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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9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사고 또 사라, 반드시 오를 날 있으리니!”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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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당시의 미두시장 입회장면을 묘사한 ‘동아일보’1939년 11월9일자 기사와 이를 풍자한 만화(위).

“인천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파란 많은 곳이 미두시장이었다. 그러나 44년 미두사(米豆史)에서 반복창만큼 미두로 큰 환희와 좌절을 맛본 사람도 드물었다. 미두에 성공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가 미두에 실패해 재산과 가족은 물론 정신까지 빼앗긴 반복창의 기구한 삶은 미두시장 흥망의 역사 그 자체였다.

반복창은 인천에 미두시장이 개설된 지 4년 후인 1900년,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지방관아의 실무책임자였던 만큼 어린 시절 반복창은 풍족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방 이후 부친이 직장을 잃자 반복창의 가정은 급속히 기울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친은 장사를 시작했지만 손대는 족족 큰 손해를 보았다.

거듭되는 사업실패로 화병까지 얻은 부친은 반복창이 열두 살 되던 해에 빚만 잔뜩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현직에 있을 때 부친에게는 의형제까지 맺은 절친한 친구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부친이 아전에서 쫓겨나고 사업에 실패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자, 그 많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반복창의 가족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부친을 잃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강화도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 아라키(荒木)라는 일본인 집에 아이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갔다.

아라키 중매점의 ‘반지로’

개항 직후 화륜선을 몰고 인천으로 건너온 아라키는 한강 수로를 따라 인천과 한양을 오가면서 곡물을 운송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미두시장)’가 들어서자 ‘아라키중매점’이라는 미두 중매점을 차렸다. 오늘날로 치면 ‘취인소’는 선물(先物)거래소, ‘중매점’은 선물회사에 해당한다.



미두시장은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팔던 곳이다. 처음에는 쌀 외에도 콩, 면화, 명태 등이 거래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쌀 한 품목만 남았다.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시장’이라고도 불렀다. 미두시장에서 현물거래가 이뤄지는 쌀도 있었지만, 전체 거래량의 0.5%에도 못 미쳤다. 원래는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시장이지만 실제로는 공인된 ‘도박장’처럼 운영됐다.

미두의 최소 거래단위는 100석이었다. 쌀을 사거나 팔려면 중매점에서 ‘미두통장’을 개설해 10%의 증거금을 예치해야 했기에 미두를 하려면 최소한 100원은 있어야 했다. 그때 돈 100원이면 평범한 월급쟁이 두세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거래를 체결한 당월 말에 청산하는 ‘당한(當限)’, 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중한(中限)’, 다음다음달 말에 청산하는 ‘선한(先限)’ 세 가지 형태의 거래방식이 있었는데, 거래는 가격의 변동폭이 큰 ‘선한’에 집중됐다.

결제일에는 쌀과 현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차액만큼 현금을 주고받는 것으로 청산이 이뤄졌다. 결제일이 되기 전이라도 쌀값이 등락해 증거금이 10%에 못 미치면 부족한 만큼 채워넣어야 했다. 만일 채워넣지 못하면 다음날 반대매매로 청산됐다. 가령 쌀 100석을 300원의 증거금으로 석당 30원씩에 샀다면 쌀값이 3원만 오르내려도 두 배를 벌거나 깡통을 차게 되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거래였다.

열두 살 소년 반복창은 아라키의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그 자신도 자랐다. 그렇게 2년을 지낸 후 반복창은 아라키중매점의 ‘요비코(呼子·미두 시세를 전하는 아이)’로 들어갔다. 열네 살 소년 요비코 반복창의 주 임무는 중매점에 모여 앉은 미두꾼에게 인천과 오사카의 미두시세를 소리를 질러 전달하는 것이었다.

미두시세는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 날씨, 거래량, 정치, 경제적 변인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지만, ‘오사카도지마취인소(大阪堂島取引所)’의 미두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선이 깔리지 않아 모든 연락은 전보를 통해 이뤄졌다. 미두 거래는 오전에 열리는 전장(前場)에서 10회, 오후에 열리는 후장(後場)에서 7회로 하루에 총 17번 이뤄졌는데, 쌀값이 오르다가도 오사카 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졌다는 전보가 날아오면 다음 거래에서는 상승세가 꺾이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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