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알렉산드리아에서 조선까지 1400년의 문명 대이동

프톨레마이오스와 황도12궁

  • 곽문석|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genrev@daum.net

    입력2013-07-19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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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천문점성서 ‘테트라비블로스’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며 1400여 년 동안 동진(東進)해 조선에 이르렀다. 지도자는 하늘의 대행자(天子)를 자처했기에 우주의 운행 이치를 꿰고 있어야 했다. 중국과 조선의 지도자가 하늘의 이치를 밝힌 자료가 그리스인이 쓴 것에 바탕을 두었다면 고대에도 동서양 교류가 활발했다는 의미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조선까지 1400년의 문명 대이동

    <그림1>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에 묘사된 황도12궁(Astrology A History, Whitfield, 2001, p.58).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90~168). 그는 서양 우주관을 체계화한 천문점성학자였다. 대표작으로 ‘알마게스트(Almagest)’와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라는 저서를 후세에 남겼다.

    그의 책이 서양 천문점성학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그의 명성은 서양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중국에 이르렀다. 언어적으로는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중국어로 번역됐다가 1400여 년 후 조선에도 전해진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나온 길은 곧 세계 문명 교류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조선 전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황도12궁(Zodiac)’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에 묘사된 황도12궁의 상징물과 조선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별자리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리고 선조 2년(1569)에 만들어진 ‘치성광불제성강림도’에 새겨진 12궁의 한자명과 상징물을 비교해보자.

    황도12궁으로 본 1400여 년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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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조선 태조 4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

    두 문명의 황도12궁 상징물과 명칭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일치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염소궁은 많은 변화를 거쳤고 처녀궁과 쌍녀궁, 저울을 든 남자와 저울, 활을 든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로스, 활과 화살 그리고 물병을 든 사람과 물병 등은 큰 차이가 없다. 1400여 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공간을 이동해 전해진 12궁이 상징하는 바와 명칭, 순서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와 조선, 두 문명 사이의 시간적 지리적 간격을 생각할 때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치는 문명 교류 활동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군사적인 충돌과 물품의 교역을 넘어, 종교와 과학 문헌들이 번역을 통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교류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이 1400년에 걸쳐 동방으로 이동한 경로를 따라가면서 세계 문명 교류사를 추적해본다. 이 여정은 천문점성학의 대표적 상징체계인 황도12궁이 안내할 것이다.

    신비를 푸는 열쇠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탄생했지만 그리스인들에 의해 확정된 황도12궁 별자리 체계는 태양의 길인 황도대(黃道帶)의 360도 원주를 12개로 나눠놓은 것이다. 영어로는 ‘동물들의 띠(獸帶)’라는 뜻의 조디악(Zodiac)으로 불린다. 이 단어는 별자리의 이름이 주로 동물들이기 때문에, 동물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단어 ‘조디아코스(zodiakos)’에서 나왔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조선까지 1400년의 문명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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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인은 황도12궁에 따라 달과 별의 이동 경로를 계산해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알았기에, 농사를 짓고 사막을 건넜으며 바다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 체계가 실생활에서만 이용된 것은 아니다. 각각의 별들은 곧 그들이 믿는 신을 상징해, 별자리의 움직임은 곧 신의 뜻을 대변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12궁에 그리스와 로마 신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12궁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기원전20~ 기원후 50)는 ‘모세의 생애에 관하여(De Vita Moysis)’에서 대선지자의 에봇(사제복)에 있는 12개의 보석이 황도12궁을 상징한다며 이렇게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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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유대인 회당에 새겨진 황도12궁(팔레스타인에서 발굴된 유대인 회당 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 6세기).

    “대제사장의 흉부에는 각기 다른 색을 가진 12개의 보석이 4줄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황도12궁을 상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황도12궁은 12 동물로 구성돼 있으며, 이 동물은 1년 사계절에 각각 3마리씩 할당된다.”

    팔레스타인의 베트 알파(Beth Alpha)에서 발굴된 유대인 회당 바닥에 장식된 모자이크는 분명히 황도12궁이다. 이 모자이크가 상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였을 것이다. 시리아어로 기록된 초대 유대 기독교 문헌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당시의 기독교 문헌들은 예수의 열두 제자와 요한계시록에 적힌 성곽 주춧돌의 12보석도 황도12궁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황도12궁을 상징하는 숫자 12는 고대 문헌들 속에 숨은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 구실을 한다. 12의 3배수인 36과 6배수인 72도 같은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황도12궁이 주변 문명국들에 전해지게 됐다.

    인도·중국 문명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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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인도화한 황도12궁.

    기원전 4세기 이후 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대제국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명과 군사적이고 상업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리스 천문점성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인도와 국경이 맞닿은 곳에 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는데, 박트리아 왕국은 인도에 그리스 문명을 전하는 매개체였다. 그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인도의 간다라 미술이다.

    그리스의 황도12궁 명칭이 등장하는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270년경 작성된 ‘야바나자타카(Yavanajataka)’이다. ‘야바나’는 ‘이오니아 사람’ 즉 그리스 사람을 가리킨다. 이 책의 그리스어 원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기 1~2세기 프톨레마이오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천문점성술을 바탕으로 번역된 책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용어들은 그리스어를 그대로 음역해 기록해놓았다.

    6세기에 작성된 힌두교 점성술의 기본서인 ‘브리하트 자타카(Brihat Jataka)’도 그리스어 황도12궁 명칭을 음역해 제시하고 있다. 양자리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크리오스(Krios)는 산스크리트어로 Kriya, 황소자리인 타우로스(Tauros)는 Tavuri, 쌍둥이자리인 디두모이(Didumoi)는 Jituma로 음역돼 있다. 이러한 예들은 인도 천문점성학의 뿌리가 그리스임을 보여준다. 서양 천문점성학은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다.

    서양 천문점성학 서적들은 인도에서 번역됐다. 그러나 인도어 번역본이 중국으로 전해지기 전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동남부 지역에서 서양 고전문헌 전반에 대한 연구와 번역이 시도되었다. 니시비스(Nisibis·현재 터키의 누사이빈)와 에뎃사(Edessa·현재 터키의 우르파) 지역이 그곳이었다.

    350년 니시비스에는 오늘날 대학과 비슷한 ‘니시비스 학교’가 설립됐는데, 이 학교는 363년 페르시아의 침공 때 에뎃사로 이동했다. 에뎃사는 아랍어의 방언인 시리아어를 사용하던 동방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언어가 바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 전체에서 쓰이던 ‘링구아 프랑카’(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 사용하는 제3의 보조언어)였다. 니시비스와 에뎃사의 학자들은 시리아어로, 그리스의 문학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서적들을 연구하고 번역했다.

    이들이 남긴 수많은 서적이 필사본 형태로 세계 유수의 도서관 서고에 쌓이게 됐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신·구약 성경주석과 사도들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적 등 수많은 번역서와 연구서들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테트라비블로스’ 등도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이 서적들이 페르시아와 아랍문명권에 전해졌고, 다시 중앙아시아의 링구아 프랑카어였던 소그드어를 통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6세기 후 서양의 황도12궁은 인도 불경 번역 과정을 통해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 불전들을 모아 편찬한 대장경에는 경전뿐만 아니라 당시 인도에 들어온 천문점성학 서적들이 들어갔다. 밀교부(密敎部)에 포함된 ‘일장경(日藏經)’ ‘수요경(宿曜經)’ ‘칠요양재결(七曜攘災決)’ ‘범천화라구요(梵天火羅九曜)’ 등이 그것이다.

    문명 교류 중심 당나라 長安

    이 서적들에 그리스 12궁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범천화라구요’에서 ‘화라(火羅)’는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호라(hora)’의 음역이다. 이처럼 서양 천문서는 인도를 통해 중국에 건너갔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경로도 존재했다. 앞에서 언급한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 소그드어를 통한 전달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 문명교류의 중심지였다. 장안에 종교·과학 서적을 전해준 것은 소그드 상인들이었다. 무역을 위한 링구아 프랑카가 소그드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역상인답게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들이 남겨놓은 문헌들이 둔황과 투르판 지역에서 발견됐다.가장 주목되는 것은 파사승(波斯僧·페르시아에서 온 기독교 사제)인 경정(景淨)이 당에 바쳤다는 기독교 문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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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6>치성광 불상과 황도12궁(敦煌石窟全集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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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7> 둔황 막고굴 61호동 좌우 벽면의 황도12궁 도형(敦煌石窟藝術 莫高窟第六一窟(五代), 敦煌硏究院,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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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8> 아부 마으샤르의 황도12궁(1300년에 필사된 그의 책 ‘Book of nativities of men and women’에서).

    그리고 그리스 문헌을 기초로 저술된 동방기독교 관련 문헌도 전해주었다. 이 가운데 ‘사문경(四門經)’이라는 책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 즉 ‘네 권의 책’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테트라비블로스는 문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온 서양 천문학 관련 흔적은 대장경 문서기록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한 흔적은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문헌이 다수 발견된 둔황 석굴의 벽화에서도 발견된다. 둔황 막고굴 61호동 좌우 벽면에선 수레에 탄 ‘치성광(북극성) 불상’ 주변에 그려진 서양의 황도12궁 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도형들은 서양의 12궁과 거의 차이가 없으나, 염소궁이 용수어신(龍首魚身)으로 표현돼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그림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그리스 문헌과 유대교 회당에서 마차를 탄 태양신 주변에 그려진 황도12궁 도형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고전의 아랍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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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9>명대 ‘천문서(天文書)’에 기록된 프톨레마이오스 한문 음역(팔체렬목사·八替列木思) 부분.

    서양 천문학이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승되던 시기, 아랍 문명은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을 통해 서양 문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스어 문헌을 아랍어로 옮기는 작업은 두 언어가 같은 셈어족에 속해 있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리아어 문헌이 아랍어로 어느 정도 번역됐는지는, 시리아어 문헌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9세기 이전, 아랍 문명권에서는 그리스 문헌을 시리아어를 거쳐 중역(重譯)했다. 그러나 아랍 정복 후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된다. 아랍 문명은 바그다드에서 시작된 압바스 왕조(750~1258) 때, 특히 830년 이후 100여 년 동안 지속된 번역운동을 통해 그리스 문헌을 직접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통해서 서양 고전문헌 중 사라진 자료들이 아랍어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그리고 중세에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 라틴어 판본을 바탕으로 그리스어 원본을 재구성해 비평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 제목이다. 그런데 아랍어 판본만 남고 그리스어 판본은 사라졌기에,그리스 고전 문헌학을 연구하려면 시리아어와 아랍어 판본을 참고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수사학’ 등도 그러한 정본 작업을 거쳐 최근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양 과학 서적들도 원전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주로 의학서와 천문서적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테트라비블로스’는 번역서뿐만 아니라 주석서까지 출판됐다.

    중요 천문학자로는 아부 마으샤르(787~886), 쿠쉬아르 이븐 랍반(971~1029) 등이 있다. 쿠쉬아르 이븐 랍반은 ‘테트라비블로스’의 주석서를 저술했다.

    수·당 시대에 서양 천문서를 수입한 중국은 원나라 시절 아랍인을 통해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어 과학서적들을 받아 번역했다. 원나라에서는 아랍인을 ‘회회인(回回人)’으로 불렀다. 이 때문에 회회사천감(回回司天監)을 설치해 이들로 하여금 한역을 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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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0>고려본 ‘치성광불여래왕림도’(미국 보스턴 박물관 소장).

    명나라 때는 흠천감(欽天監)에서 이 일을 했다. 덕분에 아랍의 여러 과학 서적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작에는 ‘회회약방(回回藥方)’과 ‘회회력(回回曆)’등이 있다. ‘회회력’은 이슬람 학자인 마사역흑(馬沙亦黑·Mashayihei)과 중국인 한림 이충과 오백종이 한역했다. 회회력의 저본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였다.

    명대에는 쿠쉬아르 이븐 랍반의 아랍어 천문점성학 서적이 중국어로 번역됐다. 이 아랍어본과 한역본은 4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내용 중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등장한다. 이는 저본이 프톨레마이오스의 ‘네 권의 책’인 ‘테트라비블로스’였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압바스 왕조의 번역운동으로 그리스 원전의 수입 붐이 촉발돼 마침내 중국의 원·명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 전해지게 됐다.

    고려, 조선에 들어온 서양 천문학

    앞에서 본 ‘천상열차분야지도’ 이전에 한국에 전해진 서양 황도12궁의 흔적은 14세기 고려시대의 ‘치성광불여래왕림도(熾盛光佛如來往臨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된 이 불화에는 조선시대 ‘치성광불제성강림도’처럼 치성광(북극성)여래가 우마차를 타고 있고, 그 위에서 황도12궁이 호위하고 있다.

    조선은 세종 26년인 1444년 왕명에 따라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간행했다. 이 역서는 ‘알마게스트’를 바탕으로 제작된 원나라의 ‘회회력’을 해설한 것이다. 따라서 ‘칠정산외편’에도 서양의 황도12궁 명칭이 등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황도12궁 외에도 동서양 문명교류의 흔적은 다수 발견된다. 동서양 문헌 비교연구가 좀 더 세밀하게 진행된다면 교류의 증거가 더 많이 발견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고대 문명의 십자로 구실을 한 아나톨리아 지방의 니시비스와 에뎃사, 그리고 둔황과 투르판 지역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또한 시리아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소그드어, 그리고 당대의 한문 문헌들을 정확히 분석해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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