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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지성

“한국 사회 이슈를 공론화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채널A 특강 지상중계

  • 신성미│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avoring@donga.com

“한국 사회 이슈를 공론화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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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의 해법

샌델 교수는 “여러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며 질문을 했다. “100억 원의 예산을 집행할 수 있다면 이를 노령연금 확충에 쓰는 것이 옳을까요, 대학등록금을 반값으로 줄이는 데 쓰는 것이 옳을까요? 결정하기 좀 어렵지만 각각 손 들어주시겠어요?” 방청객과 시민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한 방청객은 “대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돈을 벌 수 있지만 퇴직자나 고령자가 되면 사회적으로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다”라며 노인을 부양하는 데 예산을 써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때 창밖에서 녹화를 지켜보던 한 청소년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여학생은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을 “중학교 3학년 열여섯 살 오예슬”이라고 소개한 뒤 “노년층을 부양할 젊은 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대학등록금을 줄여 젊은이들에게 더 큰 교육 혜택을 주면 나중에 이들이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어 노년층을 부양할 수 있다”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이 여학생에게 샌델 교수는 “정말 열여섯 살이 맞느냐”며 놀라워했고 녹화장 분위기는 한층 편안해졌다.

특히 샌델 교수가 “모든 대학생의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는 방안과 빈곤층 대학생에게만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 중 어떤 것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서 젊은 방청객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놨다. “빈곤층 대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준다면 걱정 없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게 돼 최상의 성과를 낼 것이다.” “장학금 혜택이 일부에게만 돌아가면 연대감이 저하돼 사회적 의무 이행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엔 예산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빈곤층에게만 장학금을 지원함으로써 격차를 줄이고 기회의 평등을 유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복지는 모두가 가져가는 선물 보따리가 아니다.”

최근 대기업슈퍼마켓(SSM)의 구멍가게 잠식, 재벌 2,3세들의 빵집 경영으로 인한 영세상인의 피해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및 영세상인의 상생에 대한 쟁점이 불거지는 가운데 이와 관련한 토론도 이어졌다. 샌델 교수가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세계화된 무한경쟁의 시대에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 살아남으려면 협력업체인 중소기업들로부터 최대한 유리한 납품 가격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반면 대기업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발휘해 납품업체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요. 어떤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시나요?”



홍권희 논설위원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어느 혼자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들의 상생과 관련한 미해결 문제를 사회적으로 함께 고쳐 나가보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만흠 원장은 “우리 헌법에는 경제 주체들의 조화를 위해 정부가 개입해서 규제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써 있다. 현 정부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이들의 상생 문제를 시장경제에만 맡기기보다는 정부가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반면 강석훈 교수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납품 단가를 낮추라고 하는 것은 아주 정당하다. 납품단가를 낮춰 발생하는 경쟁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발전하면 그 발전의 여력으로 중소기업들도 발전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정의를 기반으로 논의해야

이후 토론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정부가 규제하는 문제로까지 번졌다. 샌델 교수는 모든 의견을 청취한 뒤 “엄청난 시장지배력을 가진 대기업도 있고 그렇지 못한 회사도 있다. 이는 시장경제체제 아래서는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토론을 활발히 벌일 수 있었던 건 우리 모두 시장만이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벌어진 결과에 대해 정의의 원칙을 기반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러한 공론은 당장 보편적인 합의나 해결책을 도출하진 못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 함께 상호존중하면서 서로 의견을 경청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고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오픈 스튜디오가 이끈 ‘살아 있는 아테네 학당’

“한국 사회 이슈를 공론화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

샌델 교수가 방청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녹화가 끝나자 방청객들은 각자 준비해온 샌델 교수의 저서를 들고 샌델 교수에게 다가가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았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표정은 마치 스타를 만난 팬의 모습 같았다. 방청객 오한솔(23·대학생) 씨는 “평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세계적 석학과 함께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가져서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튜디오 밖에서 녹화를 지켜본 청중도 꽤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김원상(23·대학생) 씨는 “샌델 교수의 하버드대 강의 동영상을 보고 직접 강의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밖에서도 방청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며 “교수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강의가 아니라 패널 및 방청객과 소통하며 다양한 의견을 듣는 모습이 신선했다”고 말했다. 신재섭(26·대학원생) 씨는 “지나가다 우연히 토론을 구경했는데 오픈 스튜디오로 누구나 강의를 듣게 하고 밖의 시민들에게도 발언권을 주는 형식은 지금까지 국내 방송에선 보기 힘들었던 신선한 시도”라고 말했다.

이날 채널A의 오픈 스튜디오와 주변 청계광장 일대는 남녀노소가 정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살아 있는 아테네 학당’이었다. 채널A는 이날 녹화된 공개 특강을 1월 20일 오후 8시 50분부터 방송했다. 이날 방송은 채널A 홈페이지(http://tv.ichannela.com/culture/justice)를 통해 다시보기가 가능하다.

샌델이 남긴 건 정의가 아니다

이날 녹화 현장에서 샌델 교수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뭐죠?” 샌델 교수가 방청객들과 스튜디오 밖 시민들에게 의견을 구하면서 일일이 이름을 물어본 것이다.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이름을 밝히는 것은 토론의 기초이자 예절이다. 하지만 강연자와 쌍방향 토론을 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 청중은 의견을 말한 뒤 샌델 교수가 이름을 묻고 나서야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이름을 밝혔다. 그때마다 샌델 교수는 청중이 말해준 이름을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부르며 존중을 표현하고 상대와 눈을 맞추며 자연스러운 소통을 이끌었다. 이날 샌델 교수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바로 ‘What's your name(이름이 뭡니까)’과 ‘Raise your hand(손들어보세요)’였다.

이는 하버드대 명강의로 꼽히는 그의 ‘정의’ 수업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정의’는 1000여 명이 듣는 대형 강의지만 토론식 진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수업은 정의에 관한 학자들의 이론을 주입하거나 샌델 교수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다양한 상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묻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학생들 스스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정의에 대해 사고하게 만든다. 지난해 1월 EBS에서 샌델 교수의 강의 동영상을 ‘하버드 특강-정의’라는 제목으로 12회에 걸쳐 방영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채널A가 방영한 강연에서도 샌델 교수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지 않았다. 묻고 또 물으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회 현안과 그 바탕에 깔린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방청객들은 토론에 자유롭게 참여할 것이라는 사전 공지를 받지 못했기에 처음엔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기존에 한국에서 방영된 강연 프로그램들은 강사가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이 대부분이었고 토론 프로그램 역시 사회자와 소수의 토론자끼리 토론을 이끌어가는 형식이 주를 이뤄 샌델 교수의 강연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색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소수정예 수업에서조차 토론식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국내 대학 강의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샌델 교수가 토론에 불을 지피면서 방청객들은 점차 열기를 띠어갔다.

주로 20대인 방청객들은 녹화가 끝난 뒤 제작진에게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샌델 교수가 내 의견을 경청해줘서 참 고마웠다” “딱딱할 수 있는 주제들인데도 2시간 반이 후딱 지나갔다” “한 공간에서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의견을 들으니 집중도 잘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신나했다. 방청객들의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호응은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 딱딱해 보이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인문서 단행본 가운데 이례적으로 110만 부 이상 팔린 것도 그의 토론식 강의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는 방대한 철학 지식도,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의(定義)도 나와 있지 않다. 강의와 마찬가지로 책에서도 그는 독자로 하여금 다각도로 사고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이끄는 항해사 역할만을 했다. 그의 인도대로 주체적인 지적 유희에 빨려들어간 독자들이 이례적인 밀리언셀러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4월 말에는 샌델 교수의 새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간될 예정이다.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주요 주제들을 이어서 논의하되 시장과 돈에 관한 내용을 확대해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동아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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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미│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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