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에서 눈치 없는 말을 하면 “너 외지인이지?”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만큼 상하이인들은 자신을 중국과는 별개의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고 이 첨단 도시의 삶이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상하이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50년을 모아야 한다.
상하이 인민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서양 친구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훙커우 공원,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지? 녀석은 인민공원에 가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 밖의 구체적인 정보는 전혀 몰랐다. 그저 소문 하나만 듣고 오다니! 서양인의 모험정신과 연애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100년 전 서양인들도 일확천금의 소문만 믿고 상하이를 찾았겠지.
‘절대甲’ 상하이 호구
하여튼 신기한 얘기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여러 게시물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게시물에는 사람들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다. 이름, 나이, 학력, 경력, 키 등등. “여기는 그저 인력시장 같은데? 직업 구하는 사람들의 정보 같아.” 이렇게 말하자마자 불현듯 깨달았다. 인력시장은 인력시장인데, 노동력이 아니라 배우자를 구하는 거라면? 저 많은 정보가 결혼 정보라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중매쟁이라면?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다.
다시 찬찬히 게시물을 훑어봤다.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호구다. 상하이 여자는 ‘후뉘’로 따로 분류했고, 다른 지역 여자는 호구 말고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창저우의 재주 있는 여자(常州才女)’는 피아노 10급이고 전국청년성악 1등상을 탔다. 아버지는 ‘외지’의 공안, 어머니는 정부의 부국장으로 집안도 빵빵하다. 저장성 여자는 부모가 사업가로 집도 있고 차도 있다며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물론 나이가 제법 많은 여자들도 있지만, 조건 좋은 20대 초반 여자도 많았다. 중국 여자는 대체로 20대 중반에 결혼한다.
신랑감 후보 역시 상하이 호구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외지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건 당연했다. 상하이 호구를 얻기 위해서니까. 의외는, 상하이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거였다. 이 경우는 호구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상하이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상하이 여자들의 고집이 읽힌다.
결혼시장에서 상하이 호구, 상하이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 그 서양 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중국 여자들이 남자친구가 아니라 진지하게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것에 우선 실망. 그리고 콧대 높은 중국 여자들의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없어 절망했지.
상하이의 약칭은 ‘강 이름 호’자다. 송강(松江) 하류 지역인 상하이를 지칭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통발을 뜻한다. 물고기를 잡고 살던 어촌. 바로 최첨단 국제도시 상하이가 지닌 ‘출생의 비밀’이다.
전쟁이 선물한 번영
‘삼국지연의’의 애독자라면 송강농어라는 말이 귀에 익을 것이다. 조조가 잔치를 열었을 때 불청객 도사 좌자가 나타나 “잔치라면 송강농어 정도의 별미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딴지를 걸었다. 동진의 대사마(국방부 장관) 장한(張翰)은 고향의 농어가 그리워 낙양의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때 장한은 “가을바람 불어와 경치 아름다울 때, 오강에는 농어가 살찐다네(秋風起兮佳景時, 吳江水兮魚肥)”라고 노래했다.
송강농어는 송강의 자랑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오늘날의 초거대 국제도시 상하이는 원래 농어밖에 자랑할 게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청나라 말기까지 상하이에는 열 갈래의 도로밖에 없었고, 인근의 쑤저우가 중심이라 ‘작은 쑤저우(小蘇州)’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상하이의 발전은 아편전쟁(1840~42)에서 비롯됐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상 그 자유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아먹을 자유였다. 영국 국회가 아편전쟁에 대한 결의안을 논의할 때 토리당원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릴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의회 투표 결과는 찬성 271표 대 반대 262표. 아홉 표 차이로 아편전쟁 결의안이 통과되자 글래드스톤은 “262… 영국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라고 한탄했다.
영국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으로 청군을 격파하고, 난징조약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조계지를 얻었다. 영국은 난징조약을 기념해 상하이 중심가를 난징루(南京路)라고 이름 붙였다. 치욕의 이름이지만 난징루는 세계적인 번화가로 성장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인 아편전쟁은 상하이의 개항과 번영을 가져왔다.
개방 후 20년도 안 돼 상하이 수출액은 중국 무역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1870년에 이르니 중국 최초이자 최대의 무역 항구인 광저우는 상하이에 비하면 구멍가게처럼 보이게 됐다. 당시 광저우가 중국 무역의 13%에 머무른 반면, 상하이는 63%로 중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상하이는 전기, 수도, 전차, 가스등 등 최첨단 기술과 문물을 서양과 거의 동시에 도입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지 반 년 만에 상하이도 영화를 상영했다. 1930년대 상하이 사람들은 재즈를 들으며 댄스홀에서 찰스턴 춤을 췄다.
‘I Shanghai You’의 뜻
검색 엔진인 고유명사 ‘Google’이 ‘검색한다’는 뜻을 갖는 것처럼, 영어에서는 자주 명사가 동사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상하이한다(shanghai)’라는 동사는 무슨 뜻일까.
① [바다 속어]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또는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로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② [구어체 속어]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참으로 적나라한 표현이다. 영국이 마약으로 중국의 정신을 잃게 만들고 억지로 상하이를 빼앗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할 때, 상하이는 궁벽한 시골이었다. 중국이 굴욕을 당할 때, 상하이는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금융 중심지로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처럼 상하이의 흥망성쇠는 시작부터 제국주의 열강과 동기화하는 한편 중국과는 비동기화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상하이인은 스스로를 타 지역 중국인과 다른 존재로 여긴다. 상하이에서는 누군가가 눈치 없는 말이나 답답한 행동을 하면 “너 외지인이냐?”라고 핀잔을 준다. 농담이지만 외지인을 바라보는 상하이 사람들의 시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에게 외지인이란 ‘멍청하고 덜떨어졌으며 민폐나 끼치는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인 것처럼 상하이 역시 이민자의 도시다. 상하이 해방 직후 상하이 호적상 인구는 554만 명이었는데 그중 원래 고향이 상하이인 사람은 23만 명에 불과했다. 오늘날 인구 2415만 명 중에 진짜 상하이 출신은 1%도 안 된다. 자신도 외지 출신이면서 조금 일찍 와서 자리 잡았다고 새로 온 외지인을 차별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격이다.
1% 안에 드는 진짜 상하이 출신이라도 자랑스러울 게 없다. 상하이의 약칭 ‘호’자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말 속에는 “너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강에서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던 촌놈에 불과하지!”란 속뜻이 담겼다. 본적이 상하이라면 깡촌 어부에 불과하고, 상하이가 아니라면 결국 외지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상하이인 그 누구도 원래 출신 앞에 떳떳할 수가 없다. ‘호’는 상하이의 짧은 역사, 얄팍한 문화, 뼈대 없는 출신을 지적한다.
세계적인 번화가 난징루(南京路), 20세기 전반 중국의 명작 영화를 많이 배출한 상하이의 영화박물관, 인민공원에 나붙은 구혼 게시물(왼쪽부터).
상하이 사람들이 ‘호’ 대신 사용하고 싶어 하는 약칭은 ‘밝힐 신(申)’자다.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중 한 명인 춘신군(春申君)에서 따온 글자다. 상하이인은 약 2500년 전 초나라 재상 황헐이 상하이 지역에서 춘신군으로 봉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약칭에 따르면 상하이는 유구한 역사, 고귀한 혈통,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다.
외지인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상하이어를 쓰는 문화인이라고 과시하는 상하이인의 태도는 사실 열등감의 산물이다. 일천한 역사와 문화는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확실히 심어주지 못했다. 개항 이후 상하이는 토박이에게도, 최초의 이주민에게도 낯설었다. 서양 귀신들이 판을 깔고 주도하는 세상,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살면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또 어디인가?’ 그러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상하이인은 자신과 남을 구분 짓고 나서야 정체성을 얻었다.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남을 깔보고 나서야 자신을 높일 수 있었다. 외지인과 다른 존재이기 위해 그들은 많은 돈을 벌어야 했고, 영악해야 했고, 상하이어를 써야 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상하이인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베이징과 외국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 베이징인은 상하이인이 말하는 ‘외지인’의 범주에서 열외가 된다. 또한 상하이는 외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다. 외지인은 무시하면서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하이인의 이중적 태도를 중국인은 이렇게 풍자한다. “광둥인은 돈이라면 무슨 돈이든 벌고, 베이징인은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떠들고, 동북인은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상하이인은 외국이라면 어느 나라든 간다.”
중국인은 손님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상하이인은 손님 대접은커녕 오히려 외지인이라고 깔보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따라서 중국인은 대체로 “상하이는 좋지만, 상하이 사람은 싫다”고 한다. 사학자 이중톈은 이를 “상하이 외부 사람들은 상하이라는 도시는 과대평가하면서, 상하이 사람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어느 유학생이 상하이에서 일하는 외지 출신 아가씨에게 “따가운 차별에도 불구하고 상하이가 매력적인 이유가 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상하이는 선택의 폭이 넓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더라도 일단 기회는 주어진다는 거지. 재미있는 콘텐츠도 많고. 게다가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서도 몰려드니까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굉장히 자유로워. 국제도시라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깨어 있는 편이지. 결론적으로 상하이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그에 도전하는 중국인들의 파라다이스야!”
밤에도 인파가 넘치는 예원상성(豫园商城).
상하이식 빈곤
상하이 미술관 전시 작품, 물화(物化) 연작 중 한 작품.
“우둔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현명하게 된다. 성실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교활해진다. 못생긴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아름다워진다. 일자 눈썹에 납작코인 여자라도 상하이에서 며칠만 지내면 어엿한 귀부인이 된다.”
근대 상하이에는 “가난이 부끄럽지, 성매매는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 나돌았고, “좋은 남자는 일하지 않고 좋은 여자는 사장님에게 시집간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상하이가 얼마나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물들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뉴욕’이라고 불리는 상하이는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급속한 자본주의화만큼 양극화도 빠르다. 상하이의 임금과 수입은 타 지역에 비해 높지만, 동시에 물가도 비싸고 소비의 유혹도 크다. 명목임금은 높지만 지출이 많아 실질적으로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중국에서는 ‘상하이식 빈곤’이라고 한다.
경제성장기에 돈을 버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부동산 투자다. 외국인 투자자와 중국 부동산업자들의 투기로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정작 상하이인은 상하이에서 살 자리가 없어진다. 갈수록 시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하이인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내부순환선 안에서는 영어로 말하고, 내부순환선과 외부순환선 사이에서는 표준어를 쓰며, 외부순환선 밖에서는 상하이어를 한다.”
2009년 ‘워쥐’(蝸居, 달팽이집)라는 상하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달팽이집처럼 좁디좁은 집에서 벗어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성공담이다. 왜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는지는 명확하다.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애환에 공감하고, 번듯한 내 집을 갖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한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다. 상하이 도심의 아파트 평균 가격이 300만 위안(약 5억4000만 원)으로 상하이 근로자 연평균 임금(약 5만8000위안)의 약 51배 수준이다. 월급의 절반을 고스란히 저축해도 집 사는 데 100년, 한 푼도 안 쓴다 해도 50년이 걸린다.
추억 속 황금시대
외부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를 받는 상하이지만, 그 속에서 사는 것은 실상 매우 고단하다. 상하이의 영광과 대다수 상하이인의 일상은 따로국밥이다.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는 국제금융의 중심지를 꿈꾸는 상하이를 비판했다.
“국제적인 공신력을 갖추지 못하고, 화폐와 정보의 자유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법제도 구축되지 못했으며, 정부가 청렴하지도 않고, 효율성이 떨어지고, 사회의 신뢰도마저 낮은 국가는 결코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
이를 비웃듯 중국은 상하이-홍콩 증시 연동 시스템인 후강퉁을 출범시켰다. 많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모은 중국 증시는 반짝 상승 후 다시 폭락했다. 일찍이 ‘중국 증시 콘서트’를 쓴 한우덕 ‘중앙일보’ 기자는 현재 중국 주식이 하나도 없다며, 중국 증시의 속성 3가지를 경고한다. 첫째, ‘중국 경제의 양심’인 우징롄 교수의 비판대로 중국 증시는 내부자 거래, 허위 공시, 주가조작 등 불법의 온상이며 거대한 도박장이다. 둘째, 국가가 나서서 증시를 왜곡한다. 셋째, 주가가 시장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기꾼과 투기꾼이 어떻게 어울려 노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떨까. 인민공원 지하의 풍경가(風情街)는 1930년대에 대한 상하이의 애착을 잘 보여준다. 양우기념관의 편집자 친링은 상하이의 1930년을 ‘황금시대’라고 회고한다. “이 시대는 자유, 개방, 선진이라는 3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서방의 새로운 문화와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인 기운이 넘쳐흘렀다.”
20세기 100대 중국어 영화 중 수십 편은 20세기 전반 상하이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현대 상하이는 예전만큼의 활력이 없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옛 영화만 회고한다. 경제에 상응하는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중국 현대 예술의 이단아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의 사례를 살펴보자.
상하이는 상하이를 이겨야
개항 전 상하이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한 상하이 교외지역 주자자오(朱家角). 운하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아이웨이웨이의 상하이 스튜디오는 원래 상하이 고위 관리가 문화특구를 만들기 위해 아이웨이웨이를 특별 초빙해 지은 것이다. 관리들은 그의 건축에 열광했고, 건축 과정이 모두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됐다. 그러나 아이웨이웨이의 고발이 거슬린 상하이 정부는 돌연 ‘스튜디오가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건축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재기발랄한 아이웨이웨이는 당국을 조롱하는 ‘철거 기념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사람들은 상하이의 명물 민물게를 먹었다. 중국어로 민물게는 ‘허셰(河蟹)’로, 후진타오의 슬로건 ‘허셰(和諧, 조화)’와 발음이 같다.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면 허가받은 건물도 불법건축물로 바뀌는 사회. 이것이 당국이 그렇게도 떠들어대는 ‘조화’인지 묻는 퍼포먼스였다. 상하이 경찰은 파티 전 아이웨이웨이를 가택연금했다가 파티 다음 날 풀어줬다.
국제적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상하이, 그러나 이면에선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탄압받고 정부에 대한 도전이 허용되지 않는다. 상하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한 큐레이터는 말한다. “홍콩은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어요. 홍콩 정부는 미술관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중국처럼 이런저런 규제를 거의 두지 않지요. 중국이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중화권 상류층 미술 애호가들의 구매력이 홍콩으로 몰려가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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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처럼 이런저런 규제가 거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상하이 출판계 역시 “99권의 좋은 책을 포기할지언정 나쁜 책은 한 권도 내지 않겠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 활력이 생길 리 없다. 중국의 교육학자 양둥핑은 말한다.
“상하이의 경쟁 상대는 런던이나 뉴욕, 도쿄가 아니다. 상하이가 이겨내야 할 상대는 상하이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