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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⑦

한산모시 짜기 장인 방연옥

“찜통 같은 열기 속에서 태어나는 시원함이 모시의 매력이죠”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한산모시 짜기 장인 방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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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해진다”는 예언대로

한산모시 짜기 장인 방연옥


그는 초등학교도 채 못 마쳤다. 4학년을 마치고 나자 더는 학교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어머니와 언니가 책보를 허리에 묶어주며 학교 가라고 등 떠밀어도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야단을 맞아가며 집에 남아 모시 일을 했다. 여자는 학교에 잘 안 보내던 그 시절, 그의 집에서 막내딸을 학교에 보내려고 그토록 애를 쓴 것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기도 하지만 어쩌면 ‘예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날 어머니와 바깥에서 모시를 삼고 있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저를 유심히 보더니 ‘애기가 크면 이름이 나겠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저는 ‘이름날 일이 뭐가 있나? 달리기를 말하나?’ 하고 의아해했지요. 제가 어릴 때 달리기를 잘했거든요. 어머니는 ‘달리기는 뒷받침할 수도 없는데…’라며 걱정하셨어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달리기든 뭐든 이름이 날 테니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그 예언을 한 아주머니가 누구였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예언은 20년도 더 지나 실현되었으니 먼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꽤나 용한 점쟁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까지 여느 집 처자와 마찬가지로 집안일과 모시 일을 거들어온 그에게 유명해지는 것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위로 언니 다섯은 모두 베틀에서 직접 짰는데 저는 모시 째기와 삼기, 날기(날실을 옷감 한 필 분량으로 나누는 일)만 주로 했습니다. 그 다음 과정부터 베틀에서 짜는 과정은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으셨어요. 힘든 일이니까 딸이 고생할까봐 안 가르쳐주신 거예요.”

그런데 정작 모시 짜기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직접 모시를 짰던 언니들이 아니라 모시 짜기는 배우지도 못했던 막내였으니, 사람에게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에 혼례를 치렀다. 시집은 그의 마을 지산에서 바로 고개 한 등만 넘으면 나오는 한산. 서천군 일대는 모두 모시풀을 심고 모시를 생산해내지만 역시 모시의 본고장은 한산이었으니, 이 또한 그의 인생에 예정돼 있었던 모양이다.

한산으로 시집와 문화재 문정옥 선생을 만나다

“당시 한산모시 짜기 중요무형문화재였던 문정옥 선생님이 같은 마을에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지만 마을을 오가며 어르신이 마당에서 모시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오다가다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도와드리기도 했지요.”

한산모시 짜기는 1967년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가 되었는데, 그 첫 기능보유자가 문정옥(84)이었다. 방연옥은 아무런 의도도 하지 않았건만 바로 그 문화재 장인과 인연을 맺게 됐으니, 과연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하루, 문 선생은 그에게 “전수학생으로 붙여줄 터이니, 한번 해볼란가?” 하고 물었다. 그때 방연옥의 나이는 서른여섯. 아이가 셋이었고 막내는 겨우 세 살로,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한 때였다.

“집안일에 어린 것이 있으니 선뜻 마음 내기가 힘들더라고요. 집에 와 남편에게 말하자 ‘문화재 선생님인데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1980년에 전수학생으로 등록해 일주일에 사흘씩 선생님께 배우러 다녔지요.”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한창 말썽 피울 나이였건만 아들은 ‘심사를 피우지 않고’ 얌전하게 굴어 배우는 일은 순조로웠다. 문정옥 선생은 평소 방연옥이 문 선생 집을 드나들며 구경하면서 모시 일을 도와주는 솜씨를 보고 ‘이 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해 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과연 문선생의 판단은 옳았다.

“모시를 째고 삼는 일은 처녀 적에 죽 해온 일이라 어려울 게 없었지만, 풀 먹이는 ‘매기’와 짜기를 정식으로 배우자니 여간 어렵고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왜 제게 이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알겠더군요.”

처녀 시절 내내 어머니와 언니가 매고 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거들어왔는데도 그는 문 선생에게 배우는 동안 야단도 많이 맞고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혼이 나야 정신 차리는 법”이라며 “힘들어도 재미는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방연옥이 문 선생 밑에서 배운 지 3년째 되는 해, 문 선생이 고혈압으로 덜컥 쓰러지고 말았다. 문 선생은 몸은 움직이기 힘들어졌지만 정신은 온전해 방연옥은 혼자 연습하면서 궁금한 점은 스승에게 물어가면서 베 짜기를 계속해나갔다. 1986년 이수자가 되었고, 이듬해 전수조교를 거쳐 드디어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를 이어받았고 문 선생은 명예 보유자가 되었다.

모시 한 필 째는 데 들어가는 침이 석 되

모시는 다년생 쐐기풀인 모시풀의 줄기를 말려 실로 만든다. 칼슘이 우유의 몇 십 배에다 식이섬유도 많아 살 빼는 데 효과적이라는 모시풀 잎은 차를 내려 마시거나 떡에 넣으면 쑥색이 나온다.

“모시풀은 1년에 세 번 수확합니다. 초수(初收)는 6월 20일경, 이수는 8월 말, 삼수는 10월 초에 합니다. 모시풀은 오래 살지만, 겨울에 조금만 추워도 뿌리가 얼어 죽으니 꼭 양지에 심고 겨울에는 짚으로 잘 덮어줘야 해요.”

차가운 촉감의 모시를 내는 모시풀은 이렇듯 추위에 약하다. 2010년 기와와 초가로 잘 꾸며 문을 연 한산모시관 앞에는 모시밭이 있다. 모시풀 이파리는 녹색이지만 아래쪽은 햇볕이 반사되면 하얗게 보인다. 이 이파리를 모시칼로 훑어내고 줄기의 겉껍질을 벗겨내면 속살이 나오는데, 이 속살이 태모시의 재료가 된다. 이 푸른 속대를 중간중간 서너 번씩 물에 담가가며 볕에 한 열흘 말리면(바래기) 푸른 물이 빠지고 하얀 껍질만 남은 태모시가 된다.

“언젠가 일본에 갔더니 그쪽 모시풀 잎사귀는 위아래가 모두 파래요. 또 우리처럼 바래기를 하지 않고 수확하자마자 줄기를 짓이겨 푸른 물을 빼 즉석에서 하얗게 만들더군요. 그이들은 참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하얗게 바랜 태모시를 째어 실로 만드는 과정도 그렇다. 일본 모시는 말리는 과정이 없으므로 그냥 손으로 줄기를 쨀 수 있지만, 우리 태모시는 마른 것이기 때문에 물에 미리 담갔다 입으로 침까지 묻혀가며 이와 입술, 혓바닥을 다 동원해 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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