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4세기의 전국시대 형세도.
‘세 치’ 혀로 나라 구하다
특히 전국시대(기원전 480∼기원전 222)는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나 서로 대치하며 호시탐탐 상대를 노리는 한층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다.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전쟁 · 연합 · 분열 · 이간 · 포섭, 빈번한 왕복 외교, 무궁한 음모와 계략 등으로 전국시대 특유의 복잡한 정국이 조성됐다. 정세는 갈수록 미묘해졌고, 지혜로운 외교전략은 더욱 절실해졌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무력에만 달린 것이 아니었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정치(외교)로 결정되지 무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조정과 종묘사직의 안위는 전략과 정책에서 결정나지 전쟁터에서 군대가 서로 마주치는 것에서 결정나지 않는다.
무력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정치(외교)를 활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외교에서 승리를 거두지, 전쟁에서 승리를 얻진 못한다는 뜻이다. 전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책략이다. 성 밖에서 벌이는 야전은 수준 낮은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각국의 세력이 흥하고 쇠하는 모순의 틈을 이용하고 확실한 책략으로 외교를 펼친 끝에 위급한 상황을 타개함으로써 마침내 싸우지 않고 승리를 얻은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 외교(유세) 전문가의 한 사람이던 이사(李斯)는 “지금 바야흐로 대국들이 서로 다투고 있지만, 그 일을 주도하는 자는 유자(游者, 유세가)들”이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그 몰골이 남루하기 짝이 없던’ 소진(蘇秦)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유세”함으로써 당시 6국을 대표하는 공동 재상의 인장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남다른 담력과 지략, 총명한 지혜로 열두 살 나이에 세 치 혀로 국가를 위기에서 여러 차례 구해낸 감라(甘羅)도 있다.
伐謀는 상수, 攻城은 하수
전쟁에서 직접 몸을 던져 싸우는 군사 전문가들도 무력 수단보다 외교가 훨씬 차원 높은 책략이란 사실을 잘 안다. 손무(孫武 · 기원전 545~470)는 외교와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군사 전문가다. 그는 군사학의 바이블 ‘손자병법’에 이렇게 썼다.
최상의 전쟁은 적의 계획(전략, 모략)을 분쇄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적의 외교를 파괴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무기로 정복하는 것이고, 가장 못한 방법은 적의 성곽을 공격하는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한 경우에 쓰는 것이다. -‘모공(謀攻)’편
최상의 병법(上兵)으로 상대의 모략, 즉 전략을 분쇄하는 ‘벌모(伐謀)’를 꼽은 것이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상병벌모(上兵伐謀)’다. 물론 이를 실행에 옮기려면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쥐고 있어야 한다. 일찍이 ‘손자병법’에 대해 최초의 해설서를 남긴 조조(曹操)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상병벌모’를 이렇게 해석했다.
군사를 일으켜 멀고도 깊숙이 들어가 그 성곽을 점거해 내외를 단절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나라를 들어 굴복게 하는 것이 최상이다.
조조는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기반으로 하되, 여기에 ‘벌병(伐兵)’과 ‘공성(攻城)’을 배합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승리를 낚아 적 전체를 항복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봤다. 이는 상대의 철저한 소멸을 위한 군사 투쟁도 아니고, 또 죽어라 싸우는 단순한 군사적 공격과도 다르다. 우수한 지휘자는 먼저 모략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을 중시한다. 피를 흘리지 않고 완전한 목적에 이르는 것이다.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전국책’. 당나라 곽자의는 변방 민족 30여 만이 쳐들어와 위기에 빠진 상황에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외교로 나라를 구했다(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