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용천역 김정일 암살 시도 “폭발 때 맹원 8명 사망”

제3국 망명 反北조직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11-19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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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용천을 다 날려버려라’ 명령”
    • 국정원, 美 CIA 등과 연계해 공작활동
    • 北 고위인사 20여 명 미국 망명시켜
    • 러시아 거주권 얻으려 체첸 전쟁 참전
    용천역 김정일 암살 시도 “폭발 때 맹원 8명 사망”

    북한 용천역 폭발 대참사. 노동신문

    2004년 4월 22일 오후 1시께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김정일이 열차를 타고 중국에서 돌아오던 때다. 폭약을 실은 열차에 전기 자극이 전해지면서 연쇄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은 “1t짜리 폭탄 100여 개가 동시에 한 지점에 떨어진 것과 같은 위력”이라면서 “강한 폭음과 폭풍으로 실명하거나 귀가 먹은 사람이 많고, 폭발 지점 1㎞ 주변은 폐허가 됐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동선(動線)에 어떻게 폭발물이 설치될 수 있었을까.

    2011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김정일은 용천역 폭발사건을 암살 시도로 믿었다. 이 같은 사실은 2009년 2월 2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한 자리에서 밝혀졌다.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간부 A씨에 따르면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났을 때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맹원(盟員) 8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러시아 망명인사 중심 결성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이하 구국전선)의 활약상을 살펴보기 전에 이 조직의 역사를 알아보자.



    1992년 구국전선에 참여하는 음악가 정추(1923~2013)는 1957년 10월 17일 모스크바대 광장에 서 있었다. “북한에 김일성 숭배가 있다는 게 사실 아닌가. 소련에서도 스탈린을 격하한다.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청년 정추의 외침이 쩌렁쩌렁했다. 광주 출신인 그는 1946년 사회주의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북한으로 올라갔다. 북한은 이 천재 음악가를 버렸다. 그는 1958년 카자흐스탄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해 2013년 알마티에서 사망했다.

    정추는 말년에 북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겠다고 나섰다. 박갑동, 이상조, 허진 등과 구국전선을 결성한 것. 박갑동은 남로당 출신으로 박헌영의 측근이다. 6·25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 요직을 맡았으나 1953년 남로당 계열 숙청 때 박헌영 일당으로 분류됐다. 사형집행 대기 중 1956년 석방됐으며 이듬해 탈출해 일본 도쿄에 정착했다. 이상조는 소련 주재 북한대사로 일하다 1957년 소련에 망명했다. 휴전회담 때 북측 대표였다.

    이들 외에 장학봉(전 북한 군관학교 부교장), 박영빈(전 노동당 조직위원회 위원), 심수철(소련군 출신), 정상진(전 북한 문화성 부상), 이춘백(전 북한군 장성) 등 제3국에 망명한 인사들이 망명정부를 구성해 북한 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구국전선은 한국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도 받았다. 제3국에 망명한 북한 인사들은 B씨를 매개로 황장엽(1923~2010)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도 연결됐다. 황씨는 망명정부를 세운 뒤 김정일을 제거하려 했다. 김정일을 제거하고 망명정부 인사들이 북한에 들어가 정권을 잡은 후 남북통일을 추진한다는 구상이었다.

    구국전선의 상층부를 형성한 망명인사는 20명가량이다. 다음은 정추의 생전 증언이다.

    “광복 전 소련에 있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이 500명쯤 된다. 북한이 공화국을 세울 때 주축이 된 사람들이다. 소련에서 지시한 대로 스탈린주의 북한을 만든 장본인들이다. 북한에 들어가서도 소련 국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소련계 숙청 때 죽지 않고 망명할 수 있었다.”

    “안기부 공작금으로 학교 세워”


    1957년 모스크바대 반(反)김일성 시위는 소련으로 망명한 인사들과 정추 같은 유학생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것이다. 소련 주재 북한대사이던 이상조는 허진과 함께 1992년 결성된 구국전선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이상조는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 때 소련의 도움을 받아 김일성을 수상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허진은 1989년 서울을 방문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복수의 구국전선 인사에 따르면 허진은 안기부가 공작비로 준 돈으로 신문사를 인수하는가 하면 작은 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한 인사는 “공작비로 준 돈을 횡령한 셈”이라고 말했다. C씨는 “구국전선에 준 게 아니라 허진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허진이 그 돈으로 알마티에 있는 신문사를 샀다. 신문사를 1년쯤 하다가 말고 모스크바에 학교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가 북한 혁명에 사용하라고 지원한 돈의 일부가 허투로 쓰인 셈이다. 복수의 구국전선 인사는 허진은 안기부, 박갑동은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박갑동은 박정희 대통령과도 수차례 만났으며, 2005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A씨는 옛 소련 ○○○공화국에서 결성된 구국전선 ○○○동지회의 책임자였다. 허진의 지도를 받았다. 나중에 구국전선 ○○지부장을 맡았다.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유일한 구국전선 인사다. 현재 60대로 40대 초반부터 구국전선에서 활동했다.

    구국전선은 모스크바, 하바롭스크를 비롯해 옛 소련 및 자치공화국에 하부 조직을 두었다. 구국전선 지도부가 60~70대일 때 40대들이 현장에서 활약한 것이다.

    ‘신동아’는 A씨의 증언을 다각도로 검증했다. 미래전략연구원(원장 구해우)이 통일부의 의뢰를 받아 구국전선 핵심 인사를 비롯해 제3국에 망명한 북한 인사들의 증언을 녹취한 기록이 있다. 이 녹취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A씨의 증언은 구국전선과 관련한 다른 망명인사들의 증언과 뼈대와 디테일이 일치했다. 정추의 증언과도 통했다. 그가 증언한 사안의 일시와 팩트, 인명을 기존 증언 및 문헌과 비교했는데 역시 일치했다.

    A씨에 따르면 구국전선의 소련 내 맹원은 400명에 달했다. 북중국을 중심으로 중국에도 조직이 있다. 탈북자들을 흡수해 맹원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도 활동 중이다. A씨가 이끌던 ○○○동지회는 ○○명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엘리트 중심으로 조직이 이뤄졌다.

    북한 식량난 이전 소련에 망명한 이들이 조직을 만들어 젊은 탈북자를 추가로 영입했다. 식량난 이후 탈북한 생계형 탈북자들과는 성격이 다른 사람이 모인 것이다. 구국전선 원로들은 사망했거나 고령이다. 40대로 현장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탈북자들을 흡수해 명맥을 잇는다. 현재는 김정은 정권 타도를 목표로 활동한다.

    A씨와의 대화는 정식 인터뷰가 아닌 밥상머리에서 이뤄졌다. 그는 취재에 응하는 것을 꺼렸다. 구체적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식구들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면서 답하지 않으려 했다. 대화는 중구난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A씨의 허락을 받고 대화를 녹음했다. A씨는 신원을 보호해줄 것, 구체적 내용은 다루지 말 것을 전제로 답했다. “현재의 활동 사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A씨와의 대화를 1문1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목표는 임시정부 건설”


    ▼ 누구와 일했나.
    “허진 선생이 직속상관이었다.”

    ▼ 핵심 인사들은 사망했거나 고령이다. 현재 활동은?
    “기업 형태다. 돈을 벌어야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위로금 보내줘야 하고 가족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용천역 폭발사고 때 맹원 8명이 죽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나는 한국에 들어와 있지만 언론에서 잘못 다루면 우리 식구들이 위험할 수 있다. 잘못하면 테러 조직으로 규정될 수 있다.”

    ▼ 한국에는 어떻게 들어왔나.
    “○○라는 러시아 고려인을 통해 바티칸 교황청 고위 인사를 만나기로 했다가….”

    ▼ 구국전선에는 어떻게 가입했나.
    “구국전선의 중심은 러시아와 옛 소련 공화국 망명자들이다. 허진 선생이 주도했다. 허 선생이 모스크바로 오라고 연락해왔다. 지역을 맡을 사람 3명 정도를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선출됐다. 40대 초반으로 피가 끓던 때다.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구국전선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 구국전선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허진 선생의 목표는 임시정부가 건설되고 그곳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투쟁과정과 활동경력에 허진 선생이 끼친 영향은 많지 않다. 활동자금을 지원한 것도 많지 않다. 새 발의 피다. 돈 들어온 게 굉장히 많았는데, 그분이 돈과 관련해 문제가 있었다. 한국에서 돈 주고 그런 것을…. 우리도 한국 대통령이 준 시계는 하나 받았다. 허진 선생의 아내가 탈북자들을 아랫사람 다루듯 했다. 카자흐스탄 버섯공장 하나를 우리한테 넘겨줬는데 정상진(전 북한 문화성 부상)이 다 팔아먹었다.
    30~40대 피 끓는 청춘은 자생 능력이 매우 강했다. 러시아의 벌목장도 인수했다. 구국전선의 실제 활동은 젊은이들 몫이었다. 어른들은 워싱턴, 도쿄를 다니면서 북한을 규탄하는 세미나를 열었을 뿐이다. 얼굴마담 노릇을 한 것이다.”

    교황청에 北 인권 호소


    ▼ 주(駐)모스크바 북한대사….
    “이상조 선생 딸들이 소련에서 어렵게 살았다. 우리가 잘나갈 때, 잘나갔다고 표현하면 안 되겠지만, 상층부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조직의 상층부에서 무시했다. 상층부는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이 붕괴 직전이라고 봤다. 그때 확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 정추, 허진 등은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반대했을 뿐 사회주의자였던 것으로 안다.
    “허진 선생은 ‘국가적인 공급체계는 옳았다, 좋았다’고 말했다. 사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대목에서 젊은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다.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철학적인 것을 떠나 자유롭게 제대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꽉 막힌 시스템에서 산 우리가 지향한 것은 자유였다.”

    ▼ 조직원은 어떻게 뽑았나.
    “대학 졸업생 아니면 받지를 않았다. ○○○동지회에 대학 안 나온 사람은 딱 2명 있다.”

    ▼ 일본 정부와의 연계는 없었나.
    “일본에서도 주문이 왔다. 박갑동 선생은 양복 한 벌씩 나눠준 게 거의 전부다.”

    ▼ 교황청과는 어떤 일을 했나.
    “북한인권백서를 만든 게 우리가 처음이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바티칸에 호소했다. 그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인권밖에 없다. 러시아는 정교도다. 옐친이 집권할 때 우리는 북한 타도 운동한다고 다 러시아 정교에 들어갔다.”

    ▼ 친북 고려인 조직도 있었을 텐데.
    “러시아에서 가장 센 친북 조직으로 ‘아소크’가 있다. 아소크가 우리 정보를 빼내 북한 쪽에 전달한 적도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던 맹원이 체포되기도 했다.”

    “싫든 좋든 이젠 한국이 조국”


    ▼ 불법 체류 신분이었겠다.
    “체첸에 간 이들 중 2명이 죽었다. 고려인에게 참전을 권유했는데, 고려인들이 꺼렸다. 체첸에 가면 거주권을 보장하고 러시아에서 살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체첸 전쟁에 참여한 거다. 1, 2기 두 번에 나눠 체첸에 보냈다. 러시아는 체첸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목숨 바쳐 죽은 사람들 돈을 떼먹은 것이다. 우리는 뜨겁게, 치열하게 살았다. 죽기도 하고, 처단도 하고.”
    그는 북받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북한놈들이 잡혀서 왔는데, 우리 내부에 간첩이 있었다고…. 대사관에 연락하고 그런 놈이 있었단 말이야. 내부 고발자는 김책공업대 출신이야. 우리 애들이 때려 죽였어.”

    ▼ 중국 쪽 조직은.
    “구국전선이 북중국에 많다. 조직할 때 나는 반대했다. 중국을 통하면 정보가 샌다고 봤다. 김정일이 용천 폭발사건 때 다른 노선으로 갔다. 그래서 대기하던 우리 인원들이 죽었다. 굉장히 오래 준비했다. 암살 시도 소식을 들은 김정일이 용천을 다 날려버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안다.”
    구국전선은 북한 노동당 간부를 미국에 망명시키는 일도 했다.
    “○○쪽 라인에서 돈이 나왔다. 북한 노동당 인사를 미국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한국 언론에 ‘김정일 통치자금 40억 달러…’라고 보도되는데, 우리가 미국으로 망명시킨 조선중앙은행 고위인사 발언을 서방 언론이 보도한 게 시초다. 북한이 어려울 때 김정일 일가가 보관하던 수십억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악기 팔러 중국에 나온 조직지도부 인사도 우리가 미국으로 보냈다.”

    ▼ 몇 명이나 미국으로 보냈나.
    “우리가 한 게 20명 넘는다. 정치관료, 학자, 과학자, 실제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 국정원과 한 일은.
    “일은 했지만, 내가 한국에 있는데 어떻게 얘기를 하나. 국가란 게 싫든 좋든 한국이 이제 우리 조국이지 뭐. 그렇지 않나.”
    구국전선의 현재 책임자는 탈북 고위인사 D씨다. 남재준 국정원장 시절 구국전선을 재구축하려고 시도하면서 D씨가 책임자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장이 바뀐 뒤 이러한 시도는 흐지부지됐다. 정추, 허진 등이 세운 구국전선을 지금껏 지켜온 제3국 망명인사들과 D씨의 활동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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