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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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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모임을 가졌을 때의 식비다. 졸업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동창 가운데는 내로라하는 기업의 임원이 된 녀석도 있고, 벤처기업을 차리거나 장사를 해서 성공한 친구도 있다. 밥을 먹으면 당연히 한 번쯤 내도 될 형편인 친구가 여럿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과용하는 것을 극구 막았다. 그 역시 모임을 와해하는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인이 전체의 밥값을 내는 것은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한번 그런 식으로 얻어먹고 나면 다음번에 누군가가 또 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 보면 가장 편해야 할 반창회가 오히려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만다.

고심 끝에 내가 만든 방식은 바로 더치페이. 그날 자신들이 먹은 만큼 돈을 나눠 내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방식이다. 우리 모임의 구성원 가운데에는 형편이 어렵거나 사업을 하다 망한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라도 회비는 각자 먹은 걸 내게 하는 것이 좋은 방식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음식값 낼 돈만 있으면 부담 없이 모임에 나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연락이 끊기는 친구도 생긴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가버린 뒤 수년간 접촉을 끊으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런 친구를 ‘돌아온 탕자’라고 부른다. 탕자들을 위해 우리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기수가 10기이고 13반 모임이라서 매년 10월13일 저녁 7시에 교문 앞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요일불문, 일기불문, 연락불문이 원칙이다. 한마디로,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날은 교문 앞에 가면 동기생을 만날 수 있게 해놓았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친구들이 그리우면 그날 그 시간에 교문 앞에서 보고픈 얼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세심히 정성껏 키워온 반창회에서 지난해에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저 만나 얼굴이나 보고 웃고 떠들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 좀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모교의 교장선생님께 문의한 결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이 1만원씩만 매달 모아 200만원의 장학금을 만들어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 금액이 요즘 고등학생 한 명의 1년치 등록금이란다.

그 정도라면 20여 명이 모이는 우리 반창회가 부담 없이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모금이 시작됐다. 통장번호를 알려주고, 기한을 정해 형편껏 돈을 보내라고 모두에게 통지해놓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을 수가 없는가보다. 지난 송년회 때 이런 취지를 알려주며 통장번호 적은 종이를 배포했는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이 내 눈 앞에서 그 종이를 구겨버린 거였다. 친구들의 만류로 상황을 잘 넘겼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이런 꼴을 당한다는 회의가 들었다.



“야,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고정욱

196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문학)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 ‘선험’으로 등단

평화방송 ‘함께 가는 길’ 진행, KBS 라디오 ‘고정욱의 책 읽어주는 남자’ 진행, 성균관대 국문과 강사

現 소설가, 동화작가

저서 : 소설 ‘내 마음 속의 인민군 장교’ ‘그대 고운 두 발’, 창작동화 ‘은비네 시골일기’ ‘괜찮아’ 등


아무튼 그리하여 장학금을 모았는데 조용히 소리 없이 전달하자는 여론에 따라 모교 통장으로 입금하고 말았다. 물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모금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치하하시는 통에 보람도 느꼈다.

얼마 전 자연산만 취급한다는 횟집으로 한 동창생이 나를 초대했다. 안내문을 구긴 녀석에게 아직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나에게 녀석은 이런 말을 했다.

“야야, 그 녀석 너무 미워하지 마라. 우리가 늙으면 그런 녀석도 불러다 최소한 같이 놀 수는 있잖냐?”

그렇다. 그 말이 내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그저 늙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때 최소한 함께 놀 수 있는 존재면 되지 않는가.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신동아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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