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이 오산학교 교원시절 스승으로 모신 3인. 왼쪽부터 이승훈, 조만식, 안창호.
요컨대 함석헌은 역사적 예수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의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 예수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자신의 영혼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 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며 도덕적으로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곧 죄성(罪性)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함석헌은 이렇게 판단한 것이다.
1923년 9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일대에 대지진(大震災)이 일어나 함석헌은 연옥과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그 하룻밤의 무서운 경험보다 더 무서운 충격은 조선인 학살사건이었다. 함석헌은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원흉은 국가주의라고 보았다. “국가란 이름 아래 나라를 도둑질해 가지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 그것이 제 권좌를 뺏길까봐 한 흉계가 조선인 학살이다…이 점에서…다 같이 반성할 것은…이 원흉(국가주의)을 잡아내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함석헌은 관동대지진의 제단에서 피를 한데 섞은 일본의 씨과 한국의 씨이 이 역사의 원흉·잔당을 잡아내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분이로구나’ 싶은 세 스승
3·1운동, 오산학교에서의 학생시절, 관동대지진, 그리고 우치무라와의 만남을 잇따라 경험하는 가운데 함석헌은 한평생을 통해 놓지 않은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을 견지했다. 민족·신앙·과학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석헌에게는 실제생활과 사상체계에서 아무런 충돌이나 모순 없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었다. 20세기의 우리 역사가 워낙 굴곡과 풍파가 심해 이 세 가지를 지닌 채 흔들림 없이 살다 간 인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함석헌은 30대에 이미 세 가지를 융합해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살았다.
한때 평안도에서는 어떤 일을 벌여 맹렬히 해나가는 것을 일컬어 “다북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홍경래가 민중을 동원해 썩어빠진 조선왕조를 허물어버리고 새 나라를 세우려 야망을 품은 곳이 다북동인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홍경래는 실패했다. 홍경래는 혁명의 껍데기를 세우고 지펴야 할 불의 장작을 준비했을 뿐, 민중의 가슴속에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깊은 사상과 높은 도덕적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함석헌은 모교인 오산학교 교원으로 가게 됐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저분이로구나’ 하는 스승을 셋이나 만났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이 바로 그들이다.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 않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정신적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는 부싯돌 같은 이들이었다. 함석헌은 톨스토이와 간디를 존경했지만, 도산·남강·고당은 살아 있는 사람의 체취와 목소리를 접하는 가운데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겨울이 만일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의 마지막 연(聯)이다. 이 시는 함석헌을 이해하는 관건의 하나다.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일본의 한 젊은 경제학자가 함석헌에게 소개한 셸리의 시는 일생을 통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좌우명이 됐다. 셸리는 함석헌이 몇 번이고 엎어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위로요 길동무며 ‘빈 들의 소리’였다. 함석헌의 ‘기다림의 철학’은 바로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