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프랑스 파리, 리옹

  • 조인숙 |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대표

    입력2015-03-19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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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대표는 올해 세계건축문화유산 탐방에 나선다. 국제건축사연맹 ‘문화정체성-건축유산’ 위원장 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국제학술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조 대표는 세계유산도시 10여 곳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각 도시의 대표 건축물을 둘러보고 탐방기를 ‘신동아’에 실을 예정이다. 첫 회는 프랑스 파리, 리옹 편이다.
    왕의 거주지였던 창덕궁, 혼(魂)의 사후세계인 종묘 및 백(魄)의 사후세계인 왕릉이 있는 최첨단 미래 도시 서울은 명실 공히 역사도시다. 건축유산이 산재한 도시는 많지만, 인구 1000만이 넘는 한 국가의 수도로서 이렇듯 건축유산이 세 종류나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대도시는 드물다. 육십갑자(六十甲子) 넘도록 서울에서 살면서 궁궐, 종묘 등지에서 익힌 안목으로 세계유산도시를 걷고자 한다. 이 글이 추후 우리나라의 세계유산도시를 보존하거나 정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파리

    프랑스 수도 파리는 ‘센 강변의 파리(Paris, Banks of the Seine)’라는 명칭으로 199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평가 기준의 골자는 창의성, 역사성, 그리고 탁월한 도시 건축의 사례라는 점이다.

    등재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현장 실사보고서에 의하면 파리는 도시 경관의 연속성과 개방성을 유지하기 위해 조망권의 스카이라인까지 고려해 도시건축개발을 제한했고, 이 점에 전문가 평가단은 특별히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강(江)의 도시 파리는 루브르 궁전(현재는 미술관)에서부터 에펠탑까지, 콩코드 광장에서부터 크고 작은 궁전까지 건축유산 및 시가지의 형성과 역사 등이 센 강을 따라 한눈에 보이는 도시다. 12~13세기 고딕 건축물뿐 아니라 19~20세기 파리개조사업의 결과인 광장, 가로수 길 등 나폴레옹 3세와 파리 지사 오스만 남작의 업적도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또한 도시 곳곳에 아르누보 지하철 입구 및 파리의 역사물 표지판 등이 가로 조형물로 남아 기존 건축유산들을 빛내준다.



    아침엔 메트로(지하철)로 진입했고, 저녁엔 버스를 타고 센 강의 반대편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생트 샤펠로 향했다.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장미창.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룬 1931년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이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로 더 유명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센 강의 시테 섬(lle de la Cite) 동쪽 반을 차지하는 고딕 성당이다. ‘파리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이란 의미다.

    문예부흥시대(Renaissance, 14~17세기) 전까지 ‘프랑스 양식’으로 불린 고딕 건축은 12세기에 프랑스에서 시작해 15세기 말 16세기 초까지 성행했던 양식이다. 이 양식의 건축적 특징으로는 공중버팀벽(flying buttress), 교차궁륭(ribbed vault) 및 첨두아치(pointed arch)를 들 수 있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은 버팀도리 또는 공중버팀벽(飛梁)이라는 구조 부재가 최초로 사용된 완벽한 고딕 건축으로 평가된다. 이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외벽에 덧댄 구조물 중 벽체에서 떨어져 나와 기둥에 연결된 독립된 부축 벽이다. 이전 시대의 로마네스크 건축은 원통형 천장의 하중을 벽이 받아 땅에 전달하므로 안정적인 구조가 되려면 벽체가 두꺼워야 했다.

    고딕 양식과 스테인드글라스

    하지만 고딕 건축은 아치를 교차하고 끝을 뾰족하게 해 힘이 분산되게 하고 밖에 별도의 부축 벽을 보강해 건물을 받쳐준다. 이 새로운 하중전달 체계 덕에 내부 공간은 넓어지고 벽체가 얇아지면서 창문을 크게 낼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색 유리창인 스테인드글라스가 발달해 기존의 어두운 성당 내부에 신비스러운 빛을 들이는 계기가 된다. 이후 고딕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2세기 후반 삽질을 시작해 14세기에 완공한 성당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때 많이 파손됐다. 건축가 장 바티스트 앙투안 라쉬와 19세기의 대표적인 복원건축가로 활약한 비올레 르 뒤크 감독의 지휘로 1845년부터 25년간 보수공사가 진행됐다. 보수공사를 하면서 첨탑(fleche)은 높아지고 장식은 더 화려해졌으며 건물에 키메라(Chimera) 조각이 첨가됐다. 이 보수공사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영국의 존 러스킨이 건물의 ‘나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고대 건축의 철저한 원형 보존을 주창한 반면, 프랑스의 비올레 르 뒤크는 수리라는 것은 그 시점(나이)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최종 완성된 상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창했다.

    그 후 세계대전 때 유탄에 맞아 파괴된 하층부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공사 때 현대적으로 재시공됐다. 1991년부터 수리 및 유지관리 계획을 수립해 대대적인 보수를 시작했는데 애초에는 10개년 계획이었으나 지금도 보수 중이다. 2014년에는 많은 조명기구를 LED로 교체했다(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재 수리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Paris)

    센 강의 시테 섬 서쪽, 법원(옛 궁전 건물)에 있는 생트 샤펠은 창호 및 석재 부분에 대한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국제건축사연맹(UIA) 본부에서 전문분과위원장 합동회의가 끝난 후 단체로 현장을 방문했다. 보수공사를 담당한 베룩스사가 초대해 이루어진 공식 방문이었다. 일반 관광객 관람이 끝난 후의 탐방이라 내부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시테 섬은 센 강에 있는 자연적인 섬 두 개 중 하나로 중세도시 파리가 재건된 곳이기도 하다. 서쪽으로는 왕궁, 동쪽으로는 대성당이 있었으며 19세기 말까지는 그 사이가 주거지와 상업지였다. 이후 점차 경찰 건물과 법원 등 관공서로 채워지고 주거지는 서쪽 끝에 조금 남아 있다.

    생트 샤펠은 옛 왕궁 부속감옥인 콩시에르제리와 함께 시테 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부속 감옥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기 전까지 지낸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빛을 사방으로 방사한다’

    성(聖)스러운 예배당이라는 의미의 생트 샤펠은 가시면류관, 에데사 성화상 등 예수 수난 관련 유물인 루이 9세의 소장품을 수장하기 위해 궁전 내에 지어진 중세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다. 1239년경 건립을 시작해 1248년 봉헌됐는데 프랑스 고딕 시기 중 ‘빛을 사방으로 방사한다’는 뜻을 지닌 러요낭(1240~1350년) 기(期)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러요낭이라는 용어는 당시 풍미했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rose window)의 사방으로 향하는 창틀 때문에 미술사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프랑스혁명 때 심하게 파괴된 것을 복구했는데 파괴될 때 첨탑과 금란(Baldachin)이 철거되고, 유물은 이리저리 분산됐다. 창호의 3분의 2가 원래의 것이기는 해도 오늘날의 모습은 거의 재창조된 것이며, 흩어진 유물은 모아서 현재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성보박물관에 수장해놓았다.

    생트 샤펠도 19세기에 보수공사가 진행됐는데 건축가 자크 펠릭스 뒤방의 진두지휘로 1855년 수리를 완료했다. 장 바티스트 앙투안 라쉬와 비올레 르 뒤크도 이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이때 수리보고서가 아주 잘 정리돼 동시대 문화재 수리의 좋은 예로 간주됐다. ‘보석상자 구조’라고 불리는 이 예배당은 다른 건물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공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관람객 탓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심하게 손상돼 동시출입 인원수를 통제한다. 1970년 이래 지속적인 보수공사를 하는데 재원의 대부분을 개인 기부금에 의존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루이 9세 탄생 800주년인 2014년에는 완료되기를 갈망했으나 여전히 수리 중이다.



    파리 메트로의 아르누보 입구(The Paris Metro, Art Nouveau Entrance ca. 1900)와 스타크의 노(Starck Oars)

    생트 샤펠에 가느라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시테 역에서 내리니 엑토르 기마르(1867~1942)가 설계한 아르누보 메트로 출입구다. 1899년 파리 지하철 운행을 앞두고 출입구 설계에 대한 공공건축물 설계경기가 진행됐다. 우여곡절을 거쳐 아르누보(1890~1910년에 가장 활발했던 당대 건축운동)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설계 기회를 갖는다.

    그는 부챗살 모양의 프레임 위에 유리 덮개가 있는 유형과 아예 덮개가 없는 유형 두 종류의 입구를 설계했다. 식물을 형상화한 이 주철제 조형물은 지금에 와선 프랑스 아르누보의 고전적인 예로 간주된다. 1900~1912년 사이에 141개의 입구가 지어졌고 그중 86개는 아직도 사용 중이다. 시테 역의 입구는 덮개가 없는 유형이다. 마침 숙소 앞인 이탈리아광장 역도 같은 유형이라 밤낮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파리에서 거리를 걷다보면 건물에 연도나 건축가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역사물 표지판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산업디자이너 필립 스타크가 설계한 것으로 스타크의 노(Starck Oars)라고도 한다. 이는 단순히 노 형상의 조형 때문이 아니고 ‘파도에 의해 흔들리기는 해도 절대 전복되지 않는다’는 파리 시의 라틴어 모토를 기리면서 배의 노를 떠올리기 위한 것이라 한다. 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파리 시장이던 1992년 지서더코사에 의뢰해 설치한 건축유산 설명 패널이다. 옥외광고물 회사 지서더코는 공공자전거 렌털, 버스정류소 광고, 가로 조형물 등으로 유명한 다국적기업이다. 필립 스타크는 767개의 패널을 디자인했다.



    ◇ 리옹

    가끔 파리에 가도 리옹은 방문하기 힘들었다. 회의 핑계에, 또 멀어서 선뜻 방문하기 어려웠는데 세계유산도시를 걷다보니 500km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공식 일정이 끝난 다음 날 아침 파리를 출발해 TGV로 두 시간을 달려 리옹으로 갔다.

    도시 정주의 연속성

    프랑스 남부의 역사도시 리옹은 10개의 평가 기준 중 두 개의 평가 기준에 부합된다고 인정받아 ‘리옹의 역사지구(Historic Site of Lyons)’라는 명칭으로 1998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됐다. 두 평가 기준은 도시 정주(定住)의 연속성과 도시 건축의 발전과 진화라는 점이다.

    리옹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인에 의해 갈리아의 수도로 창건된 후 지속적으로 유럽의 정치, 문화,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리옹의 오랜 역사는 다양한 도시 조직과 여러 세기에 걸쳐 지어진 수많은 건물로 생생하게 설명된다.

    ‘구현된 유토피아, 20세기 건축의 다른 견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는 리옹 지역 다섯 곳의 혁신 주거지 개발은 미래 비전을 가진 건축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막강한 후원자들의 협력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새로운 건축과 도시계획이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할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이 다섯 곳의 사회적 프로젝트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인구에 회자됐다. 리옹 및 빌뢰르반에서 시작한 선구적인 아방가르드는 에보와 퍼르미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퍼르미니는 재건축 및 고층단지라는 맥락 속에서 모더니티가 풍미했던 곳이다. 지보흐에서는 삼각형 디자인의 조합으로 도시 건축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중 유토피아의 정점을 찾아 걷는다.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리옹 라 투레트 수도원.

    쿠벵 생트 마리 드 라 투레트(Couvent Sainte Marie de La Tourette, Le Corbusier, 1959)-유토피아의 정점

    리옹 역에서 지역기차로 라브렐르로 가서 택시를 대절해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차가 멈춘 곳에서 내려다보니 숨이 멎을 듯한 광경이 눈앞에 전개됐다. 책으로, 영상으로만 접하던 라 투레트 수도원!

    건축을 한다며 40여 년 지내온 후 대가의 작품을 직접 보니 눈에, 가슴에 보이는 것이 완전 달랐다. 이 수도원에서 잠자고 식사하고 체험하다보니 우리 건축에서는 어떻게 체험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생각하게 됐다.

    후기 모더니즘 최고 걸작

    새소리만 들리는 고적한 곳에서 숙박 및 식사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 건물 입구에서 내외 공간을 구획하는 콘크리트에 뚫린 문은 우리 창덕궁 후원 애련지 부근의 불로문을 떠오르게 한다. 크고 작은 마당 또한 서양만의 것은 아니었다.

    쿠벵 생트 마리 드 라 투레트는 리옹 근처 에보라는 지역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수도원이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사무실 직원인 음악가이자 건축가 이아니스 크세나키스와 협력 설계해 1956~1960년 시공한 작품으로 후기 모더니즘 양식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건축이다.

    이 수도원은 도미니칸 수도사이자 예술가인 마리 알랭 쿠트리에가 지지하던 예술운동 ‘성스러운 예술(Sacred Art)’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수도사들의 각 실 개개인 생활과 교육실에서의 지적인 생활, 챕터(단체 모임실)에서의 공동생활, 식당 및 예배당 생활 간에 조화를 추구한다는 요구사항을 제대로 반영한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1953년 5월 르 코르뷔지에가 최초 스케치를 함으로써 설계가 시작됐다. 이 건축물은 사실 12~13세기 건축된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르 토로네 수도원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마크 샤갈, 페르난드 레제, 앙리 마티스나 피에르 본아르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수도사 쿠트리에가 1953년 라 투레트 수도원 설계를 의뢰할 때 르 코르뷔지에한테 서한을 보냈다. 요약하면 이렇다.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생트 피에르 교회 전시실.

    “르 토로네 수도원을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아마 무척 좋아하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당시 수도원의 정수를 당신은 발견하실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침묵으로 서원(誓願)하고, 자기 성찰과 명상으로 헌신하며, 공동생활을 영위했던 곳으로 시간이 흘러도 별로 변하는 것이 없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르 토로네 수도원을 방문하고, 후기에 “빛과 그림자가 이 건축의 진리(진실의 건축이라고도 한다)를 대변하는 확성기다”라고 썼다. 라 투레트 수도원 설계엔 르 토로네 수도원의 주안점이 상당히 반영됐다. 타워나 단순 조형, 그리고 벽에 떨어지는 빛을 활용한 채움과 비움의 공간들로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작품

    폭 1.83m×깊이 5.92m×높이 2. 26m의 숙실(cellule, 수도사의 개인 공간으로 작은 방이라는 뜻)은 폭이 좁고 천장도 높지 않으나 깊이가 깊어서 방의 체적이 어느 정도 유지되므로 공기 순환에 적당하고 쾌적하며 산을 향한 발코니가 자연과의 매개 공간 구실을 하며 좁고 긴 개구부 문을 열면 외기가 실내로 직접 들어온다.

    거리는 멀지만 유토피아 구현 다섯 개 프로젝트의 종착역인 퍼르미니-베르를 방문하기로 했다. 수도원에서 반시간 이상 걸어 내려가야 라브렐르 역까지 갈 수 있다. 거의 구르다시피 산을 내려와 막 떠나려는 기차를 타고 다시 리옹으로 향했다. 퍼르미니 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종착역에서 내리니 호세 우브러리가 스승 르 코르뷔지에 사후 41년 만인 2006년 완공한 생트 피에르가 눈앞에 전개됐다. 이는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설계 작품이다.



    퍼르미니-베르, 생트 피에르(Saint-Pierre, Firminy-Vert Le Corbusier 1969, completed by Jose Oubrerie, 2006)

    퍼르미니-베르는 1964~1969년 퍼르미니에 조성한 일련의 건축물로 생트 피에르 교회(1969~2006), 스타디엄(1966), 문화센터(1965), 유니테다비타시옹(1964) 등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군(群)이다. 이들은 건축의 모더니즘 원칙에 입각해 설계됐으며 전후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도시 및 건축계획의 사례로 간주된다.

    생트 피에르는 애초에는 시범 도시 퍼르미니-베르의 로만 가톨릭 교회로 설계됐으나 현재는 교구에 속하지 않는다. 르 코르뷔지에 서거 6년 후인 1971년 공사가 시작됐는데 시공자 파산과 정치적인 이유로 1975년 이후 2003년까지 중단돼 폐허로 남았다.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조인숙

    1954년 서울 출생

    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박사(건축학)

    서울시 북촌보존 한옥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자체평가위원회 위원, 서울시 건축위원회 심의위원

    現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대표,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역사건축구조 국제학술위원회 부회장, 국제건축사연맹 문화정체성-건축유산위원회 국제공동위원장


    1995년 프랑스 유산위원회는 짓다가 만 상태로 폭격을 당한 듯 남은 콘크리트 형체를 더 이상 손상하지 말라는 의미로 ‘건축유산’으로 지정한다. 2003년 지방자치단체에서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프랑스 법으로는 공공기금을 종교건축에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당이 아닌 문화시설로 완공하게 된다. 그러나 지붕에 십자가는 그냥 얹었다. 그동안 중등학교, 안식처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돼왔다.

    2010년 세계건축 여론조사에 의하면 21세기 완공된 건축물 중 두 번째로 멋진 건물로 평가되는 걸작이라고 한다. ‘구현된 유토피아’ 전시실을 비롯한 각종 전시실, 컴퓨터 코너 등이 있고 상층부는 예배당이다. 빛을 내부로 들이는 기법은 르 코르뷔지에의 이전 작품들과 유사하나 느낌은 다르다.

    라브렐르 역으로 되돌아오자 어둑어둑해졌다. 무섭지만 용기를 내어 인적도 없고 외등 하나 없는 깜깜한 밤 산길을 걸어 라 투레트 수도원에 간신히 돌아오니 저녁식사는 이미 시작됐다. 주말 예술제 행사를 위해서 속속 도착하는 화가, 음악가, 수사들과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 후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귀국 전 마지막 밤을 맞았다.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시테 섬 서쪽 생트 샤펠.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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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성, 역사성으로 유토피아를 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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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리 센 강변의 노트르담 대성당.

    2 시테 역 아르누보 입구.

    3 디자이너 필립 스타크가 설계한 스타크의 노.

    4 파리 생트 샤펠 교차궁륭 스테인드글라스.

    5 리옹 라 투레트 수도원 예배당 내부.

    6 퍼르미니-베르 생트 피에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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