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10월 매달 5~7점 그려 보냈다”
- K갤러리·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 압수수색
- 경찰 “자금거래, 유통경로 확인 중”
- 위작 의혹 관련자 “문서 내용 사실 아니다”
일산 모텔 특실에서 2011년 5월 초순 작업한 게 잘되지 않아서 안 됐다. 화가의 연구 끝에 그림이 잘되어 2012년 1월부터 그해 10월까지 한 달에 5~7점을 부산에 보냄. 2월 초 5000만 원을 받고, 말일경 농협 4000만 원, 외환은행 3000만 원, 하나은행 3000만 원 이렇게 송금 왔음. 당시 분할해 송금하면 추적 안 당하니 이렇게 한다고….
‘신동아’가 경찰이 수사 중인 이우환 위작(僞作) 유통의 ‘앞단’을 짐작해볼 수 있는 문서를 단독 입수했다. 이 문서는 현모(65) 씨가 2013년 5월 작성한 두 건의 ‘내용증명’으로 총 9장 분량. 현씨는 이 내용증명을 부산에 사는 이모 씨와 그의 아들에게 발송했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현씨가 이우환 위작을 제작하고, 이씨가 그 그림들을 시장에 유통한 것으로 본다. 현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일본에 도피 중인 현씨의 소재 추적에 나섰다. 이씨 부자도 출국 금지됐다.
현씨는 신동아 8월호 기사 ‘최고 경매가 한국화가 이우환 위작 논란’에서 언급된 A씨와 동일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 위작 사건에 두어 번 연루된 바 있고, 서울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서는 ‘중국을 드나들며 위작을 만드는 것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일단 착수하면 50대 50’
경찰의 이우환 위작 ‘퍼즐 맞추기’가 속도를 낸다. 경찰은 10월 중순 이우환 위작을 판매한 혐의로 인사동 K갤러리를 압수수색했고, 이 갤러리 김모(58·여) 대표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했다. 이 갤러리가 국내 모 대형 갤러리로부터 50억 원가량의 자금을 받은 사실도 파악했다.
취재 결과 경찰은 K갤러리에 앞서 8월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하 감정평가원)을 압수수색했고, K갤러리로부터 이우환 그림 6점을 압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서 미술품 감정으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감정평가원은 최근 2~3년 간 감정을 의뢰받은 이우환 그림 중에 위작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있다고 수 차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감정평가원 관계자는 “진위를 판단하는 데 이우환 화백과 우리의 견해가 달라 한때 그의 작품 감정을 중단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압수한 그림은 1970년대 후반의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시리즈. 이 시리즈는 미술 시장에서 이우환 화백의 작품 중 가장 비싸게 거래된다. 2012년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1977년작 ‘점으로부터’가 22억 원에 낙찰돼 해외에서 거래된 한국 작품 최고가를 기록했다. 경찰은 압수한 그림의 진위 감정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 맡겼다.
연탄가스 쐬는 방식으로…
현씨와 K갤러리는 어떻게 연결될까. K갤러리로부터 이우환 그림을 사간 ‘고객’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우환의 가짜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문서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본다.
2011년 4월 초순 답십리 소재 모 호텔에서 이씨를 소개받았다. 이우환 그림을 일본에서 꼭 팔 데가 있으니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했다. 처음 접해보는 그림이라 자신은 없었다. 20일 후 다시 만나 또 부탁했다. 이 일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니 재료값이라도 부담하라고 하니 이씨 말이 가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일을 착수하면 분배 과정에서 50대 50으로 정확하게….
이씨 아들이 그림을 일본으로 배달했음. 2012년 2월 초순에 5000만 원을 받고 말일경 이씨 아들로부터 송금(1억 원)이 왔음. 문제는 그 뒤부터다. 물건만 계속 부치라 하고, 돈은 오지 않고 못 팔았다고만 함. 소문에 의하면 80억 원어치를 팔았으니 나는 약속한 40억 원을 요구하는 바임.
이우환 위작 사진과 관련해 경찰로부터 압수수색 당한 서울 인사동 K갤러리.
‘모텔비 180만 원, 식대 180만 원, 캔버스(아사) 500만 원, 300만 원, 오피스텔 관리비 매달 15만~30만 원, 약품·재료비 등 500만 원….’ 문서 9장 중 4장에는 위작을 제작하며 지출한 비용이 항목별로 상세하게 적혔다. 현씨는 ‘한 달 작품 보낸 수. 5~7점’이라고 적고, 그 아래에 ‘100호 1점, 80호 1점, 60호 4점, 50호 약 10점, 40호 10점, 30호 10점’이라고 기록했다. ‘화가 월 300만 원’ ‘옥션 경매장 박물관 답사’ 등의 문구도 있다. ‘재료비’ 항목으로는 ‘유화물감? 아크릴? 석채’라고 적어 어떤 물감을 사용할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열거한 재료 중에는 ‘40년 된 못’도 있다. 문서에 따르면 현씨는 일산에서 ‘화가’가 그린 그림을 경기 남양주로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1월부터 5월까지 하루에 두 번 일산-남양주 왕복. 추운 겨울 소파에서 웅크리며 졸다. 왜. 1시간에 한 번씩 봐야 하니.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하니까. 6월부터 인부 인건비 한 달 200원(※200만 원의 오기로 보임)….
이우환 화백의 ‘선으로부터’(위)와 ‘점으로부터’.
이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문서에 적힌 현씨 및 이씨 부자의 휴대전화로 연락했지만 현씨와 이씨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씨의 아들은 “2012년 현씨가 아버지에게 소포를 두어 번 보내와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있는 정도”라며 “문서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내가 현씨를 만난 기억도, 그에게서 물건을 받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문서를 받은 때는 2013년 5월인데, 내용에는 현씨가 내게 2013년 1월부터 10월까지 물건을 준 것으로 돼 있어 시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문서 9장 중 타이핑으로 작성된 2장은 현씨가 이씨 부자에게 2013년 1월에서 10월까지 그림을 보낸 것으로 서술돼 있다. 그러나 수기(手記)로 작성한 나머지 7장에는 2012년 1월부터 10월까지 작업한 것으로 세 차례 기록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미술계 관계자는 “이 문서는 2013년 가을부터 인사동 화랑가에 돌아다녔고, 수사기관도 이 문서를 입수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 사건 핵심 관계자의 증언 등 문서 내용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과학적 판단이 우선”
문서에는 ‘이씨 아들이 그림을 일본으로 배달했다’고 적혀 있다. 경찰도 현씨 일당이 제작한 그림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서울 인사동으로 반입된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씨와 이씨 부자, 그리고 또 한 명의 ‘나카마’(미술 시장에서 중간상인을 지칭하는 속어)를 통해 위작이 K갤러리로 흘러들어가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경찰은 다른 갤러리가 연관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계좌 추적과 자금 거래 확인 등을 통해 그림 판매대금의 유통 경로를 파악해나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미술 시장 관계자는 “보통 위작은 ‘도매값’을 치르고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최종 고객이 그림값을 내면 자기 몫을 남기고 중간상인에게 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자금이 오간다”고 전했다.
경찰이 K갤러리를 압수수색한 날짜는 10월 16일. 그로부터 8일 후인 24일 이우환 화백은 국내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하고, 압수된 그림을 감정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경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화백은 “부모가 자식을 확인하겠다는데 경찰이 이를 거부하다니…”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진위에 대한 과학적 판단이 우선”이라며 “인위적인 노후화 흔적이 발견되는지 등을 먼저 확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