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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부자가 되고 못 되고 상속에 달려있어

  •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부자가 되고 못 되고 상속에 달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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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능과 성실이 부자를 만들까? 운만 닿으면 누구라도 졸지에 큰 부를 거머쥘 수 있을까? 단언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부자가 되고 못 되고를 결정하는 것은 상속일 것이다. 오랜 기간 이어진 ‘금수저’의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실로 새로운 현상이다.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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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영어에도 ‘재산’을 뜻하는 ‘fortune’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 본래의 뜻이 ‘운수’다. 재수가 좋으면 부자가 된다는 믿음은 서양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타고난 운명이 어떤지 알고 싶어 한다. 서양에서 점성술이 유행하고, 동양에서 명리학이 인기를 얻은 배경이다. 세상 어디서나 관상술과 수상술이 민간에 널리 퍼진 것도 마찬가지다. ‘운만 있으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아마 지금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운이 좋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부자 될 ‘운수’

한국과 중국 사회에서 사람의 운수를 거론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 선택하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한다는 믿음이 정말 널리 퍼져 있었다. 지금도 선거철이면 많은 정치가가 길지(吉地)에 대한 바람 때문에 조상의 묘를 이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도 도선대사가 점지한 길지 덕분에 왕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조선 후기에 벌어진 소송사건의 대다수는 바로 조상의 산소를 둘러싼 ‘산송(山訟)’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온 민담을 읽어보면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는 행운의 주인공이 상당수 등장한다. 그들은 남달리 꾀가 많거나 바보 같지만 어딘가 비범한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가난해도 마음씨만큼은 착한 이들이다. 그들은 길을 가다 갑자기 황금 덩어리를 줍기도 하고, 도깨비나 귀신의 도움으로 큰 재산을 얻는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민중의 소망이 투영된 이야기들이다. 실제로 그런 행운을 손에 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양 민담에도 운이 좋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다른 행운담의 주인공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그들은 오랜 고난을 참고 견디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부자가 된다. 조선 후기 한문 단편소설에 보면 평생 하루 한 끼만 먹고 일했다는 부부가 나온다. 그들은 곡식을 아끼려고 날마다 죽으로 연명하며 아등바등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일종의 ‘자린고비’ 이야기다. 



그런데 말이다. 그처럼 극도로 아끼고 절약하다가는 영양실조에 걸려 일찌감치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물론 현실 속에서도 비상한 각오로 노력한 데다가 운도 따라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한들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도시’에 산다

16세기 서양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들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누비며 아메리카의 은과 아시아의 향신료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17세기가 되자 네덜란드와 영국도 국제교역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중국의 차와 청화백자, 인도의 면직물 등도 교역 상품에 추가했다. 원거리 교역이 호황을 누리자 유럽 여러 나라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왕실과 귀족, 선주와 투자자는 물론이요, 못 배우고 가난한 선원 중에도 행운을 거머쥔 이가 여럿이었다. 

교역의 규모가 점점 커졌고, 향신료의 집산지인 인도의 무굴제국도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역시 수출을 통해 많은 이익을 챙겼다. 특히 중국 광저우의 극소수 공행(公行), 즉 특허상인들은 폭리를 취했다. 그들 중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세계 굴지의 갑부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의 상인들도 교역으로 많은 재물을 모았다. 

국제교역이 수세기 동안 이어지자 동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도시가 전례 없이 활기를 띠었다. 왕실과 귀족층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상인과 수공업자들 가운데서도 행운을 잡은 이가 많았다.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년경~1596) 경은 젊은 시절 한낱 해적에 불과했으나 큰 재산과 명예를 얻었고, 나중에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하사받았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바다로 떠나갔다. 18세기 한국에도 ‘돈이면 귀신도 움직인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는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주민 중에는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과장은 금물이다. 도시로 몰려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패의 늪에 빠졌다. 그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생계를 근근이 잇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이주민의 발길은 멈추지 않아 도시는 팽창을 거듭했다. 1600년부터 1800년까지 200년 동안 영국의 도시 인구는 2배 넘게 증가했다. 특히 1750년 이후 그 증가 추세가 더욱 가팔라졌다. 산업혁명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중심지 런던의 인구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다. 1600년 20만 명에서 1700년에는 57만 명으로, 1800년에는 86만 명으로 불어났다. 

산업화의 물결에 아직 합류하지 못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사정이 좀 달랐다. 그럼에도 그들 국가에서도 도시화 비율은 꾸준히 높아졌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보면 1600년에는 도시화 비율이 7.4%였으나 100년 뒤 8.2%로 높아졌다. 1700년경에는 인구 10만을 돌파한 ‘대도시’가 10개를 넘어섰다. 이후 서유럽의 도시화는 비약적으로 진척돼 1890년에는 31%를 기록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도 도시화 비율이 상승 추세였다. 특히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 비율은 이미 10%를 넘어섰다. 같은 시기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서울(한양)을 제외하면 19세기 후반까지도 국제 수준의 대도시는 한 개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부농’은 없다?

도시의 팽창이 거듭되었으나 19세기 말까지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농촌에 살았다. 신석기시대에 농업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주된 작업장은 단연코 농촌이었다. 그럼 농촌에서는 누가 부자 노릇을 했을까? 농촌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운이 따라주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농촌에서도 도시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몇 해 동안 서양의 농업사 저작을 탐독했다. 그러나 서양농업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는 나의 기대를 꺾었다. 17~19세기 유럽 농촌에서는 새로운 지주층이 등장하지 않았다. 대지주의 농장은 물론 중소지주의 농토 역시 대대로 지주의 후손에게 상속됐다. 상업작물 또는 환금작물의 재배가 활발한 지역에서조차 신흥 지주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농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농촌에서 자수성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한 집안이 소유한 토지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는 일조차 드물었다. 유럽의 농촌 사회는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안정적이었다. 지주 가문에 태어나 상속자로 선택되는 행운을 얻었다면 모를까, 신흥 지주로 발돋움할 기회는 거의 봉쇄돼 있었다. 17~19세기 유럽 농촌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것은 ‘하강 이동’이었다. 상승 이동은 눈을 씻고 보아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한국의 농촌 사회는 사정이 달랐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소작인 또는 소농이, 이른바 ‘광작농민(廣作農民)’이 되어 넓은 땅을 경작했고 결국은 지주로 성장했다. 심지어 양반이 되는 경우도 많았단다.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설’을 뒷받침하는 이런 연구가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학계를 지배한다. 광작농민의 실체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없지 않으나, 아직도 광작농민의 전설이 정설로 통한다.

‘임대업자’ 꿈꾸는 요즘 어린이들

검인정 국사교과서와 한국사 수험서에는 조선 후기의 자수성가한 부농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요컨대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성이 크게 개선돼 농민의 계급분화가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자들이 출현해 결국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는 주장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주장을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 후기에 그처럼 눈부신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사실상 통설로 굳어져 있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첫째,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작물의 환금성이 개선되면 어느 계층에게 유리할까? 혜택은 일차적으로 지주의 몫이 될 것이 빤하지 않은가. 하필 조선 후기에는 빈농이나 소농이 그 혜택을 주로 누렸다고 볼 역사적 근거가 과연 있기는 한가? 

둘째, 17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양 사회에서는 농업의 상업화가 촉진되었다. 가내수공업 또한 괄목할 정도로 성장했다. 유럽만큼은 아니었으나, 중국과 일본의 농촌 사회에서도 유사한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농촌에 비해 훨씬 강도 높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국 및 서양에서는 농업 생산성과 상업화의 변화가 양극화를 초래했을 뿐 새로운 지주층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농촌의 경제적 발전은 농민의 신분 상승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에 비해 농촌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내 생각은 이렇다. 만약 조선 후기에 상당한 경제 발전이 일어났다면 그 일차적 수혜자는 상공업자를 비롯한 도시의 지배세력이었을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상업화 경향이 있었다면, 그 혜택은 당연히 지주층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도시를 지배하는 왕실, 귀족, 상인층에 비하면 이익의 몫이 적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 후기에 신흥 지주세력이 등장해 신분 상승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경제가 큰 폭으로 성장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한 개인이 부자가 되는 데 상속만큼 결정적인 요소는 없다. 한국 역사상 21세기처럼 경제활동의 기회와 종류가 다양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요즘처럼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자력으로 부자가 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한국 초등생들이 장래 직업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임대업자’를 첫 손가락에 손꼽겠는가? 아이들조차 자수성가를 불가능한 일로 간주한다. 

역사상에는 상속을 둘러싼 불화가 많았다. 상속을 둘러싼 형제 갈등은 성경에도 자취를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각종 전기 자료에서도 부모가 남긴 좋은 논밭과 힘센 노비를 차지하려는 형제자매간 갈등이 종종 목격된다. 문서에 기록될 만큼 그 갈등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해도, 크고 작은 반목과 대립이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다. 

‘흥부전’ 같은 옛 소설도 상속을 놓고 빚어진 형제 갈등을 고발한 사회소설로 읽힌다. 놀부는 ‘똑같이 나눠 가지라’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무시하고 부모의 재산을 독차지한 인물이다. 그 때문에 아우 흥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강남에서 온 제비가 행운의 박씨를 물어다주었기에 망정이지, 흥부 가족은 모두 굶어죽을 뻔했다.

영호남 상속 관행 달라

김홍도의 풍속화 ‘벼타작’. 조선 후기의 지주와 농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 ‘벼타작’. 조선 후기의 지주와 농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까지 작성된 전국 여러 집안의 상속 문서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형제자매들이 애써 감추려 노력한 갈등의 골이 감지된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20,30년이 넘도록 상속에 관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집안도 많았다. 예의를 중시하는 양반들조차 상속 재산을 눈앞에 두고 서로 눈을 흘기고 반목을 일삼았다. 상속 문제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에 행운과 불운의 분수령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토지와 노비를 주고받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40년도 더 지난 오래전 일이다. 한때 나는 김광언 선생의 조수 노릇을 했다. 김 선생은 민속학자로 유명한 분이시다. 그분은 당시 전국의 고가(古家)를 두루 연구했다. 나는 선생을 따라다니며 양반 집안의 여러 가지 풍습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상속에 관해서였다. 

묘하게도 호남 지방에서는 주인 내외가 환갑을 전후해 가문을 계승할 아들 내외에게 곳간 열쇠를 물려주었다. 그동안 전용으로 쓰던 안방과 사랑방도 아들 내외에게 넘겨준다고 했다. 요샛말로 노부부가 은퇴한 뒤 아들 내외가 살림하는 것을 지켜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영남의 풍습은 달랐다. 상속자는 이미 내정돼 있지만, 주인 내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것이 법이라 했다. 호남보다 영남의 노부부가 가정 내에서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고 할까. 

서양의 상속 풍습은 한국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서’에도 말했듯, 그들에게 결혼이란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출범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0대 어린 나이에 결혼해 부모님의 보호 아래 아이를 낳아 기르며 차츰 성인의 권리와 의무를 배웠다. 그러나 서양 남성은 상속받을 재산이 이미 결정된 다음에라야 장가를 들었다.

자연히 만혼이 보편적 추세였다. 서양 남성은 귀족 자제라도 초혼 연령이 30세 전후였다. 여성은 친정에서 지참금을 마련해주면 곧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귀족 여성 중에는 초경을 갓 넘긴 10대의 어린 신부도 적지 않았다.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서양 남성과 지참금이 준비되지 못한 여성은 평생 홀로 살았다. 

동서양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통 시기에는 상속재산의 유무(有無)가 인간의 생존조건을 사실상 결정하다시피 했다. 물론 그때도 능력과 포부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비범한 인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상속의 관행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여기고 따랐다. 결혼과 육아, 분가(分家) 등 그들의 일생을 지배하는 삶의 기본 틀이 상속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금수저’의 대물림을 비판의 도마에 올릴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유사 이래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오랜 관습이다. 지금 우리가 ‘금수저’의 불평등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실은 새로운 현상이다.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좌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졌다거나 나빠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진 것은 다행 아닐까.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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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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