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남인의 예술혼 깃든 ‘유교적 만다라’의 고향

  • 글: 박재광 parkjaekwang@yahoo.co.kr 사진: 정경택 기자

    입력2004-06-02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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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부사시사’의 주인공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 자리잡은 곳은 동서남북 사신사에 조화롭게 둘러싸인 전남 해남이다. 16세기 해남 윤씨들은 고기 낚고 나무 베는 도가적 생활을 즐기면서도 호남 남인세력의 핵심으로 명성을 날렸다.
    남인의 예술혼 깃든 ‘유교적 만다라’의 고향

    돌담 사이로 보이는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은 조선왕조 17대 왕 효종이 스승이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이다.

    전남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호방한 터에 자리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집터는 1만여평이지만, 전체 터는 50만평에 달한다. 전체 터란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가 둘러싸고 있는 면적을 말한다. 풍수적인 안목으로 볼 때 바로 이 사신사가 이상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명당이 되려면 우선 현무에 해당하는 뒷산이 좋아야 한다. 덕음산(德陰山)이라 불리는 이 집의 뒷산은 해발 200m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덩치이다. ‘덕음’이란 이름은 ‘덕의 그늘’이란 뜻.

    다음으로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맥을 보아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방풍(防風)이 약하면 바람에 기(氣)가 흩어지기 때문에 그런 터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았다. 청룡·백호가 집터를 겹겹이 막아주면 풍수적으로 더욱 좋다. 덕음산에서 내려온 청룡·백호는 윤선도 고택을 세 겹으로 둘러싸고 있다. 방풍으로서는 최고인 셈이다.

    안산(案山)이라 불리는 주작을 살펴보자. 안산은 좌정하고 앉았을 때 정면으로 마주보는 산을 말하는데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안 된다. 너무 높으면 위압감을 주고, 너무 낮으면 허한 감을 주기 때문이다. 윤선도 고택의 안산은 그 높이가 적당하다.

    이렇듯 사신사가 완벽하게 집터를 둘러싼 윤선도 고택은 ‘유교적 만다라’가 구현된 곳이라 부를 만하다. 사신사가 둘러싼 한가운데 있는 집터는 우주의 중심을 의미한다. 이 집에 들어가면 우주의 자궁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유교적 성스러움을 갖춘 집이라 하겠다.







    비자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흡사 비오는 소리 같다고 하여 ‘녹우당(綠雨堂)’이라 한 윤선도 고택은 호남 예술정신의 요람이다. 윤씨들은 16세기 초 어초은(漁焦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 때부터 이곳에 자리잡았다. 윤효정은 고기나 잡고 나무나 하며 은둔하겠다는 호의 뜻 그대로 도가적 취향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씨 일가는 윤효정의 5대손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내리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면서 부와 명예를 지닌 명문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그러다 고산 윤선도에 이르러서 은둔 생활이 시작됐다. 정치적으로 남인 계보에 속했던 고산은 노론에 밀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귀거래사했다.

    윤선도의 예술혼은 그의 종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이어받았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의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이 집안은 실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은 주로 남인들에 의해 발전했는데, 해남 윤씨 집안이 전라도 남인의 중심이었던 까닭이다. 실학의 완성자라 일컬어지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다.

    사신사에 둘러싸인 녹우당의 만다라가 동서남북으로 미·중·일·러에 둘러싸인 한반도에 적용될 날도 멀리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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