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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KGB 비밀문건 들고 주석궁 찾은 김정일, “이젠 내가 군을 쥘 때가 됐습니다”

  •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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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진영 확장을 위해 전세계를 상대로 활동해왔던 KGB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북한이 비록 사회주의 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소련에는 인접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에 대해 KGB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공작을 본격 진행한 상태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독재국가 북한과 얼마든지 흥정할 만한 거리가 되었다. 이 때문에 KGB 동아시아 담당요원은 1000만달러를 조건으로 북한에 친소련계 반정부조직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은밀히 제안했다.

1000만달러라는 금액에 놀란 북한 관계자들은 즉시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회주의 초강대국인 소련의 해체 속도가 빨라지는 걸 보며 불안했던 김정일은 “국운이 걸린 문제인데 돈이 아깝겠느냐”며 당장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물론 인민무력부 보위국 간부들도 KGB의 수완에 경악했다. 문건에는 영원한 우방이나 친구는 있을 수 없다는 KGB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주석궁에서의 담판

현대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현대화와 함께 군 지휘관의 군사 안목도 넓혀야 한다는 판단하에, 북한은 1985년부터 군 지휘관들을 대거 소련 군사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장군 양성기지로 불리던 위르실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유학한 대학)나 연대장 이상 간부 교육·양성 기지인 프룬제 아카데미아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군의대학, 전자대학, 공군대학(현 공군사령관 오금철이 유학한 대학) 등 20개가 넘는 소련 군사대학과 관련기관에 거액을 지급했다. 또한 구 동독에도 지휘관들을 유학 보냈는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내보낸 지휘관 숫자만 해도 무려 700명에 가까웠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해온 평양 내부에서 친소련계 급진세력이 득세하기를 원했던 소련으로서는, 북한이 이렇듯 현직 군 지휘관들을 대대적으로 유학시키는 상황이 유일무이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KGB는 군사대학의 2년, 혹은 3년 재학기간을 포섭기간으로 정하고 출세 경력과 군사자질을 갖춘 북한 유학생들을 상대로 금품매수와 미인계, 협박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해 친소련 비밀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아시아 담당요원이 거액을 요구하며 북한과 흥정한 문건이란 바로 이들의 명단이었다.



문건을 전달받은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장이던 중장 원응히에게 전후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면서, 인민무력부가 그동안 대(對)소련 정책이 안일하게 운용돼왔다는 데 대한 의견도 첨부하라고 지시했다. 나중에야 알려졌지만, 이는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직위를 요구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최고사령관보다는 당 총비서나 국가주석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당 군사부도 당 조직부에 구속돼 있는 종적(縱的) 사업원칙상 군사부문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이 전적으로 맡은 것은 아니었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3년부터 노동당 중앙위 조직담당 비서 직위를 이용해 인민군에 영향력을 행사했음-편집자). KGB 문건을 보고받기 전날까지 절대적인 친소정책을 추진해온 것도 다름 아닌 김정일이었다.

그 실례로 북한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라모나 기지를 들 수 있다. 냉전시기 소련은 미국의 포위 구상에 맞서는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북한에 소련 군사위성 통신결속소를 세우는 방안을 제기했다. 1960년대 북한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황이어서, 김일성은 크든 작든 또 다른 형태의 주둔을 반대했고 소련이 기지 후보지역으로 평양시 형제산 구역을 정한 데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결국 김정일이 완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수락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군사 암호로 ‘208조’로 불린 소련 위성 통신결속소 성원들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과 배려는 대단했다. 208조 단장이던 백러시아 군관구 부사령관 웨리드좌노프 중장을 위해 평양시 중심구역에 호화주택도 짓게 했다. 지금은 민주조선사 주필인 김정숙(김일성의 친척으로 허담 전 대남비서의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4·25문화회관 뒤 개인주택이 바로 그 집이다. 또한 라모나 기지 성원들을 위해 평양시 중구역 고려호텔 뒤 영광동 번화가에 20층짜리 초호화 아파트를 세우기도 하였다(지금은 인민군 총정치국, 총참모부 장령 아파트로 바뀌었다).

1989년 소련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라모나 기지를 철수할 때에는 미림대학(군사대학으로 지금은 김일대학으로 불리고 있음)에 나와 있던 40여 명의 소련 군사대학 교수도 함께 목란관에 초청하여 북한 유명 여배우들까지 동원한 최상급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한 사람도 다름아닌 김정일이었다. 그간 군사분야의 친소련 정책에 책임질 사람은 바로 김정일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 국장 원응히가 준비한 보고서를 들고 금수산의사당을 찾아갔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1991년 8월18일 소련의 비상사태와 그로 인한 냉전구도 해체를 새삼 열거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부의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제는 내가 군을 쥘 때가 됐다’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1991년 12월24일 김일성이 발표한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 선언은 이렇듯 소련 KGB의 작전을 역이용한 김정일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 앞당겨진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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