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규칙대로 뒷문으로 내리려고 하는데 나이가 든 운전기사가 거친 말투로 “앞문으로 내리세요!”라고 했다. 정해진 운행 시간에 쫓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운전기사는 승객이 뒷문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기 때문에 그냥 앞문으로 내리라고 말한 모양이다. 젊은 여성이 다소 기분 나쁘다는 듯이 “뒤로 내려도 상관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목소리를 높여 “나는 문제가 돼요!”라고 무섭게 되받아쳤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여성은 겁먹은 듯한 표정과 불쾌한 표정을 교차시키며 운전기사가 명령하는 대로 서둘러 앞문으로 내렸다.
파리에서라면 운전기사가 나이가 좀 들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에게 그렇게 거칠게 대하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더구나 승객이 뒷문으로 내린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다시 목소리를 높여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파리의 젊은 여성 같았으면 운전기사와 대판 말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끌었을 것이고 원래 자기가 하려고 했던 대로 기어이 뒷문으로 내렸을 것이다.
풍경 #21 음식점 인심
파주에 도착해서 출판사 사람들과 파리에서 집필한 나의 원고 출판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옆 테이블에서는 네 명의 남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금방 음식이 차려진 상이었다. 그때 그 가운데 한 남성이 주인아주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떡갈비가 타서 나왔어!”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지체 없이 달려와 사과를 하고 다시 구워 주겠다고 했다. 남자 손님은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달려가서 묵무침 한 접시를 서비스로 가져다준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남자가 계산대로 가니까 아주머니는 떡갈비 값은 계산에서 제외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남자들은 단골손님이었던 듯하다. 그래도 음식이 다소 잘못 나왔다고 돈을 받지 않는 경우는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파리의 식당에서 만약 태운 음식을 내놓았다면 그 음식을 다시 해주는 한이 있어도 다른 음식을 서비스로 제공하거나 음식 값을 안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파리 사람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그렇게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옛말에도 지나친 공손함은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라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아무튼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얼른 기지를 발휘해 서비스 음식을 제공하는 기동성은 한국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풍경 #22 운수와 팔자
현진건의 작품 가운데 ‘운수좋은 날’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일이다. 이삿짐센터의 요금이 날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운수가 좋은 길일(吉日)이 미리 정해져 있는데, 그런 날의 이사비용은 다른 날보다 20~30% 비싸다. 파리 사람들은 평일보다 주말이 더 비싸다면 이해하겠지만 주중인데도 길일이라고 더 비싸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단지 미신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우리의 전통이라고 보아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농촌사회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구세대들만 운수 좋은 날을 따지는 게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온갖 새로운 정보에 접하는 신세대들도 운세를 따진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 의류 상가, 대학로와 홍대 앞, 종로 일대에는 간이 포장을 치고 점을 보는 점집이 수두룩하다. 젊은이들은 재미로, 아니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기에 들어간다. 취업과 사랑에 대한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점쟁이에게 생년월일시를 말해주고 점쟁이의 예언을 진지하게 경청한다.
2002년 파리로 떠나기 전에 동료들과 함께 재미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쌀점을 보는 신기 들린 젊은 무속인은 나를 보고 “이제 고생 다 끝나고, 물고기가 바다로 향하는 형국이다”라고 말했다. 파리로 가서 10년 동안 살다온 게 바다로 나갔다 온 건지도 모르겠다. 파리 생활 10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를 보고 파리에서 ‘널널하게’ 지내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팔자 늘어지는’ 생활을 하다 돌아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먼 바다를 떠나 편안한 뭍으로 올라온 형국이란 말인가?
풍경 #23 계약보다는 인정
서울에선 가끔 가격 흥정을 하게 된다. 지난번 이사할 때 이삿짐센터의 용역비만이 아니라 아파트에 와서 청소며 여러 가지를 도와줄 아주머니들의 용역비도 흥정해야 했다. 몇 군데 전화로 가격을 알아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와 계약을 했다. 물론 구두 계약이다. 이삿짐센터에서는 용달차 두 대가 왔는데 이삿짐을 다 내려놓고 나서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며 가격을 조금 더 생각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원래 정한 가격에 얼마를 더 얹어주었다. 일단 가격을 싸게 불러서 고객을 잡아놓고 나서 나중에 얼마를 더 요구해 결국은 다른 업체와 같은 가격을 받아가는 전략 같았다.
청소를 하기 위해 부른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해서 느긋하게 일하다가 계약한 근로 시간이 반쯤 지나자 커피를 한잔 타 마셨다. 그러고는 그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는데, 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더욱 열심히 했다. 그러고 나서는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아파트가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들어서 좋다”라든지 “오래된 아파트지만 위치가 좋다” 등의 말을 하면서 주인의 기분을 좋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일을 마치고 갈 때쯤 되자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고 말하며 인정에 호소하는 데야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 더 낫게 사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 처지를 생각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약해져 하는 수 없이 계약한 금액보다 얼마를 더 얹어주었다. 아주머니는 만족한 표정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고 떠난다. “부자 되세요!”
풍경 #24 일상의 예절
서울과 파리의 일상 예절은 다르다. 예절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다.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기도 하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등의 간단한 표현은 일상의 예절에서 흔히 쓰이는 말들이다. 파리에서 살면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미안합니다”라는 뜻의 파르동(pardon)과 “감사합니다”에 해당하는 메르시(merci), “괜찮으시다면”이라는 뜻에 가까운 실부플레(S‘il vous plait) 등이다. 남과 부딪치거나 버스에서 내릴 때 앞 사람에게 ‘파르동’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이 자리를 내어주면 메르시라고 한다. 카페나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면 실부플레를 외친다.
파리 사람들이 그런 일상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정에서 부모에게 교육받지 못한 걸까. 가정에서 그런 예절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면 ‘일상의 예절 지키기 시민운동’이라도 필요한 것 아닐까.
서울과 파리의 일상 예절에서 눈에 띄게 다른 풍경은 출입문과 관련돼 있다. 파리에서는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게 기본 예의다. 아파트 현관의 대문이나 학교 강의실의 출입문이나, 지하철의 유리문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뒷사람을 위한 배려가 없다. 자기만 들어가면 그만이다. 문은 각자 자기가 열고 들어간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술자리에서는 술잔을 돌리면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냉정하다. 그러나 카페에서 혼자 맥주를 따라 마시기를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문을 잡고 기다려준다. 예의와 예절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필요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일생에 그저 한번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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