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엔진 구글 이용자에게 ‘잊힐 권리’가 있음을 판결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유럽사법재판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바로 디지털 흔적에 대한 자기통제권, 다시 말해 ‘잊힐 권리’다. 잊힐 권리가 필요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관찰된다.
실제로 사회적인 문제가 됐던 몇몇 사례를 들어보자. 직장인 A는 우연히 검색엔진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다 아주 오래전 빚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에 들어갔던 기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문제가 됐던 부채는 이미 다 상환했지만, 인터넷상에서 그는 여전히 채무자로 남아 있었다.
교사인 B는 수년 전 여 제자와 성관계를 가져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만 13세 이상인 제자였기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시 그 사건을 다룬 기사는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지금도 무한 복제되고 있다. 그는 이 기사를 볼 때마다 살아갈 의욕을 잃는다.
취업준비생 C씨는 대학 시절 “인생은 너무 따분해”라는 내용이 담긴 글과 따분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블로그에 게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글과 사진이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한 면접을 보는 과정에서 문제가 됐다. 면접을 담당한 인사 담당자가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C씨는 면접장에서 인사 담당자로부터 “패기가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고 결국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디지털 흔적에 대한 자기통제권
‘잊힐 권리’는 인터넷상에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온라인에 게재된 자신과 관련한 각종 정보(기사, 자료)에 대해 삭제 등의 조치를 요구함으로써 타인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는 권리이지만 사실 이 권리의 인정 여부 및 그 인정 범위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많은 논란이 제기돼왔다. 정보프라이버시권의 하나이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공공의 알권리·표현의 자유 및 인터넷 포털기업의 영업 수행 자유와 충돌하기 때문에 인정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돼왔다.
전통적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유럽에서는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돼왔고, 실제로 여러 법규정이 만들어진 상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EU)이 2012년 발표한 ‘프라이버시 규정’에는 개인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 개인정보의 전파를 막을 권리 등이 담겨 있다. 정보의 수집이나 처리 목적과 관련해 더 이상 정보가 필요 없을 때, 개인정보 수집 등의 동의가 철회되거나 개인정보의 보존기간이 만료됐을 때 등의 경우 개인의 ‘잊힐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표현의 자유의 행사,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경우, 역사·과학적 연구 목적 등이 인정될 때는 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수년 전 독일에서는 가학성 음란파티 현장을 찍은 몰래카메라 화면이 잡지에 실리고 이후 동영상이 인터넷 등을 통해 확산되자 파티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삭제를 요청하는 소송을 유럽 전역에서 제기한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 등 몇몇 국가의 법원은 동영상을 검색할 수 없도록 자동 차단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사전 삭제조치는 사전 언론검열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는 주장도 나와 상당 기간 논란이 지속됐다.
미국의 상황은 유럽과는 다소 다르다. 전통적으로 국민의 알권리 및 표현의 자유를 강조해온 미국에선 ‘잊힐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나마 2012년 오바마 정부가 내놓은 소비자 프라이버시 권리장전이 “해당 개인정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경우 이를 폐기하거나 비식별 처리해야 한다”고 규정해 잊힐 권리를 일부 인정하는 정도다. 수년 전 미식축구선수인 아들이 술집에서 벌인 소동으로 팀에서 방출된 뒤 자살하자 아버지가 위 인터넷 기사의 삭제를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법원은 청구의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청구를 기각한 바 있다. 이 판결은 ‘잊힐 권리’에 대한 미국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