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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③ 화식열전

피죽도 못 먹으면서 仁義만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③ 화식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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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어느 때보다 ‘부자 되는 법’에 솔깃해지는 시기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富)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부를 축적한 자는 예외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물질을 좇기보다 명분을 추구한 선비들의 삶을 높이 산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은 부자와 돈벌이 얘기다.
③ 화식열전
나는 우울할 때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곤 한다. 온갖 사고로 실려 들어오는 위급한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건강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알게 된다. 그 순간 매우 겸손해진다. 가끔은 산엘 오른다. 북한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청와대를 비롯한 모든 건물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건물주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산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다. 마음에 드는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의 일부인 내가 바로 그 숲의 주인이다. 항상 다녀갈 수 있으므로 건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기쁨이 더 크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또 한 곳, 동대문 새벽시장이다. 동대문 새벽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북적인다. 주 고객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대형 쇼핑센터에서 조금 떨어져 그 풍경을 바라본다. 밤새 산 물건들을 대형 가방에 담고, 춘천 대구 청주 같은 지역명을 표시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사람은 돈을 향해 모여든다. 이것은 매우 화려하고도 단순한 삶의 이치다.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꿈틀거린다. 서로 적당한 가격에 사고파는 에너지의 근본은 바로 생명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습은 경건하며 상인들이 사들인 옷처럼 아름답다.

새벽시장에서 구입한 의류를 자신의 가게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이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새벽 내내 분주히 움직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화식(貨殖)이다. 화는 재산이고 식은 불어난다는 뜻이니, 사마천의 ‘화식열전’은 재산을 불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마천은 춘추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화식열전’은 말하자면, 한 시절을 풍미한 장사꾼과 기업인 열전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는 공자의 뜻을 받들어 공부하는 선비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였다. 농사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경건한 노동으로 여겨진 반면, 상업을 하는 장사꾼은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당시 세태였다. 상업은 천한 일로 여겨졌으며, 학문하는 사람이 돈을 밝히는 것도 추하게 비쳐졌다.



③ 화식열전

1970년대 중반 현대정공을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과 정주영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러나 사마천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마천은 부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중농억상(重農抑商)’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경제적인 논리를 폈다. 부자의 미덕에 대해, 그리고 돈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한국의 경제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보다 돈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경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공(功)과 과(過)는 있는 법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으나, 부하 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온 나라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중국 경제를 후퇴시켰던 마오쩌둥에 대해 훗날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의 과실을 모두 마오쩌둥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마오쩌둥을 평가해야 한다. 공은 우선이고 과오는 둘째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올바른 사상을 계승해야 하고,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은 ‘국가 경제발전’이다. 과오는 마오쩌둥과 같은 권력 집착이었다. 하여간 1975년 여름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러,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라. 만약 임자도 못 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는 정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에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어하는데도 너무 더운 지역이라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어 한국에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정부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2주 만에 돌아와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은 바로 중동행(行) 비행기를 탔다. 5일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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