야 한다. 당시와 달리 선수들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 땐 어느 팀과 싸워도 이길 수 있도록 정신무장이 돼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투지가 없는 것 같다. 다시 월드컵을 준비하는 자세로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충고한다.

    약체팀에 이기지 못하는 이유

    지난 4월28일 0-0으로 끝난 파라과이와의 친선경기를 본 한 팬은 “차라리 쿠엘류 감독이 진작 그만두길 잘했다. 파라과이전까지 버텼더라면 더한 수모를 당했을 것이다. 쿠엘류 감독이 물러난 뒤 갖는 첫 A매치여서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좀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주전 대부분이 2002월드컵 멤버들이었지만 이들의 플레이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월드컵이후 한번도 시원한 경기를 보지 못했다. 차라리 한국축구가 더 몰락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선수들을 다시 선발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제 한국축구는 더 이상 2002월드컵 이전의 한국축구가 아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축구의 패러다임(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선수들의 생각도 딴판으로 바뀌었고 팬들의 기대감과 눈높이는 한없이 높아졌다. 한국과 상대하는 팀들의 작전이나 정신자세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월드컵 전 한국팀이 브라질 프랑스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팀과 맞붙었을 때 사용했던 ‘전원 수비 후 역습’ 작전을 이젠 오만 베트남 몰디브 같은 팀들이 한국팀을 상대로 즐겨 쓴다. 한국이 브라질과 비기기만 해도 만족했듯 오만 베트남 몰디브도 한국과 무승부만 기록해도 마치 이긴 것처럼 좋아하게 됐다. 당연히 오만 베트남 몰디브 선수들은 (한국선수들이 몸을 던져가며 브라질 공격을 막아냈듯이) 투혼을 불사르며 한국팀의 공격을 막아낸다. 지난 3월31일 한국이 몰디브와 0-0으로 비겼을 때 AP통신은 “1997년 월드컵 예선에서 이란에 17-0으로 졌던 몰디브 국민들은 한국과의 무승부에 축제 분위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선수들은 이런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4강의 추억’에 젖어 ‘거들먹거리는 축구’를 하고 있다.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선수들이 애국심과 사명감보다는 상업적인 것에만 휘둘리고 있다. 스폰서나 신경 쓰고 대표팀을 단순히 몸값 올리는 기회로만 여긴다”고 개탄했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도 “선수들이 월드컵을 통해 눈만 업그레이드 됐다. 실력도 그만큼 업그레이드 돼야 하는데 다른 것에 신경을 쓰니 제대로 경기에 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브라질이나 프랑스 같은 세계적인 팀들이 ‘전원 수비 후 역습’을 펼치는 한국팀을 상대로 어떤 작전과 플레이를 펼쳤는지 기억하는 선수들이 과연 있을까. 당시 그들은 한국이 약체였음에도 평소보다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고 패스 또한 얼이 빠질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한 골 넣었다고 느슨하게 수비하기는커녕 더욱 공격 고삐를 죄어 추가 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한국도 오만 베트남 몰디브를 상대로 강하고 거칠게 몰아붙여야 했다.

    더구나 이제 오만 베트남 몰디브 같은 팀들은 월드컵 이전 한국이 그랬듯이 한 달이 됐든 두 달이 됐든 오랫동안 합숙훈련을 한다. 그만큼 팀워크가 잘 맞는다. 반면 한국은 예전처럼 선수들을 오랫동안 함께 모아 훈련할 수 없다. 보통 3~4일, 길어야 열흘 정도 손발을 맞출 수 있을 뿐이다. 이제야 축구 선진국처럼 선수소집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축구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한국은 이제 그 과도기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그 전보다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축구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 김호곤 감독은 “프로구단 선수차출 규정을 되도록 지키고 싶지만 현재 실력으로 볼 때 그 규정을 지켜서는 결코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곤혹스러워했다. 김호 전 수원삼성 감독도 “히딩크가 이룬 성적은 앞으로 그 누가 감독으로 와도 결코 낼 수 없는 성적이다. 프로팀들이 1~2년간 주전선수들을 내주고 어떻게 팀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그런 프로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축구칼럼니스트 랍 휴스는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국선수들의 유럽진출은 도약의 기회다. 그러나 거꾸로 한국으로선 그 선수를 대표팀에 합류시키는 데 더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됐다. 이제 한국축구는 히딩크 감독이 2002월드컵을 위해 훈련캠프를 차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였다. 쿠엘류와 히딩크를 비교하지 말라. 2002 주역이었던 홍명보와 황선홍은 떠났다. 조병국이 하루아침에 홍명보의 자리를 메우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조재진 정조국 김동현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황선홍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경험이란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게 아니다. 월드컵 영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를 잃어간다. 브라질의 히바우두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MVP였던 독일의 명 골키퍼 올리버 칸도 ‘알까기’를 하는 등 옛날 실력이 아니다. 그들은 지쳤다. 2002월드컵 무대를 휘저었던 스타들은 피로에 지쳐 퇴보하고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월드컵의 과실을 따먹은 선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굶주림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쿠엘류는 취임하면서부터 이미 잘리게 돼 있었다. 그에 대한 한국국민의 기대가 너무 컸다. 2002월드컵 우승팀인 브라질의 필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한국대표팀을 맡았더라도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여름 이뤄놓은 성과 이후 한국축구의 변화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감독도 히딩크가 해냈던 것과 똑같은 성공을 절대 거둘 수 없다.

    한국의 ‘월드컵 4강신화’는 히딩크만의 공이 아니다. 선수들은 수개월 동안 월드컵을 위해 훈련에만 매진했다. 기나긴 리그가 끝난 후 피로가 채 가시기 전에 단 몇 주 발맞추고 월드컵에 나서는 유럽과 남미 등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민들의 열정적인 응원도 큰 몫을 했다. 어떻게 그 같은 일을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쿠엘류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했듯이 과감하게 젊은 피를 수혈해 새로운 팀을 만들어야 했었는데 정말 안타깝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유상철은 “쿠엘류 감독이 한 고비만 넘기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떠나게 돼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다. 쿠엘류 감독이 한국을 알 만큼 알았지만 잘할 수 있는 시발점에서 그만두게 됐다. 2006년 월드컵 이전에 이런 위기에 놓인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 축구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축구는 쿠엘류의 재임기간인 14개월이란 소중한 시간을 잃었다. ‘가정교사’를 모셔다놓고 ‘족집게 강사’에게 바라던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카리스마형 감독’을 불러야 된다고 야단법석이다. 처음부터 ‘세대교체’에 중점을 두어 과감하게 신인들을 발굴해 국제경험을 쌓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한국축구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사 그 과정에서 약팀에게 진다 한들 신인들에겐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축구협회의 즉흥식 행정이 ‘돈과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물론 한국만 월드컵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재일축구평론가 신무광씨는 “월드컵 공동개최 이후 한국과 일본축구가 동시에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히딩크를 내내 잊지 못했고 일본은 트루시에를 잊으려고 애를 쓰다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는 것. 그는 “한국은 히딩크의 빛나는 월드컵 4강 업적에 허우적거리다 끝내 후임자 쿠엘류를 중도 하차시켰고, 일본은 조직과 규율을 강조했던 트루시에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율축구를 신봉하는 지코를 영입했으나 지코는 ‘생각 없고 훈련 없는 자율’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카리스마형’으로 회귀?

    축구협회는 지난 5월6일 쿠엘류 감독 후임으로 후보 10명을 발표했다. 브뤼노 메추(50) 전 세네갈 감독, 셰놀 귀네슈(52) 전 터키 감독,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56) 현 포르투갈 감독, 로저 르메르(63) 전 프랑스 감독, 완더리 룩셈부르구(52) 전 브라질 감독, 마이클 매카시(45) 전 아일랜드 감독, 비센테 델 보스케(54) 전 레알 마드리드 감독, 파티 테림(51) 전 터키 감독, 다니엘 파사렐라(51) 전 아르헨티나 감독, 홀거 오시에크(56) 전 캐나다 감독이 바로 그들이다.

    협회는 최근 월드컵 본선 16강 이상의 성적을 올렸거나 대륙·클럽선수권에서 우승 경험을 가진 감독 중 선수 장악력, 경력, 세계 축구 흐름에 대한 지식, 정보 수집능력을 감안해 이같이 후보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들은 두말할 필요 없는 명장들이다. 작전이나 전술능력 등에서 누가 우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검증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적응력은 이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축구 실력’보다 한국에 와서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루피넨 전 국제축구연맹(FIFA)사무총장은 “지난 월드컵 때 히딩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외국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네덜란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0명의 감독후보가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한국문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선수들은 투사(Fighter)적 기질이 강하다. 남미 스페인 같은 기술 위주의 축구보다는 체력과 조직력을 강조하는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출신 감독이 한국축구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인트호벤의 박지성도 “한국 문화에 잘 맞고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는 감독이었으면 좋겠다. 축구엔 모두 유능한 감독들이지만 그분들 중에서도 특히 한국문화를 잘 이해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용수 KBS 해설위원(세종대 교수)은 “10명 모두 실력을 검증받은 감독이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한국과 대한축구협회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표팀 감독 선임권을 갖고 있는 기술위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일단 대부분의 기술위원들은 브뤼노 메추 감독을 제1순위로 꼽고 있는 것 같다. 쿠엘류 선임 당시 메추를 적극 지지했다는 조민국 기술위원은 “카리스마가 있는 메추가 괜찮은 것 같다”고 했고 권오손 기술위원도 “협회에서도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메추에 대해 긍정적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강영철 기술위원은 “메추는 실적도 있고 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많이 한 인물이다.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현대축구의 주류인 지역방어를 단기간에 철저하게 지도할 수 있다. 귀네슈 감독도 좋은 지도자이지만 터키어밖에 할 줄 몰라 언어상의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메추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다면 여러 이유 가운데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이 상당한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배경엔 쿠엘류가 선수 장악에 실패한 것은 카리스마가 없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강압적 분위기에서 자라온 한국선수들은 감독이 시켜야만 움직이므로 자율형은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쯤 ‘사역축구’에서 벗어나나

    이렇게 되면 한국축구는 영영 누가 시켜야만 하는 ‘사역축구’가 되고 만다. 자유분방하고 창조적인 축구는 물거품이 된다. 상상력은 자율을 먹고 자란다. 또 메추가 선임된다고 해도 그가 반드시 한국축구계가 바라던 대로 ‘다소 강압적인’ 지도력을 발휘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한국축구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적이 안나오니 우선 급한 대로 선수들을 ‘족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보자는 발상이 그것이다.

    사실 메추는 카리스마보다는 세네갈대표 감독이었을 당시 세네갈 여성과 결혼했을 정도로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더 크다. 그는 늘 “선수들과 나 사이는 연인처럼 달콤하다”고 말한다. 그 자신 치렁치렁한 머리만큼이나 자유분방하며 선수들도 자유스럽게 풀어준다.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고 ‘창의력’과 끈끈한 동지애로 다져진 ‘팀워크’를 요구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축구가 은근히 요구하고 있는 ‘나를 따르라’ 식과는 거리가 멀다. 단 한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는 축구협회 기술위원들은 풍문으로 혹은 인상비평으로 그를 ‘카리스마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은 “새 감독 영입을 논하기에 앞서 왜 쿠엘류 감독이 실패했는지를 분석하고 향후 대표팀 운영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쿠엘류 감독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허정무 전 국가대표감독도 “유로 2000에서 쿠엘류가 이끄는 포르투갈대표팀은 대단히 창조적인 플레이를 보여줬다. 선수들의 능력과 함께 이를 조합하는 감독의 지도력이 아니고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다. 쿠엘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가 왜 한국에서 실패했나. 물론 쿠엘류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히딩크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협회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냈다. 하지만 쿠엘류는 너무 수동적이어서 협회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렇다면 한국축구계는 어떠한가. 혹시 2002월드컵 4강에 취해 외국인 감독을 데려다놓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히딩크는 사실상 무제한의 선수선발과 소집훈련 등 각종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았다. 쿠엘류의 실패는 한국축구의 돈·시간·심리적인 손실이다”고 말했다.



    과연 히딩크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성공했고 쿠엘류는 카리스마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을까. 카리스마형 외국인 감독만 데려다놓으면 한국축구가 한 계단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밑도 끝도 없는 ‘카리스마 감독 메시아론’이 한국축구계를 떠돌고 있다.

    흔히 축구인들은 역대 한국대표팀 감독의 지도 스타일을 ‘카리스마형’ ‘자율형’ ‘관리형’ 등 3가지로 나눈다. 히딩크는 카리스마형 지도자의 대표적인 예다. 반면에 1991년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독일)과 94미국월드컵 이후 한국대표팀을 맡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러시아), 쿠엘류 감독은 모두 자율형 지도자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코칭스태프나 선수, 협회를 장악하지 못한 채 불화를 겪다 중도하차했다.

    한국인 출신으로 각각 94미국월드컵과 98프랑스월드컵 사령탑을 맡았던 김호 감독과 차범근 감독은 관리형 지도자로 꼽히지만 이들 역시 기대 밖의 성적을 내, 감독생명을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다.

    쿠엘류·박성화의 갈등

    결국 히딩크를 빼놓곤 자율형이든 관리형이든, 혹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히딩크를 제외한 한국대표팀 감독들의 실패엔 사실 축구협회를 비롯한 한국축구계의 폐쇄성이 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만약 2002월드컵을 한국에서 치르지 않았다면 과연 축구협회를 비롯한 한국축구계가 히딩크에게 한 것만큼 헌신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을까. 그동안 한국대표팀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데에는 지도자의 성향보다는 축구협회의 주먹구구식 행정과 한국 축구인들의 배타성에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히딩크가 성공했다고 카리스마형 감독이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쿠엘류 밑에서 피지컬 트레이너로 일했던 조제 아우구스투는 “히딩크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코칭스태프를 데려왔고 선수선발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엘류는 나 하나 데려온 게 전부였다. 더구나 한국 코칭스태프는 감독 구실까지 하려 할 정도로 쿠엘류 감독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성화 수석코치는 코치가 아니라 감독이었다. 또한 선수들의 정신력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몰디브 베트남 등과의 경기에서 쿠엘류 감독이 더욱 긴장하라고 했지만 선수들은 이를 무시해버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성화 코치는 펄쩍 뛴다. “코치는 감독을 보좌할 뿐이다. 지난해 4월 한일전(0-1 패) 때 전반전이 끝난 뒤 감독에게 ‘수비의 폭이 넓다’고 건의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쿠엘류 감독은 나중에 나를 따로 불러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 난 그 일 이후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쿠엘류 감독과 한국인 코칭스태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원인은 문화충돌일 수도 있고 축구관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한국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쿠엘류에겐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축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비싼 돈을 들여 일류선생을 모셔왔으면 마음을 활짝 열고 그의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92바르셀로나 올림픽예선 한국팀 총감독 크라머가 “한국 축구인들은 너무 배타적이어서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고 했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은 감독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이제 한국선수들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진짜 프로’가 돼야 한다. 자율형 스타일의 감독 밑에서 더 잘할 수 있어야 한국축구가 한 차원 높아진다.

    2002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한국축구계에서는 모든 게 ‘잔디축구장’으로 통했다. 성적이 나쁘면 잔디구장이 없었던 탓이고 골문 앞에서 똥볼을 날려도 맨땅에서 공을 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10개의 월드컵경기장과 파주의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NFC)까지 생긴 요즘 한국축구는 과연 비약적으로 발전했는가.

    네덜란드의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오히려 다른 말을 한다.

    “어릴 때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배우는 게 오히려 문제다. 맨땅의 길거리 축구에서 시작하는 게 훨씬 낫다. 넘어지고 다치는 게 일상사인 게 길거리 축구다. 아이들은 한번 다쳐보면 다음부터는 다치지 않으려고 생각하면서 공을 차게 된다. 공을 다루면서 몸싸움을 하더라도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13, 14세까지 길거리에서 축구를 배웠다. 길거리 축구에서 흔히 하게 되는 벽치기는 아주 훌륭한 연습방법이다. 잘못 차면 잘못 찬대로, 잘 차면 잘 찬대로 돌아오는 정말 정직한 연습방법이다.”

    문제는 ‘잔디축구장’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축구행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들의 주먹구구식 지도방법이 크루이프 같은 축구꿈나무를 키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축구계에 ‘잔디구장 타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쑥 들어갔다. 그 자리를 ‘카리스마 감독 메시아’론이 떠돌고 있다.

    포르투갈어인 쿠엘류(Coehlo)란 단어엔 ‘토끼’라는 뜻이 있다. ‘존경’ ‘인내’ ‘엄격함’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토끼’ 쿠엘류는 지난 4월19일 “사퇴과정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사임한 것이 아니라 축구협회와의 합의하에 계약을 종료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내 후임으로 오든 그동안 충분하게 받지 못했던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히딩크 감독도 처음 부임해서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고생했지만 월드컵을 위한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차기 지도자에게 이같이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다면 분명히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외국 지도자가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와서 일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기 때문에 업무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축구는 카리스마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와 비슷하다. 한국정치는 상당기간 카리스마의 화신인 ‘3김’에 의해 좌우되어왔다. 한국적 풍토에서 카리스마는 폐쇄주의, 1인 보스주의, 타율과 비민주주의로 이어져왔다. 로이터통신은 쿠엘류가 퇴임하던 날 “한국축구대표감독 자리는 ‘독이 든 성배(聖盃)’”라고 비아냥댔다.

    과연 누가 ‘독이 든 잔’을 덥석 잡아 마실 것인가. 메추는 ‘검은 사자군단’ 세네갈 팀을 이끌고 2002월드컵에서 프랑스를 물리치고 8강까지 올랐다. 한국축구는 이제 ‘토끼’가 아닌 ‘사자’ 같은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라고 독을 마시면 온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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