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판결의 오류를 상식으로 뒤집겠다고?

  • 허태균 |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4-12-19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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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부 판결 중에는 국민의 기대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반 국민의 상식이 사법 판결에 반영되도록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법부가 여론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고 상식을 다루는 기관이 되는 게 옳은 일일까.
    판결의 오류를 상식으로 뒤집겠다고?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 사회에는 ‘나쁜 놈’이 너무 많다. 미디어가 발달해서 ‘몰라도 되는 나쁜 놈’까지 알게 돼서인지 몰라도 요즘은 참 나쁜 놈 천지인 것 같다. 침몰해가는 세월호에서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만 탈출해서 300명에 가까운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은 세월호 선장. 부하들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혹행위를 저질러 후임병 윤모 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모 병장.

    이렇게 명백해 보이는 ‘나쁜 놈’들을 처벌하는 데에도 사회적 여론이 들끓는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당연히 살인인데도 살인죄가 선고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은 사법부의 무능함을 비웃는다.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래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명확한 사건에서도 사법부의 판단이 국민의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다면,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자체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부인과 두 살짜리 딸이 아파트 욕조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돼 남편인 치과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사건.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대법원 재상고까지 거쳐 결국 무죄가 선고됐다. 반대로 만삭 부인을 욕실에서 목 졸라 죽인 혐의로 기소된 유명 병원 레지던트는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결국 대법원에서 20년형의 유죄판결이 확정돼 감옥살이를 한다. 최근에는 현직 대법원장이 37년 전에 내린 판결이 고등법원에서 뒤집힌 사건도 언론에 보도됐다.

    판결이 뒤집힐 때마다 환호하며 정의가 실현됐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정의는 실종됐다며 사법부를 비난하고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울부짖는 사람이 상존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걸까. 또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 걸까. 과연 사법부는 바른 결정을 내린 걸까, 아니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걸까.



    진실과 상식

    사법체계는 정의 실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사법부를 상징하는 이미지도 정의의 여신이다. 국민도 사법부에 정의의 실현을 기대한다. 물론 누구나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결은 당연히 자신이 믿는 바와 같을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왜? 자신은 정의로우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하고, 납득이 안 되면 사법부가 무능하든지, 썩었든지, 정치적인 집단이 된다.

    사법부에 대한 이런 식의 판단은 성급하지도 편향되지도 않고,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다. 왜? 사법부의 판결이 자신이 믿는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식을 좀 반영하라고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배심제, 즉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사법부가 상식을 다루는 기관일까. 상식이 사법 판단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한국인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인은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법률체계에 대해 배운다. 이후 법대에 진학하지 않는 한 따로 법에 대해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 초중고교 교육에서는 사법부의 조직, 체계, 판결 절차를 ‘아주 간단히’ 외우고, 관념적으로 사법부는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실현할 것이라는 당위적인 얘기들을 주입식으로 배운다. 사법 판단의 본질이나, 사법 판단이 많은 경우 일반인이 생각하는 상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법 판단의 한계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 않는다.

    법률체계나 법 규정은 그 사회에서 넓게 받아들여지는 합의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법률 내용은 일반인의 상식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일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일반의 상식에 근거하고, 사회적 합의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사법 판단의 본질은 판결이 얼마나 진실과 상식에 부합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 판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상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판결의 진실 부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판결에서 결정적인 사항은 사실로 알려지기보다는 추론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오류 아닌 본질

    앞서 언급한 세월호 선장의 경우, 퇴선 명령을 하지 않고 혼자만 탈출한 행위는 확인이 가능하고 그래서 수백 명이 사망한 것도 확인 가능한 사실(fact)이다. 하지만 살인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승객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과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과 예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록으로 남지도 않는다. 그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세월호 선장은 당연히 그런 생각도 예상도 안 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예상을 안 했다는데, 했다고 확신(확인은 불가능하니 그냥 확실히 믿는 것)할 근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학창 시절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너 그렇게 생각했지?’라고 단정할 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무척 억울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 그때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했다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그랬다고 단정해 처벌받았을 때의 분통함을 기억한다면, 왜 법률제도가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일병 사건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그냥 상식적으로 ‘그러지 않았겠어’라는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이나 만삭부인 살해사건에서, 부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본 사람이나 그걸 기록한 CCTV 자료가 없는 한, 남편이 범인이라는 것을 100%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확신이 들면 유죄고, 그에 못 미치면 무죄가 선고된다. 아니 무죄가 선고돼야만 한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판결은 때로 바뀔 수 있다. 이는 누구의 잘못이나 오류가 아닌, 그냥 사법체계의 본질에서 비롯된 한계다.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

    사법 판단에 내포된 불확실성이라는 본질은 법률을 공부하는 전문가들이나 사법체계 종사자들이 논의하기를 원치 않는 개념이다. 사법 판단의 불완전성, 오류 가능성과 연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법률 원칙은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유죄가 확정, 선고되기 전까지 모든 피의자를 무죄로 간주하는 무죄추정의 원칙, 법정구속을 포함해 법률에 근거한 모든 불이익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원칙들이 바로 그러하다.‘열 명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 바로 사법체계의 근간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법망을 피해가는 나쁜 놈의 숫자보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 억울하게 처벌받았다는 사람의 숫자가 더 적다. 실제로 수많은 나쁜 놈이 법망을 피해간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뭔가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게 된다. 하지만 나쁜 놈을 하나라도 더 처벌하기 위해 확신의 수준을 좀 낮춰 잡고, 그래서 만약 나 자신이 억울하게 처벌받을 확률이 커진다면 이걸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 

    사법 판단은 본질적으로 진실 규명이 아니라(물론 진실 규명이 궁극적 목표이기는 하지만) 어떤 판단 오류의 위험을 감수하느냐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판사는 불확실성을 내포한 사법 판단에서 유죄 판결을 내릴 때는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할 오류의 가능성을 떠안아야 한다.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릴 때는 진범을 풀어줄 오류의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오류들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비슷한 개념들과 일맥상통한다. 통계학적인 개념에 비유하면, 처벌 오류인 전자는 1종 오류에 해당하고, 무처벌 오류인 후자는 2종 오류에 해당한다. 또한 심리학의 신호탐지이론(signal-detection theory)에서는, 처벌 오류인 전자는 허위경보(false alarm)에 해당하고 무처벌 오류는 놓침(missing)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레이더 기지에서 적기의 기습을 감시하는 레이더병은 레이더에 나타난 수상한 물체가 적기인지 새떼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적기가 날아오는데도 새떼로 오인하면 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된다. 반대로 새떼인데도 적기로 오인하면 아군은 쓸데없는 경계태세로 물질적 손해를 입고 피로감만 쌓이게 된다.

    이런 개념들의 특징은 한 종류의 오류를 막으려면 다른 종류의 오류 가능성이 커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레이더병의 상관이 평소에 절대 적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면, 레이더의 애매한 신호에도 레이더병은 쉽게 비상사태를 외칠 것이다. 이때는 당연히 허위경보의 빈도도 높아진다. 반대로 상관이 쓸데없는 허위경보로 인한 피해를 강조한다면, 레이더병은 웬만하면 비상벨을 울리는 것을 망설일 것이고 실제 공습을 놓치는 빈도가 높아질 것이다. 

    사법 판단의 오류도 본질적으로 똑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단지 사법체계는 제도적으로 허위경보와 1종 오류, 즉 처벌 오류를 최소화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게 차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판결은 국민의 기대에 늘 미흡하다. 세월호 사건, 윤 일병 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만삭부인 살해사건 등과 같은 일반적인 형사사건은 불쌍한 피해자가 억울한 피해를 당했기에, 국민에게 강한 처벌 욕구를 일으킨다. 그래서 반드시 나쁜 놈을 잡아서 처벌하고픈 마음과 동시에 그 나빠 보이는 놈을 처벌하지 못할 때 강한 자책감과 함께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너무나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처벌 오류를 피하려는 사법부를 보면, 마치 무슨 눈치를 보는 듯한, 피의자를 처벌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왠지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법부가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일반 국민을 만족시키려는 판결을 내린다면 사법 판단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다.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사법부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판결의 오류를 상식으로 뒤집겠다고?

    세월호 사고 피의자 15명의 1심 선고 공판이 지난 11월 11일 광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열렸다.



    선택을 싫어하는 한국인

    한국 사회에서 유달리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낮은 이유는, 위험감수 선택이라는 사법부의 본질이 한국인의 복잡성(complexity)을 만났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복잡성이다. 한국인은 상충하는 가치들이 상존할 수 있고 실제로 그 가치들이 본질적으로는 상충하지도 않는다는 변증법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가치관이 일반적으로 흑과 백, 낮과 밤, 선과 악 등과 같이 이분법적이고 이들 간 갈등과 충돌의 가치관은 그들의 사고와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그래서 서구 문화권 사람들은 세상에는 절대 타협할 수 없고, 양립하는 가치들이 존재하며, 그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을 통해 무언가를 얻는 대신에 다른 하나를 잃게 된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동양의 가치관은 일반적으로 그런 가치들이 충돌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서로 통하고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고 본다. 음양의 조화, 태극의 의미, 윤회설 등 수많은 개념이 바로 이런 극단의 화합과 조화를 강조한다. 이런 관점은 굳이 하나를 선택할 필요를 없애고, 결국 선택을 즐기지 않는 심리적 특성을 만들어낸다.

    불운한 현대사를 겪으면서 선택의 여지를 잃어버린 한국인에게 이러한 복잡성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한국인은 선택을 싫어하고, 더구나 선택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면 더욱 불편해한다. 심지어 선택을 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잃어야 한다는,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한국인에게 본질적으로 어떤 오류를 감당해야 하는 사법 판단은 잘 이해가 되지도 않고 동의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사법부에 처벌 오류도 줄이면서 동시에 무처벌 오류도 줄이는 방안을 찾아내라고 요구한다. 진짜 나쁜 놈인 범인을 처벌할 확률을 100%로 만들면서, 동시에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을 확률은 0%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당연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는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에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 판결의 오류가 나올 때마다, 어떤 오류(일반적으로 처벌오류)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할 때마다 마치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아니,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두 가지 오류를 동시에 줄이는(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수사체계와 과학수사 수준을 미국 드라마 ‘CSI’처럼 이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을 과학수사에 쏟아 부어야 한다.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을 위해 수십 억짜리 장비를 사고, 단순한 사고에도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입해 필요 없어 보이는(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증거까지 다 모으고 보관해 놓으면 된다. 그만큼 우리 주머니에 있는 돈을 세금으로 포기하는 선택만 하면 된다. 그게 싫으면 지금 우리가 즐기는 국방, 교육, 의료, 복지 중 무언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면 된다. 한국인이 이런 선택을 좋아할까.   

    선택을 싫어하는 특성만큼이나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낮추는 데 일조하는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은 바로 주체성이다. 한국인은 기존의 동서양 연구에서 밝혀진 일본인의 특성과 차이가 있다. 비교문화심리학 연구에서, 서구 문화권 사람들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약하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집단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주변을 통제하기보다는 주변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전체 속에 묻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유별난 주체성

    하지만 최근 한국과 일본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신이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특성은 한국인이 업무에서 유연하고 임기응변에 매우 강하다고 평가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은 현장에서 갑자기 접하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자신이 알아서 곧바로 일처리를 하는 데 강점이 있다.

    일본이나 서구에 가면 정해진 원칙대로 또는 규정에 따른 절차를 밟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답답해서 미치고 펄쩍 뛴다. 일본의 건축 방송을 보면, 집을 지을 때 모든 재료가 설계에 따라 미리 재단이 되어 배달되고,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작업이 가능하려면 미리 정해진 설계에 맞춰서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르는 습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건설 현장은 이런 작업을 할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과정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많은 건설 현장에서 설계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미리 모두 만들어 와서 조립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장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려 한다. 그냥 정해진 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물론 현장에서 마음대로 내리는 그 결정은 바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데 따른 것이다. 그래서 설계자와 현장 책임자 간에는 늘 긴장이 조성된다. ‘네가 현장에 대해서 뭘 알아?’라는 경험 많은 십장의 훈수가 항상 들려온다. 이런 주체성이 바로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 비결 중 하나다. 

    한국인의 이런 주체적 특성은 사법부의 판단을 그냥 믿고 따르기보다는 한국인 개개인이 자신만의 사법 판단을 내리는 것을 선호하게 만든다. 거대한 조직 속에서 규범과 원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고 자신의 존재감이 상실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인은, 사법 판단에서도 자신만의 원칙에 따른 자신의 판단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신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판결은 옳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처럼 느껴져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조용히 슬픔과 분노를 삼키는 일본과 달리, 한국인은 남에게 들릴 정도로 울부짖고 당연히 남이 들은 척해주길 기대한다.

    부패와 사고가 거듭되는 까닭

    이러한 주체성은 타인의 범죄에 대한 사법 판단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준법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준법의식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패지수도 매우 높고, 교통법규 위반에 의한 교통사고와 사상자 수도 많다. 세월호 사고와 같은 국가재난이 반복되고 다양한 비리가 밝혀진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사회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사태의 원인이 극히 부도덕한 일부 국민이나 지역, 조직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국민 대부분의 공통적인 특성 때문으로 보는 것이 맞다. 국민 개개인이 규정, 법률, 원칙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따르기 때문이다.

    굳이 죄를 저지르거나 법률을 무시하려고 그런 건 아닌데, 결정의 순간에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이 정도면 해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같은 판단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굳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체적 판단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객관적으로 법률만으로 따진다면 다 비리고 규정위반이고 범죄다. 그래서 개개인으로 보면 나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한국 사회에 부패, 비리, 범죄, 사고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냥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무조건 따르기에는 너무나 주체적인 사람으로 꽉 차 있어서다.

    나쁜 권위, 좋은 권위

    20세기 말부터 한국 사회는 각종 권위의 타파에 열을 올렸다. 원래 유교문화적 배경에서 기인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의 억압에 역사적으로 근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 ‘권위는 나쁜 것’이라는 등식이 한국인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권위는 가능하면 철폐하려 노력해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더 민주적이고 더 평등해졌고,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서 잃는 건 없고 얻는 것만 있다는 진리는 권위 타파에도 적용된다. 학교에서는 교권이 무너졌다고 난리치고, 취객부터 범죄자까지 경찰을 거의 동네 지키는 강아지쯤으로 여긴다. 경찰이 두들겨 맞고, 선생이 학생에게 맞고, 사법부 판결에 불복한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한다. SNS 기록을 수사기관에 넘겨준 카카오톡의 법률대변인이 판사가 정식으로 발부한 영장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기록을 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는 이유로 사과하고 사퇴하는 현실을 본다. 그 변호사는 ‘그럼 사법부에서 발부한 영장을 거부하란 얘긴가?’라고 얘기했다가 한마디로 주체성이 약한 인간이 돼버렸다.

    나쁜 권위를 없애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문제는 뭐가 나쁜 권위인지를 누가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각 국민이 주어진 상황에서 알아서 판단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동안 갖가지 불필요한 권위도 무너질 만큼 무너졌고, 군사독재에 대한 한도 풀 만큼 풀지 않았나. 이제는 어떤 권위는 살리고 어떤 권위는 죽일 것인지에 대해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논의해도 되지 않을까.

    판결의 오류를 상식으로 뒤집겠다고?
    허태균

    1968년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사법 판단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럴 수밖에 없기에 자연스러운 오류는 받아들이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오류는 가능한 한 밝혀내고 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 오류 여부를 개개인이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내가 억울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나쁜 놈이 풀려난다는 사법 판단의 한계를 인정할 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게 아니라 외려 신뢰가 형성된다는 역발상의 지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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