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서울은 인구 1000만의 세계적 대도시이자 곧 5개의 등재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는 세계적 유산도시다. ‘세계유산도시를 걷다’ 마지막 회로 너무도 가까이에 있어 잊고 지내는 우리의 세계유산을 돌아본다. 창덕궁, 종묘, 정릉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어우러져 살아온 우리 조상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한다.
조선시대(1392~1910) 왕실 관련 세계유산인 창덕궁과 그 후원, 종묘 및 조선왕릉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궁(宮)은 왕과 왕비의 생전의 집이고, 종묘(宗廟)는 하늘로 떠난 영혼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혼(魂)의 집이며, 왕릉(王陵)은 땅에 묻혀 음덕을 베푸는 육신에 제례를 지내는 넋(魄)의 집이다.
이들이 등재 유산이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개념이 내재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주 건축물과 외부 공간의 관계 △음양의 조화. 다시 말해 궁, 종묘, 왕릉의 위치를 정할 때 풍수이론에 입각해 가장 적합한 자연환경을 찾아 자연에 의지하며 조영했다는 점, 주 건물 또는 봉분이 마당으로 에워싸이고 그것이 다시 담으로 둘러싸인다는 점, 그리고 제례를 통해 삶과 죽음이 만난다는 점 등이다.
창덕궁
창덕궁의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뉜다. △부용정, 주합루, 영화당이 있는 부용지(芙蓉池) 일원 △애련정과 기오헌 등이 있는 애련지(愛蓮池) 일원 △관람정, 존덕정 등이 있는 관람지(觀纜池) 일원 △소요암,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등이 산재한 옥류천(玉流川) 일원.
이렇듯 물을 중심으로 구분되는 네 영역의 정자들을 둘러보고 나서 19세기 초 궁궐 후원에 지은 연경당을 거쳐 후원에서 되돌아 나온다. 낙선재 일곽과 침전인 대조전과 희정당을 둘러본 뒤 편전인 선정전, 정전인 인정전 영역을 돌아본다. 인정전과 너른 조정은 가장 권위적이고 괄목할 만한 규모의 건축물이기에 마지막으로 볼 것을 권한다. 즉, 자연(nature)에서 인공(man-made)으로, 작은 규모에서 큰 규모로 탐방하는 것이다.
후원의 물과 정자
창덕궁 후원에서 관심 있게 봐야 할 것은 연못을 중심으로 놓인 정자의 위치와 방향이다. 후원은 수목(樹木), 물(水), 정자(亭子) 등이 기하학적으로 구성됐거나 자연 지형지물이 그대로 활용됐다. 수려한 자연 속에 조그마한 정자를 여럿 지어 그 안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내다보게 지었다.후원에서 물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옥류천 일대처럼 물줄기를 따라 좌향(坐向)으로 정자를 배치하거나, 부용정과 애련정 일대처럼 못을 파고 물을 담아 정자의 초석(건물의 다리와 발)을 물에 담가 못을 거울 삼아 정자를 투영시키거나, 환경을 쾌적하게 해주는 등 그 역할이 다양하다. 정자들의 초석 중 두 발만 물에 담가둔 것은, 더운 여름 선인들이 자연 속에서 피서하는 모습을 의인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옥류천 일대의 청의정(淸?亭)은 초가지붕의 사모정인데, 4각 평면의 네 원기둥 위에 팔각으로 원형 도리를 놓아 64개의 서까래를 받치며, 그 위를 둥근 초가지붕으로 덮었다. 하늘(원형 지붕)과 인간(팔각 평면의 도리)과 땅(네모난 평면)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논은 원래 연못이었는데, 훗날 농경문화 스토리를 부여하려고 논으로 바꾼 것이다.
19세기 궁궐 후원에 지어진 연경당(演慶堂)으로 들어서려면 실개천 위에 세워진 너른 돌다리를 건너 장락문(長樂門)을 통과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 장락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작교로 은하수를 건너는 것에 비유된다. 이 비유를 응원하는 것인지, 너른 돌다리 부근 돌확에는 계수나무와 네 마리의 두꺼비가 있다.
낙선재(樂善齋)도 19세기에 지어졌다. 주 출입문은 장락문으로, 장락문을 지나 낙선재 뒤뜰 높은 곳에 가면 상량정이 나온다. 2015년 독일 베를린에 통일을 염원하며 건립한 ‘통일정’의 본이 된 정자다.
낙선재 일곽은 가장 동쪽의 마당에서부터 둘러보길 권한다. 동쪽에서부터 수강재-석복헌-낙선재로 이어지는데, 각각의 집은 저마다의 뒤뜰과 정자가 하나씩 있다. 각 집이 연결되고 구분되는 기법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공간의 크기, 담의 높이, 담을 장식한 문양들로 건축의 위계도 알 수 있다.
낙선재 마당을 에워싼 담에는 거북 등의 문양을 넣어 장수를 기원했다. 낙선재 누마루 하부에서 뒤틀림을 보강하는 목재는 구름 문양이다. 누마루에 앉으면 구름 위에 앉은 격이다.
연경당과 낙선재에서는 한국 건축의 단위 공간이 크든 작든 중심 건물과 이를 에워싼 마당, 또 이를 둘러싼 회랑이나 행각, 또는 담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심 건물의 대청은 앞마당의 뜨거운 공기와 뒷마당의 찬 공기가 서로 맞부딪쳐 시원한 공간이 되는 것도 알 수 있다.
종묘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왕실 사당이다. 14세기 말 처음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7세기 초에 중건됐다.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을 거듭했다. 19ha의 경내는 주 공간인 정전(正殿)과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뉜다. 이 밖에 재실, 전사청, 향대청 등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따로 모신다. 정실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뒀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뻗어 가는데, 가운데 약간 높은 길이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라고 한다. 삼도와 망묘루(望廟樓) 사이 네모난 연못 가운데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둥근 섬이 있다. 소나무를 심는 대개의 궁궐 연못 섬과 달리 여기에는 향나무를 심었다.
종묘 정전 일곽은 담으로 둘러싸였다. 너른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神門), 동서쪽에는 동문(제례 때 제관이 출입)과 서문(제례 때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이 각각 있다. 담 안에는 동서 109m, 남북 69m 크기의 넓은 묘정 월대(月臺)가 있다. 월대란 궁궐의 정전이나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 형식의 대(臺)를 말한다.
종묘 영녕전(永寧殿) 일곽은 종묘의 별묘(別廟)다. ‘영녕’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릉
조선왕릉 중 현재 북한 개성에 있는 2기, 즉 제릉(齊陵, 태조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능)을 제외하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서울 및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다. 이 가운데 단종의 능인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과 여주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인 영릉(英陵), 그리고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제외한 왕릉은 서울에서 약 40km 이내에 있다. 조선시대의 축척으로는 100리에 해당하는 거리다.서울 및 근교의 조선왕릉 40기가 등재 당시 세계유산적 가치로 특히 부각된 것은 조선시대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자연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고, 왕실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져 ‘살아 있는 전통’으로 연계되고 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릉 40기 중 서울에 있는 왕릉은 다섯 지구, 8기다. 그중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둘러보자.
정릉의 운명
고려 말 당시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던 풍습에 따라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태조의 향처 한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에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됐다.
1396년 태조는 극진히 사랑하던 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취현방(聚賢坊, 현재의 정동)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만들어놨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즉위 후 140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이듬해 도성 밖 사을한리(沙乙閑里, 현 정릉)로 정릉을 옮기도록 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고, 그 밖의 목재와 석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쓰도록 했다고 한다. 현종(顯宗·1641~1674) 때인 1669년에 이르러 신덕왕후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정릉은 제대로 된 왕릉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조선왕릉은 진입 공간-제향 공간-능침 공간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직선축을 따라 공간이 구성되는 데 반해 현재 정릉은 지형에 따라 축이 꺾인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흙을 반구형으로 쌓아 올린 채로 있다.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石),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히고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장명등(長明燈)은 조성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 석물은 현종 때 새롭게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장명등은 조선 건국 후 처음으로 조성한 것으로,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조선의 궁, 종묘, 왕릉은 순서 없이 각각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관리, 보존되고 있다. 당시 기준에 고려되지 않은 칠궁, 사직단 및 원구단 등도 언젠가는 연속유산으로 추가 등재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유산 관리 기준 등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神主의 의미신주(神主)란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어놓은 작은 나무패다. 우리 조상들은 돌아가신 분들의 혼이 신주에 깃들어 있으며 신주에서 쉬어 간다고 생각했다. 자손은 신주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고, 전쟁이나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신주를 구했다. 신주에 모신 분의 혼은 제사상에 향을 피우면 잠시 현세로 돌아온다고 여겼다.
陵·園·墓조선시대 왕실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 : 추존 왕, 추존 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종실로서 임금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 다양한 형태의 봉분 ▼
왕릉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에 따라 조선 왕릉은 다양한 봉분 형태를 보인다. △단릉 :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각각 단독으로 조성했다. △쌍릉 : 평평하게 조성한 언덕에 하나의 곡장을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쌍분으로 만들었다. △합장릉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했다. △동원이강릉 : 하나의 정자각 뒤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象說)을 배치했다. △동원상하릉 : 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조영했다. △삼연릉 : 한 언덕에 왕, 왕비,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둘렀다. △동봉삼실 : 왕, 왕비,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했다.
조 인 숙
● 1954년 서울 출생
● 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박사(건축학)
● 서울시 북촌보존 한옥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자체평가위원회 위원, 서울시 건축위원회 심의위원
● 現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대표,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역사건축구조 국제학술위원회 부회장, 국제건축사연맹 문화정체성-건축유산위원회 국제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