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호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대흉년과 현종의 병역 대책

신뢰는 임금의 보물이다

  • 입력2018-07-11 17: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무리 부유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라도 스스로를 지킬 군사력이 없으면 외적의 침입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군대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대는 국가와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된다. 

    현종 11년(1670)과 12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고 전염병까지 돌아 백성의 삶은 전쟁을 치른 것보다 더 참혹할 정도였다. 전근대 시기에는 천재지변이 임금의 실책이나 부덕 때문에 발생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이에 현종 13년(1672) 3월 16일, 임금은 대신의 건의에 따라 자신의 죄를 자책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여기에는 죄지은 자를 사면하고 죽거나 도망간 사람들에 대한 징포(徵布)를 탕감해주는 대책과 함께 3년간 병력을 충원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에도 세금과 병역이 백성의 가장 큰 고충이었기에, 제대로 시행되기만 하면 조금이나마 백성의 고난을 구제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는 조치였다. 그러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다음은 같은 해 6월 23일의 기사다.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 : 흉년으로 인해 6월에 정기적으로 병력을 충원하는 세초(歲抄)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초군(精抄軍)과 포보(砲保)는 이미 그전에 충원하였으니, 대궐의 호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응사(鷹師)도 정해진 날에 주상께 올릴 꿩고기의 공급을 맡고 있기 때문에 궐원이 생길 때마다 충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간의 계사로 인해 병력을 충원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물어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종 : 응사도 포보의 예에 따라 똑같이 충원하도록 하라.



      <현종실록 13년 6월 23일>  



    정초군은 병조 소속의 병사 중에서 선발한 정예병으로 궁궐의 호위를 담당했다. 포보는 훈련도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둔 병역의 일종으로, 직접 복무하지 않는 대신 포(布)를 납부했다. 훈련도감은 유사시에는 수도 방위를, 평시에는 군사들의 훈련과 임금의 호위 임무를 맡은 군영(軍營)이다. 3년간 병력을 충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불과 3개월 전인데, 궁궐과 임금의 호위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정초군과 포보는 예외적으로 병력을 충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병조 판서 민정중은 응사도 예외로 두어 인원이 비면 충원하자고 건의했고, 현종이 윤허했다. 응사는 매를 사육하고 매사냥을 해서 왕실에 진상할 꿩을 잡는 특수 병종이었다. 병역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정초군, 포보와는 달리 국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그럼에도 충원을 명령한 것은 그들이 임금에게 주기적으로 올릴 꿩고기의 공급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교서에서 현종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맞아, 수라상에 올리는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호위 무사 인원을 감축하는 등 솔선수범해 검약의 미덕을 실천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응사가 바치는 꿩고기는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병역 대책을 번복한 것은 백성의 부담을 가중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백성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데 있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신뢰는 임금의 보물이다. 자고로 백성에게 신뢰를 잃고도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린 임금은 없었다. 금년 봄에 주상께서 특별히 자신을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 안에 각종 군병의 빈자리를 3년 동안 보충하지 말아서 백성들의 살림이 필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주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누군들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묘하게 명분을 만들어내서는, 대궐의 호위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정초군을 보충했고, 정예병을 키우는 데 재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포보를 충원했으며, 주상에게 올릴 꿩고기의 공급을 맡았다는 이유로 응사를 충원하는 등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장정들을 찾아내 군역을 부과하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은 뒤숭숭하여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되었으니, 백성에게 신뢰를 크게 잃고 만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주상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여 끝내는 조정이 신뢰를 잃게 하였으니, 그 안타까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현종실록 13년 6월 23일>

    큰 흉년과 전염병으로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던 백성에게 임금이 교서에서 내세운 대책들은 지옥 구덩이 속에 내려진 한 가닥 동아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한시적으로 군대에 징발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으니, 백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다시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백성에게 내려진 것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조정은 이런저런 구실로 다시 병역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그 정도가 교서를 내리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심했다. 이렇게 되면 국가에 대한 백성의 신뢰는 무너지고, 간신히 찾은 희망은 앞날에 대한 절망과 임금에 대한 원망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병력의 수나 무기의 질적 수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경제, 정치, 외교 등 다양한 방면의 국가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국가 구성원들의 안보관과 국가관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잘못된 정치로 인해 내부의 신뢰와 결속이 무너지고 국가의 존재 의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면 이는 강한 외적의 침입만큼이나 위험한 상황이다. 사관의 비판과 우려는 바로 이 점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후로도 조선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고질적인 폐단에 시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지배층의 무능과 횡포는 도를 더해갔고, 백성의 삶은 날로 황폐해졌다. 국가는 백성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고, 백성들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불치병과도 같은 국가에 대한 불신과 절망은 조선 후기와 말기에 민란의 급증이라는 형태로 그 증상을 드러냈다. 외세의 침탈이 있기 전에 조선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