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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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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온 육혈포 사나이

김구 선생(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여러 독립운동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월이 오면

담 넘기는 딱 좋은 밤이다.

저만치 뿌연 가스등 불빛 아래 길목을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별 어려움 없이 피해 문무술(文武術)은 대문 옆 행랑채를 끼고 있는 담장을 올랐다. 관철동의 요지를 차지한 저택의 규모가 집 주인의 신분을 짐작게 한다. 잠시 기척을 살핀 뒤 촉촉한 흙 마당에 살짝 내려섰다.

원산(元山)에서 상경한 지 얼마 안 되는 문무술은 이 집 주인을 만나러 일요일의 달빛 흐린 야밤을 골라 찾아왔다. 좀 특이한 이름의 문무술이 학식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육혈포(六穴砲)라 불리는 6발 권총을 차고 장안의 갑부 집을 내방했다.

주인 차상건(車相健)은 집에 없었다. 대부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일요일 밤에도 집을 비울 만큼 바쁜 줄은 미처 몰랐다. 밤의 방문객은 사랑채에서 담소 중이던 두 남자에게 육혈포를 겨누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얻으러 차상건의 이름을 듣고 찾아왔소.

그는 자신을 상해(上海)의 가정부원(假政府員)이라고 소개했다.

“차 사장은 장춘관에 가고 안 계십니다.”

장춘관(長春館)은 돈의동에 있는 장안의 손꼽는 요리점이다. 인사동의 명월관 지점(明月館 支店)으로부터 명의사용을 허가받아 명월관 분점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월관 본점은 없다. 불타 사라진 지 10년도 넘었다. 하지만 명월관이라는 이름은 그 무게 때문에 여태껏 상호로 살아 있다.

―당신들은 누구요.

“차 사장과 함께 무역상을 하는 동업자올시다.”

차상건은 남대문 안 남미창정(南米倉町)에 동광상회라고 하는 무역상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신탁업과 호텔사업으로 확장 중이다. 두 달 뒤 4월 상순에 자본금 50만 원의 중앙신탁을 남대문 밖에 개업하게 된다. 그리고 4월 하순에는 종로1정목 재판소 옆 대로변에 서울호텔을 오픈할 것이다. 그 창립총회가 이달 2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 7시 명월관 지점에 예약돼 있다. 너무 일이 많아 휴일이 따로 없다. 4월이 오면 언론의 자유와 함께 사업의 자유도 한껏 숨통이 풀릴 분위기다. 4월 1일부로 회사령이 폐지되면 10년 동안의 회사 설립 규제가 풀리게 된다. 회사가 봇물을 이룰 것이다. 자본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시대란 무엇이냐.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자본론’을 안 읽어보았지만 그 정도는 안다. 쉬운 일본말로 번역되어 있는 자본론도 안 읽어보고 사회주의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요새 부쩍 많아졌다. 비록 전후 공황(戰後恐慌)의 그림자가 먹구름처럼 끼어 있다지만 소나기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시간은 금이다. 차상건의 꿈은 원대하다.

―돈을 안 내면 총살하겠다.

“우리는 이 집에 잠시 체류하는 사람입니다.”

두 실업가는 묵직한 육혈포를 든 33세의 실업자에게 떠는 손으로 명함을 꺼내 보였다. 말로만 듣던 임시정부 특파원이 바로 이것인가 하는 호기심과 의구심과 낭패감이 표정에 교차했다. 나라가 망했다는 지난 10년 이런 곤욕을 당해본 적은 없다.

집 밖을 조금만 나서면 바로 종로 2정목 네거리다. 거기서 빤히 바라다뵈는 파고다공원 정문 옆 경찰파출소는 큰 소리 한 번만 질러도 무장 경관이 달려올 거리다. 조금 더 가 종로 3정목 네거리 단성사 맞은편의 장춘관은 여기서 500m도 못 되는 거리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무술은 행랑채 앞을 서성대던 하인을 불러 대문을 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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