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철 기자
원로 사학자 이기동(72) 동국대 석좌교수는 칠순을 넘긴 요즘도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서 책 속에 파묻혀 지낸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연결된 이 교수와의 전화 통화.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풍토를 보라. (교과서 집필 못하게) 협박하고, 위협하고…. 순수한 학문적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역사교수라는 사람들도 다 당파심에서 출발한 거다. 노론 소론만 없을 뿐 조선 말 당파싸움보다 심하다. 국정교과서를 찬성한다고 하면 원색적인 비난에 인격까지 박탈하는 수준이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낀 듯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누군가는 설명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설득에 이틀 후 잠시 시간을 허락했다. 지방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고쳐본들…”
이기동 교수는 고대사 분야의 권위자다. 근현대사에도 조예가 깊다. 30여 년 전 펴낸 ‘비극의 군인들’을 2년 반째 증보작업 중이다. 이 책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945년까지 구한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고위 장교들에 대한 기록으로 한일 근대사의 ‘비록(秘錄)’이다. 또 ‘전환기의 한국사학’ ‘민중사학론’ ‘민중문화 운동론’을 펴내는 등 국내 사학계 흐름에도 밝다.
이 교수는 1997년부터 9년간, 그리고 지난해 보궐로 위촉돼 올해 10월 25일까지 1년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기존 검인정교과서의 문제는 좌편향된 역사 기술보다 이를 집필한 민중사학자들의 비틀린 심리 상태라고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게 역사를 기술하는 저자의 심리와 정신 상태다. 민중사학 신봉자들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어려운 말로 ‘무단(武斷)’을 쓴다고 하는데 견강부회, 과장, 지적 사기, 거짓 등 사술(詐術)을 마음대로 쓴다. 그게 역사교과서 행간에 그대로 나타난다. 만약 앞으로도 검인정제를 유지한다면 필자는 내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이 고쳐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나.”
▼ 검인정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인가.
“예를 들어 보천보전투 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당시 보도사진을 뺐다고 해서 바로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천보전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봐야지. 보천보전투는 사건 자체가 초라하다. 당시 김일성 조직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하부조직이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공산혁명을 위해 조선인인 김일성에게 청부 일감을 준 것이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 상당수 검인정교과서는 북한 김일성이 이끈 부대가 일제강점기에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해 승리한 전투를 당시 보도 내용과 함께 소개했다가 교육부로부터 일부 내용 수정 및 보완 권고를 받았다. 보천보전투는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 김일성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 건 사실 아닌가.
“이 사건을 왜곡하라는 것이 아니다. 크게 알릴 필요가 있느냐다. 임시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 독립운동기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를 기술할 때는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 공평성이 결여되면 안 된다.
내가 가끔 허위의식이라는 말을 쓴다. 역사교과서는 우리 청소년의 정신, 그리고 영혼과 관련됐다. 그런데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이 이런 엄청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더군다나 사진까지 붙여가면서. 이건 남한을 망신주려는 허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집필한 교수들은 대한민국에서 상위 5%에 들어가는 특권층이다.”
“교육정책 10년간 파행”
▼ 민중사학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등 사회주의가 몰락했다. 그런데 국내에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급속도로 민주화하면서 이런 세계의 사조와 정반대 흐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사상적으로 큰 과도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에 앞장선 한국역사연구회가 바로 6월 항쟁 이듬해인 1988년 당시 소장파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라는 책과 ‘역사와 현실’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 기존 역사학계에 정면 도전했다. 지금 보더라도 좌편향이 아주 심했다. 이들의 합동 연구 성과물은 10년 정도 곧잘 나오다가 이후 뜸해졌다. 그로부터 5~6년 후(2002년)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오면서 그 단체에 소속된 교수와 중·고교 교사 등 30여 명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교과서 제작에 기존 역사학자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기동 교수는 “정부가 당초 검토한 대로 검인정을 2종 정도로 강화했다면 지금처럼 여론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조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