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해럴드 래미스(Harold Ramis) 감독의 1993년 작품이다. 원 제목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로는 의미 전달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꽤 그럴듯한 우리말 제목이 붙은 채 소개됐다. 1980년대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빌 머레이와 로맨틱 코미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앤디 맥도웰이 주인공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영화로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년 2월2일 겨울의 끝에서 봄이 언제 올지를 점치는 날로 알려져 있다. 이날의 유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기리는 가톨릭 축일 중에 ‘성촉일(Candlemas)’이라는 촛불행사가 있다. 성모마리아가 순결하다는 표시와 함께 그녀를 기리는 촛불 행렬이 이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날 그라운드호그(설치류)의 일종인 고슴도치나 오소리가 땅굴 위로 나오면 곧 봄이 오지만, 그라운드호그가 땅속에서 나왔다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겨울이 6주 더 남은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이런 다소 황당한 믿음은 천성적으로 경계심이 많은 동물들이 자기 그림자에 놀라 숨는다는 이야기와 절묘하게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아무튼 그러한 풍습을 가진 독일 이민자들이 18,19세기경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정착할 때 그 믿음을 고스란히 가져왔고, 다만 이 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큰 다람쥐처럼 생긴 우드척(Woodchuck·Groundhog)이 유럽산 고슴도치를 대신하게 됐다. 이 풍습은 양력으로 3월 초·중순경, 개구리가 땅 밑에서 나온다는 우리의 경칩(驚蟄)과 비록 시기는 맞지 않지만 개념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1886년 2월2일 펜실베이니아의 펑추토니(Punxsutawney)라는 작은 마을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기념했다고 인터넷 백과사전은 소개하고 있다(반면 영화에서는 필 일행이 처음 마을로 들어갈 때 보이는 입간판에 1887년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행사가 열리면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고,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내일이 없는 환자에게 “내일 또 오라”
영화는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한 피츠버그 소재 텔레비전 방송국 기상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레이 분)가 프로듀서인 리타(앤디 맥도웰 분),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그라운드호그 데이 취재차 펑추토니 마을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취재 첫날 아침 6시 필은 호텔의 알람시계 음악에 맞춰 잠을 깬다. 얄팍한 스타의식에 휩싸여 잔뜩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하루가 펼쳐진다.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보험판매원으로 일하는 전혀 반갑지 않은 고교동창을 만나 지겨운 대화를 나누고, 이를 모면하고자 급히 길을 재촉하다 얼음구덩이에 발을 빠뜨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