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마라톤 창법 신공(神功)? 달 그림자 보며 터득했죠”

‘라이브의 女神’ 바다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입력2013-07-2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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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닐하우스에서 태어난 아이
    • 이수만은 세 가지 소원 이뤄준 평생 은인
    • 얼굴로 주목받던 유진, 미워할 수 없었다
    • 솔로 독립 후 예능감 없어 힘들었다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같은 가수 겸 배우 꿈꿔
    “마라톤 창법 신공(神功)? 달 그림자 보며 터득했죠”
    평생 행복이나 불행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없다. ‘새옹지마’ ‘고진감래’ 같은 사자성어가 생겨난 이유다. 인생의 이런 장난질을 알면서도 일희일비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 그런데 이 여자는 좀 다르다. ‘가요계의 요정’으로 불리며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도, 2002년 솔로 전향 후 화려한 조명이 꺼져 한치 앞을 모를 때도 괘념치 않고 ‘무소의 뿔’처럼 제 길을 걸어왔다. 1997년 3인조 걸그룹 SES로 데뷔한 가수 겸 뮤지컬 배우 바다(33·본명 최성희) 얘기다.

    최근 KBS-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이하 ‘불후의 명곡’)가 방영될 때마다 그의 ‘마라톤 창법’이 인터넷을 달군다. 4~5분간 격정적인 춤을 추면서도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열창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처음엔 ‘립싱크 아냐?’라는 의혹이 일 었을 정도다. 이문세, 이승철, 조덕배, 설운도 등 ‘불후의 명곡’에 초대된 전설들은 이런 바다의 내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실크 같은 목소리에 녹았다”“사랑에 빠졌다”“내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다는 이승철의 ‘소녀시대’와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로 ‘불후의 명곡’에서 최종 우승자에게만 주는 트로피를 두 번 받았다.

    요즘 그의 이름 앞에는 ‘섹시 디바’‘한국의 비욘세’ 등 팬들이 선사한 훈장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대기업들의 행사 출연 요청도 빗발친다. 어디를 가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를 반긴다.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다.

    7월 11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의 ‘재기 성공기’는 약속한 두 시간 안에 들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마라톤 창법의 ‘비밀’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추가 인터뷰가 불가피했다. 한데 그는 ‘불후의 명곡’ 외에도 최근 막을 올린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에 출연 중인 데다 8월에 낼 앨범 준비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시간을 내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바다는 뮤지컬 공연을 마치고 녹음실로 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왔다. 자정 무렵 시작된 인터뷰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종 활기가 넘쳤다.

    ▼ 깜짝 놀랐어요. 댄스곡을 라이브로 열창하면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남보다 폐가 큰 편이에요. 노력도 했고요. 잠수교에서 시간 날 때마다 뛰었거든요. 노래할 때 순간적으로 음이 올라가려면 힘이 필요해요. 지구력도 있어야 하고. 제가 한 발로 중심을 잘 못 잡아요. 고등학교 때였나? 깊은 바다에 들어갔다가 귀에 모래가 들어가 한쪽 귀가 안 좋아요.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려면 평형감각이 필요한데 조금만 열정적으로 하다보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더라고요. 그래서 중심을 잘 잡으려고 뱃심을 키웠어요.”

    잠수교 가수지망생

    ▼ 요즘도 잠수교를 뛰나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못 뛰고, 28세때부터 4년간 뛰었죠.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전력질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러요. 한쪽 귀는 막고, 다른 한쪽 귀는 열죠. 호흡이 흔들리는지 가늠하려고요. 운동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전력 질주하니까 택시기사들이 운동선수냐고 물어봐요. 그러면 전 ‘아뇨, 가수지망생이에요.’ 그러죠. 실제로도 새로운 출발선상에 선 가수지망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뛰었고.”

    ▼ 요즘 너무 바빠서 잠잘 시간도 없겠네요.

    “그래도 서너 시간은 자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얼마나 공들여 준비해왔는지 저 자신은 아니까, 사실 자는 것도 아까워요. 제겐 절실했고 너무나도 원했던 상황이니까요. 그렇다고 ‘꼭 해낼 거야’ 하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매일 고단함을 감수하며 연습하고, 잠수교를 뛰어다닌 건 아니에요. ‘이러다보면 분명히 내가 준비한 것을 보여줄 날이 올 거야’ 하는 믿음이 있었어요.”

    ▼ 강인한 성격인 것 같아요.

    “친구가 타로 카드로 점을 봐준다고 하면 전 이렇게 말해요. ‘좋아, 나쁜 건 얘기하지 말고 좋은 것만 얘기해줘. 난 좋은 것만 믿고 달려갈 거니까.’ 이게 저예요. 전 잘하는 것만 잘하자는 주의예요. 잘하는 것을 발견해서 그것에만 집중하죠.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걸 20대 후반에 깨달았거든요.”

    ▼ ‘불후의 명곡’ 준비할 때도 선택과 집중이 절실하죠?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프로듀서, 회사 스태프들과 상의해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골라내요. 제가 3일 안에 해낼 수 있는 걸로.”

    ▼ 각선미가 예술입디다(웃음). 가장 자신 있는 신체 부위가 다리인가요.

    “하하…. 부담스럽지 않은 건강미를 표현하고 싶어요. 무대에서 격정적으로 노래할 때 제가 불안해 보이지 않길 원해요. 여자가수라서 연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 운동도 오랫동안 한 거고. 건강한 몸에서 힘 있는 노래가 나온다는 걸 알면 시청자도 보기가 편할 거 아녜요.”

    ▼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나요.

    “내 무대를 보고 사람들이 좋은 에너지를 받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노래할 때는 솔직히 무아지경이에요. 솜사탕을 즐겁게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아저씨의 마음이랄까. 무대를 마치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고 청중의 환호성만 들려요. 무대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끝나 있어요. 너무 집중을 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달 그림자의 추억

    “마라톤 창법 신공(神功)? 달 그림자 보며 터득했죠”

    KBS-2TV’불후의 명곡’ 방송 캡처 사진.

    ▼ SES로 데뷔하기 전엔 달 그림자를 보면서 춤을 췄다면서요.

    “데뷔하기 전까지 9년 동안 성당 앞 컨테이너 집에서 살면서 하루도 안 쉬고 춤을 췄어요. 한겨울에도 속옷을 짜서 땀이 물처럼 나올 때까지. 땀이 그렇게 나와야 집에 들어갔어요.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보여줄 수 있게 저 나름대로 계속 준비한 거예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평소에 준비를 해두면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어요.”

    ▼ 달 그림자를 보면서 어떻게 춤을 추죠?

    “제가 살던 동네에 가로등이 하나 있었는데 달이 비추면 내 그림자가 더 선명해졌어요. 연습실에 있는 거울 벽이 없으니까 성당 벽에 비친 내 달 그림자를 보면서 춤을 춘 거죠. 그때마다 신에게 기도했어요. ‘하느님,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된다면 당신이 없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제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주세요.’ ‘분명히 해주실 수 있죠?’라고 반문하면서. 고1 때 SES에 들어가기 전 제가 간절히 바라던 꿈이 세 가지가 있었어요. 제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고, 가수로 데뷔해 학비를 벌었으면 했고, 또 가수로 성공해서 그 대학의 축제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그 세 가지를 다 이뤘어요.”

    ▼ 학비를 벌려고 가수가 됐나요.

    “아빠가 예고 가는 걸 반대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몸이 아파서 제 학비가 부담됐을 거예요. 제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간장과 위장에 합병증이 생겨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 원래 창(唱)을 하던 분이라고 들었어요.

    “창을 하다 한동안 클럽을 운영하셨어요. 창으로는 돈벌이가 안 되고, 저까지 태어나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절친한 친구들과 클럽을 하신 거예요. 친구 분들이 부산의 부자였대요. 그러다 몸이 안 좋아져서 다시 창을 하셨는데 제가 예고에 가겠다고 하자마자 아버지가 그 다음 날부터 삿갓 쓰고 밤무대를 다니셨어요. 그래서 제가 꼭 1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고에 다닐 때 공부는 1등을 못했지만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건 모두 ‘에이플러스’를 받았어요. 나중에 대학 등록금이 걱정거리가 되니까 성당에서 그렇게 기도한 거예요.”

    ▼ 원래 꿈이 가수였던 게 아니군요.

    “어릴 때는 가수나 배우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런 쪽에 끼가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가수와 배우, 둘 다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예고 선생님들이 저더러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하시니까 고등학교 때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학비 때문에 먼저 가수가 돼야 했지만.”

    ▼ 아버지 끼를 물려받았겠네요.

    “아버지가 창을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노래를 가르쳐주신 게 아니라 노래 잘하는 몸을 만들어주셨죠. 9년 동안 달 그림자 보면서 춤을 춘 것도 아버지 영향이 커요. 제가 아홉 살인가 열 살 때부터 아침마다 아버지가 제 배 위에 올라가 서 계셨어요. 남자 성인이 쌀 한 가마니 무게잖아요. 아침에 잠도 안 깼는데 아빠가 벽을 짚고 그러고 계셔서 정말 괴로웠어요. 그때마다 전 장 파열이 일어나지 않게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줬죠.”

    아버지의 ‘무거운 선물’

    ▼ 왜 그러신 거죠?

    “아빠가 아프셨잖아요. 저희가 묏자리까지 보러 갔었어요. 병원에서 돌아가신다고 했어요. 8개월 선고 받으셨거든요. 막상 돌아가신다고 하니까 제게 뭐라도 물려주고 싶은데 재산이 없잖아요. 자식 중에 아빠 재능을 제일 많이 물려받은 막둥이 딸의 몸에다 저금하듯 뱃심을 길러주려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더래요. 개들은 강아지를 낳자마자 핥아주잖아요. 아버지도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런 생각이 들었대요. 근데 전 정말 싫었어요. 매일 울었어요. 학교 가기 전에 연필도 깎아야 하고 준비할 게 많은데 바쁜 아침마다 그러셔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2~3년을 보냈더니 배에 힘이 생겨서 아버지가 벽을 안 짚고 서 계셔도 견딜 만해지더라고요.”

    다행히 부친의 병세는 양약을 끊고 청정한 산과 들에서 나는 풀뿌리와 나물 위주로 식단을 바꾸면서 자연 치유됐다. 감당하기 힘든 수술비를 대느라 가세가 기울자 도심에서 시골로 이사했는데 그것이 부친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클럽을 하는 동안 풍족하게 살던 바다도 시골생활이 좋기만 했을까.

    “여덟 살 때 시골로 이사했는데 처음부터 컨테이너에서 살진 않았어요. 웃풍이 심하고 비가 새는 허름한 집이었는데 집밖에만 나가면 마음껏 뛰놀 대자연이 펼쳐져 있어서 좋았어요. 주변이 과수원이었거든요. 엄마 아빠는 힘드셨겠지만 전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여름에는 배터지게 과일을 먹고 겨울엔 고구마, 감자 같은 걸 동네 어른들이 매일처럼 쪄주셔서 삶이 풍요로웠죠. 언니와 오빠는 사춘기여서 저와는 생각이 달랐겠지만. 그때 과일을 하도 먹어서 피부가 엄청 좋아요. 온수가 없어서 찬물로 샤워를 많이 했지만 그게 약수였거든요. 그 물을 얻으러 인천에서도 오고 그랬어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어요. 자연을 가까이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요. 자연에 순종할 수 있어야 부러지지 않고, 비가 오고 번개가 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생기죠. 저도 어릴 때 비가 엄청 오는 날도 산 넘어서 학교에 다녔거든요. 그런 의지가 고난이 닥쳤을 때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더라고요. 꿈을 향해 열심히 가다 보면 주위에 도움을 주는 사람도 생겨나요. 고등학교 때 학비를 늘 늦게 냈는데 선생님들이 그걸 이해해주셨어요. 어떤 독지가로부터 후원도 받았고요. 그래서 저도 두산의 ‘영광재단’을 통해 결손가정 아이들을 돕고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식사할 때 제 경험담을 들려줘요. 희망을 주려고요. 자주 보니까 절 누나라 부르며 잘 따르는데, 그 친구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 저를 보는 것 같아요(웃음).”

    “태몽 덕 봤다”

    그에게 부친은 “재능을 찾아준 더없이 고마운 분”이지만,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뜬 모친은 “그립고 죄송한 분”이다. ‘불후의 명곡’에서 이문세의 ‘옛사랑’을 부를 때도 그는 더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가 뜨거운 눈물을 흘린 그 무대는 보는 이들마저 울렸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잘 돌봐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요. 하필 그때 일이 많아 상중에 ‘열린음악회’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울진 말아야지 했는데, 참아보려 해도 안 되더라고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화제를 바꿨다. 그의 부친인 소리꾼 최세월(본명 최장봉) 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바다는 원래 안 낳으려다 낳았다”고 했다. 이 말의 진위를 묻자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깔깔거렸다. 무슨 사연이기에?

    “제가 태어날 때 아빠가 시골동네에서 창을 하면서 비닐하우스에 오리 500마리를 갖다놓고 키우셨어요. 형편이 어려우니 절 낳으실 때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낮에는 창을 하시고 남는 시간에 오리를 키우셨는데, 오리가 고개를 숙이고 다니니까 목을 들면 목만 하얗대요. 그래서 제가 비닐하우스에서 태어날 때 아버지가 오리 목 부위의 털을 뜯어서 깔개를 만들어주셨대요. 그 바람에 오리들 목에 땜통이 생겼대요, 하하. 제 귀에 구멍이 있는데 아빠가 그걸 보고 지금도 오리 콧구멍이 귀에 하나씩 박힌 거라고 놀리곤 하세요. 엄마는 힘든 삶이지만 태몽 때문에 절 낳으셨대요.”

    ▼ 어떤 태몽?

    “유치해도 끝까지 들어보세요(웃음). 세계 구렁이 잡기 대회가 열렸는데 부모님이 대표로 출전해 독일사람, 일본사람 등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제치고 제일 큰 구렁이를 잡으셨대요. 잡은 구렁이를 대회 관계자에게 주니까 거기서 상으로 까만색 종마를 줬다고 해요. 엄마 말이, 그것으로 끝났으면 단순한 말 꿈인데 부상으로 황금안장을 얹어줬대요. 그러자 말이 백마로 변하더니 어깨에서 하얀 날개가 나와 하늘로 막 올라가더래요. 엄마가 이 꿈을 직접 꾸셨죠. 그래서 엄마는 제가 정치를 하거나 나랏일을 할 사람으로 생각하셨대요, 하하.”

    ▼ 어쩜 여자 대통령이 될 수도 있죠.

    “아뇨, 어떻게 감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태몽이 들어맞았다고 생각해요.”

    ▼ 아버지가 재밌는 분 같아요.

    “유머 감각도 있고 생각이 깊은 분이에요. 어릴 때부터 제게 철학적인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성격도 낙천적이에요. 저도 그런 면을 닮았고요. 근데 클럽을 운영하시며 술 담배를 많이 하셔서 병을 얻으신 거죠.”

    ▼ 가수가 돼서 가세를 일으켰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가수가 된 덕에 사시사철 따뜻한 물 나오고 웃풍 없는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요.”

    라이브 고집한 SES 리더

    “마라톤 창법 신공(神功)? 달 그림자 보며 터득했죠”
    SES는 이수만 프로듀서가 이끄는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처음으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배출한 걸그룹이다. 바다는 SES의 리더 겸 메인보컬로 활동했다. 어쩌다 SM에 들어갔는지 묻자 그는 “좀 사연이 길다”고 했다.

    “원래 다른 기획사에서 솔로 제의가 들어와 그리로 가려고 했어요. 근데 저의 담임, 교감, 교장 선생님이 ‘너는 뭐가 되도 될 수 있다’며 다른 여러 곳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러다 SM에서 제의가 들어오니까 ‘성희야, 솔로도 좋지만 일단 여기서 데뷔해라’ 그러시더라고요. HOT도 성공시켰고, 무엇보다 제게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거든요. 이수만 대표님이 ‘대학교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겠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다 도와주겠다’고 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죠. 그 덕에 제 고민이 모두 해결되고 세 가지 소원도 이뤘어요. 대표님은 제 평생의 은인이죠.”

    ▼ 솔로 데뷔를 못해 아쉽지 않았나요.

    “대표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처음 오디션 보러 갔을 때 장혜진 선배님의 ‘내게로’를 불렀는데 대표님이 ‘이 사람과 일을 해야겠다’고 하셨어요. 노래 끝나고 나서 저한테 한 첫 질문이 ‘너는 발라드를 부를 때도 발로 박자를 치니?’였어요. ‘박자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됐나봐요. 저도 몰랐어요’ 그랬더니 ‘발라드를 박자 치면서 부른 소녀는 네가 처음이야’ 하셨어요. 그때 믿음이 생겼어요. 그런 질문은 아티스트한테 하는 거거든요. 제 발끝까지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보통 분이 아님을 직감했죠. 지금도 간간이 이수만 대표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는데 늘 반겨주세요. 예전엔 몰랐는데 아빠 같고, 날 진심으로 존중해준 훌륭한 아티스트구나 싶어요. 대표님은 제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도움을 주려고 가수가 라이브를 어떻게 해내는 게 멋있는 건지 알려주셨고, 처음엔 반대했지만 무대에서 라이브로 노래하는 것도 허락하셨어요.”

    “마라톤 창법 신공(神功)? 달 그림자 보며 터득했죠”

    1997년 데뷔한 걸그룹 SES. 맨 오른쪽이 리더 바다.

    ▼ 라이브로 하는 게 마땅한 것 아닌가요.

    “SES의 이미지가 요정인데 라이브로 하면 표정이 망가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바다야, 네가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건 너의 본능인 줄 안다. 그렇지만 넌 내가 아이돌로 데뷔시켰고 다음 단계로 가는 건 20대 중반에도 할 수 있고 후반에도 할 수 있다’고 회유하셨어요. 근데 일본 활동이 전환점이 됐죠. 거기서는 아티스트와 아이돌을 구분하거든요. 그 새로운 세계에서 아이돌로 구분되고 싶지 않아 라이브에 집착했는데 어느 날 그 무대를 보고 대표님이 전화하셨어요. ‘바다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당시만 해도 라이브 무대를 펼치는 아이돌 그룹은 SES가 유일했다. 이후 SES는 국내에서도 라이브로 노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이수만 대표는 그때부터 목에 좋다는 것을 직접 구해다 먹일 정도로 바다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적극 지원했다. 바다는 “날 소속사 가수이기 이전에 아티스트로 대해준 이수만 대표, 라이브를 고집하는 나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기꺼이 내 뜻을 따라준 착한 두 동생 슈와 유진은 늘 내게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 SES가 원래 4인조 아니었나요.

    “맞아요. 연습생을 1년 정도 했는데 이수만 대표님이 제게 오셔서 ‘리드보컬을 너로 정했고, 네가 팀의 리더가 될 거다. 나머지 멤버를 네가 뽑아라’ 그러시는 거예요. 원래 4인조였는데 제가 발칙하게도 3인조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TLC도 3인조고, 3인조라야 팀워크가 좋다. 삼각구도가 좋다. 그래서 피라미드도 삼각형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폈죠(웃음).”

    ▼ 유진 씨가 외모로 주목받을 때 시샘한 적은 없나요.

    “사람은 상대적인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성격이 못됐으면 그랬을 것 같은데, 참 불공평하게도 유진 씨는 어른스럽고 착하기까지 해요. 유진과 5년간 줄곧 함께 숙소생활을 했는데 다시 같이 살아도 좋겠단 생각이 들 만큼 착해서 시샘할 건덕지가 없죠.”

    ‘롤러코스터’처럼 재밌다는데…

    ▼ 솔로 독립 후 힘들지 않았나요.

    “힘들기보단 파트를 나눠서 노래하다가 혼자 부르니까 어색했어요. SM에 있을 때는 제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여건이 갖춰져 있었는데, 그런 시스템에서 벗어나니까 ‘셀프 디바’의 길을 가야 하는 거예요. 스스로 매일 자축해가면서 제 자신의 팬이 되지 않으면 절 일으켜 세우기 힘들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가수가 노래와 음반으로 승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존재감을 보여주지 않으면 홀로 서기 힘든 기형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어서 바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하고 싶은 얘기를 편하게 하지만, 그때는 제 자신을 더 냉혹하게 다그치면서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개척정신을 발휘했던 것 같아요. 그게 저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었어요. 이것도 안하면 내가 뭘 할 수 있나 싶어서 리허설도 본방처럼 했어요. 스태프들 사이에서 ‘바다는 지금은 인기도 없는데 아침에 극성맞게 왜 리허설을 저렇게 열심히 하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보같이 살았어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어요. 소질 없는 개인기를 억지로 만드느니 내가 잘할 수 있는 데 집중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예능 프로그램에 적응을 못하면서 방송과 멀어지고 노래를 적극적으로 하려는 의지 자체가 자꾸 소진되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럴수록 상처가 안으로 파고들 수도 있는데, 생각지 못한 일을 겪을 때마다 항상 속담을 떠올렸어요. 이를테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나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같은 말이요.”

    ▼ 성격이 긍정적인가 봐요.

    “그런 면도 있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빨리 극복해내는 회복 탄력성이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환경이 날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자신을 상대로 한 임상실험을 통해 알았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속담처럼, 힘든 일을 겪어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더라고요. 예능감이 없어 고전할 때, 나도 쇼프로에 나가기 위해 술자리에서 에피소드도 만들고 그래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근데 전 담배 피우는 자리만 가도 목이 쉬니까, 제겐 불리한 싸움인 거예요.

    노래하기 위해 억지로 에피소드와 사생활을 만들어나간다는 게 너무 힘들었고, 내 음악을 이어나가는 데 있어 억지로 보태야 되는 게 자꾸 많아지니까 ‘이게 불편하면 난 어떡하면 좋을까?’란 의문이 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어가 ‘How does It get better than this?(어떻게 하면 이것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예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인생을 살면 좋다고 해서, 노래만으로 무대에 집중할 수 없었던 20대 후반에 제 자신에게 물었더니 ‘주변 상황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내 길을 가라’고 일러줬어요. 그래서 라이브 무대에서도 발라드를 부르듯 춤추며 열창할 수 있는 내공을 키우려고 잠수교를 달린 거예요.”

    ▼ 스태프들의 말에 상처 받았겠네요.

    “제가 상처 받는 성격이 못돼요. 예능감이 나하고 안 맞는 거지, 제가 사실 친구들하고 있으면 되게 재밌거든요.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롤러코스터’예요. 놀이기구처럼 재미있다고. 제 친구들은 저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요. 특히 힘든 날 저와 통화하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근데 지금도 방송카메라만 돌면 친구들에게 했던 재밌는 얘기들이 재미없어진다니까요(웃음).”

    서른다섯에 결혼하고파

    어느덧 그도 연애만 하기엔 부담스러운 나이가 됐다. 그와 한솥밥 먹던 유진과 슈도 유부녀가 됐고, 라이벌 그룹이던 핑클의 리더 이효리도 9월이면 연인 이상순의 아내가 된다. 이들이 부럽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급하지 않다는 듯 그가 무덤덤하게 말한다.

    “너무 좋아 보이는데, 결혼은 ‘언제’가 아니라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느낌엔, 저도 그 친구들처럼 제 일을 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짝이 있다고 믿거든요.”

    첫사랑은 21세에 하고, 마지막 사랑은 “현재 진행 중”이란다. 상대가 연예인이냐는 물음에 그가 손사래를 친다.

    “연예인은 아니에요. 보통사람이에요. 지금 사귀는 건 아니고, 몇 달 전부터 저 혼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렇게까지 깊은 감정도 아니에요. 요즘엔 바빠서 감정을 키워나가기가 어려워요. 이제 고백을 할 때가 됐는데 못하고 있어요. 의외로 먼저 고백을 못해요. 언젠가 고백해서 제 매력을 표현해야죠(웃음).”

    ▼ 어떤 짝을 만나고 싶나요.

    “자상한 사람이 좋아요. 연하랑은 안 맞을 것 같아요. 막내로 자라선지 오빠가 좋아요.”

    ▼ 재력가와 성격 좋은 남자 중 한 명만 택하라면.

    “재력가는 부담스러워요. 성격이 좋아야죠. 제 일을 잘 이해해주고 절 감싸주고 그런 사람이랑 살고 싶어요. 종일 열정을 쏟아 귀가하면 바로 쓰러지거든요. 그럴 때 포근하게 절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얘기가 잘 통하고 재미있고. 평생 같이 살 거잖아요. 아버지가 클럽을 하실 때 집은 부유했지만 행복하진 않았어요. 근데 아버지가 아프시고 가세가 기우니까 가족이 더 돈독해지고 서로 아끼고 그러게 되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부자가 행복한 건 아니란 걸요. 뭐니뭐니 해도 화목이 최고죠. 좋은 사람과 화목한 가정을 일구고 싶어요.”

    ▼ 예전에 35세에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지 않나요.

    “그때쯤에는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왔어요.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진행되고 있어요. 이게 계획적으로 움직여서 그런 게 아니라 기도도 많이 하고 제 안에 행운의 상징을 많이 모아요. 예를 들면 좋아하는 숫자를 저장한다거나 하늘의 달을 보면서 달님한테 기도도 하고 그러거든요. 꽃이 오늘은 피려나? 하다가 어느 날 들꽃들이 피는 걸 봤을 때 ‘들꽃들아! 난 이런 소원이 있어. 내 소원을 들어줘’라고 말하기도 해요.

    아직 소녀 감성이 있어요. 한번은 아랫집 할아버지가 죽지도 않은 꿩 새끼를 박스에 담아 버리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3시간 후면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죽지도 않은 꿩 새끼를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집에 가져왔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대로 모두 죽었죠. 그때 안됐다 싶어서 묻어줬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그림을 그렸죠. 그리고 소원을 빌었어요. ‘내가 너희들을 묻어주는 대신에 내 소원을 이뤄달라’고요. 그중에 배우·가수가 되고 싶고, 아빠가 건강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있었어요.”

    ▼ 다 들어줬네요.

    “네. 그때 엄마 건강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야 했는데….”

    바다를 닮은 여자

    ▼ 10년 후에는 뭘 하고 있을까요.

    “무대와 관련된 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을 것 같아요.”

    ▼ 엄마가 돼서?

    “확실히 엄마가 돼서. 셀린 디옹처럼 자기 무대를 스스로 빛내는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처럼 뮤지컬과 연극, 영화를 다 하면서 자기가 터득한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배우가 내가 꿈꾸는 미래죠. 나만 최고가 되고 싶진 않아요. 내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과 노하우를 주위에 나눠주고, 결혼 후에도 연기와 노래를 계속하는 슈퍼 맘이자 좋은 아내가 되고 싶어요.”

    ‘바다’라는 예명은 안양예고 재학시절 친구들이 그의 집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고 그에게 붙인 애칭이다. 연습생 시절 친구들이 그를 ‘바다’라고 부르자 유진이 “바다 언니”라 호칭하게 됐고, 어느덧 소속사 안에서 그의 이름은 바다로 통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바다를 참 많이 닮았다. 남을 배려하는 넉넉한 성품도, 깊은 사색을 즐기는 취미도, 파도처럼 역동적인 그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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