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만 병력이 주둔하던 요새. 유례없는 21년간의 포격전. 1990년까지 공창(公娼)에서 일한 성매매 여성만 4000명. ‘군중낙원(軍中樂園)’이 사라진 자리에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온다.
샤먼시 동단에 있는 후리산 포대. 바다 건너 왼쪽으로 다단다오와 얼단다오가 보인다. 모종혁
11월 2일 오후 중국 동남부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의 후리산(胡里山) 포대. 이곳은 1894년 건설된 청나라의 포병 진지다. 당시 청조는 양무(洋務)운동의 일환으로 독일에서 최신형 크루프(Krupp) 대포 2문을 수입해 후리산에 설치했다. 1840년 아편전쟁 후 난징(南京)조약으로 개항된 5개 항구 중 하나인 샤먼을 지키고자 크루프를 도입했다. 1900년 샤먼을 침입한 일본군 함정을 쫓아내는 등 이 대포는 한동안 ‘샤먼의 수호신’으로 활약했다.
가족과 함께 후리산 포대를 구경 온 왕젠궈(61) 씨는 바다 앞 왼쪽의 작은 섬이 대만 영토라는 말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진먼다오(金門島)부터 대만 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것이다. 안개가 잔뜩 낀 날씨 때문에 시계(視界)가 뚜렷하지 않았으나 눈앞에는 대만의 다단다오(大膽島)와 얼단다오(二膽島)가 항공모함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후리산 포대와 두 섬 사이의 거리는 불과 4.8㎞다.
중국인 관광객 年 54만
다단다오와 얼단다오는 대만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금단구역이었다. 민간인들이 두 섬을 가려면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대만군은 샤먼 시내를 공격하기 가장 좋은 요충지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했고 수천 명의 군인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대만 행정원은 다단다오와 얼단다오의 관할권을 국방부에서 진먼현(縣) 정부로 이전했다. 진먼현 정부는 군 병력 철수가 완료되고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끝나는 내년 3월에 두 섬을 개방할 예정이다.
이처럼 중국과 대만의 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 대만 본토에서 샤먼까지는 165㎞나 되지만, 진먼다오의 시위안(西園)에서 샤먼의 양탕(陽塘)까지는 2.4㎞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국과 대만을 가른 대만해협(海峽)의 거리는 남북한을 둘로 쪼갠 비무장지대만큼이나 가깝다.
그러나 샤먼과 진먼다오는 한동안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두 지역은 두 차례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런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진먼다오가 중국과 대만 교류 및 협력의 상징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튿날인 11월 3일 샤먼시 우둥(五通)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탔다. 아침에 출발하는 첫 배였지만 빈 좌석은 거의 없었다. 소지한 여권과 옷차림을 살펴보니 전체 승객의 3분의 2가 중국인이었다. 필자 옆에도 중국인 사업가 2명이 앉았다. 그중 한 명인 리칭제 씨는 샤먼과 진먼다오를 오가는 무역상이었다. 리씨는 “진먼의 특산품을 구입해 중국에 팔고, 중국의 공산품을 진먼에 내다판다”며 “중국 상품의 품질이 향상됐고 물류비도 대만산보다 훨씬 낮아 중국산을 선호하는 진먼 주민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샤먼과 진먼다오를 오가는 여객선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주행시간은 30여 분에 불과하다. 평일에는 터미널에서 바로 배표를 살 수 있지만, 주말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배를 놓칠 수 있다.
지난해 진먼다오를 찾은 중국인은 54만4000명이나 됐다. 전체 관광객(141만 명)의 40%에 육박한다. 나머지는 대만 본토인(84만 명)과 순수 외국인(2만6000명)이다. 중국인 관광객은 진먼다오가 문호를 개방한 첫해인 2001년에는 951명에 불과했으나 2005년 1만4000명, 2010년 15만 명으로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자이산 갱도 병기 전시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중국인 관광객들. 모종혁
푸젠성에 속한 대만 영토
진먼다오는 대만인조차 쉽게 들어가지 못하던 섬이다. 국민당 정권은 대륙에서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도망간 뒤 1945년 5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무려 38년간 계엄 통치를 유지하며 일당독재로 전횡했다.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은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은 더는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만을 이끌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87년 7월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전격 단행했다. 뒤이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결성한 민주진보당(民進黨)이 합법화했고, 국민당과 민진당의 양당 체제가 확립됐다.
그러나 대만 본토와 달리 진먼다오는 5년 후인 1992년에야 계엄령이 풀렸다. 1982년 이전까지는 군인, 군속 등 군 병력과 섬 주민만 진먼다오에 들어갔다. 민간인은 국방부의 허가를 받은 군인 가족, 주민 친척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1982년 이후에도 진먼다오 여행은 단체관광객으로 제한됐다. 1993년 대만 행정원이 완전 개방을 결정하면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해졌다.
흥미롭게도 진먼현 정부는 대만 중앙정부 직할의 자치현이다. 행정구역은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에 속해 있다. 즉, 진먼다오는 대만 정부가 통치하지 않는 대륙에 적(籍)을 두고 있다. 대만 헌법은 중국 대륙을 자국 영토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먼다오를 살펴봐야 한다. 그해 10월 1일 공산혁명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위에서 신중국 건국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2주 뒤 중국군의 화동야전군 10병단 장병들이 샤먼에 집결했다. 목표는 단 하나. 국민당이 도망간 대만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샤먼 앞 진먼다오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다. 진먼다오에 교두보를 마련해야 대만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병단 병사들은 샤먼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기에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다. 국민당 패잔병들이 진먼다오를 지키고 있다고 여겼기에 마음도 가벼웠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전혀 달랐다. 진먼다오에는 대만 본토에서 건너온 18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18군 사령관 후롄(胡璉)은 중일전쟁에선 용맹을 떨친 명장이다. 비록 국공 내전의 화이하이(淮海)전투에서 대패했지만, 임전무퇴의 자세로 진먼다오에 뼈를 묻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0월 24일 야음을 틈타 10병단 장병들은 수백 척의 목선에 나눠 타고 샤먼을 출발했다. 병사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진먼다오로 향해 갔다. 상륙부대가 구닝터우(古寧頭) 해안가에 이르렀을 무렵 샤먼의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며 지원했다. 중국군은 기세당당하게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엄청난 포탄과 기관총 세례가 그들을 맞았다. 그뿐만 아니라 해안가 곳곳에 부설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뢰가 10병단 병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중국군의 상륙작전은 3000여 명의 전사자와 7000여 명의 포로만 남긴 채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세계 최장 포격전
첫 진공에 실패했지만 중국은 진먼다오 점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미국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대만을 방문하자 10일간 진먼다오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에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해 포병, 해군, 공군으로 체계화한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마오쩌둥은 진먼다오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마오는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이 미군 첨단 병기의 쓴맛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한동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던 진먼다오가 다시 지옥의 수렁으로 빠진 것은 1958년 8월 23일이다. 그날 샤먼의 중국군은 459문의 대포를 동원해 진먼다오 전역을 포격했다. 그뿐만 아니라 80여 척의 군함과 200여 대의 전투기를 출동시켜 대만군을 타격했다. 육해공에서 동시에 펼쳐진 공격으로 진먼다오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만에 부사령관 3명을 비롯해 수백 명의 대만군 장병이 전사했다. 수일간 반경 10㎞ 이내의 해협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국 함정의 해전과 전투기의 공중전도 불꽃을 튀겼다.
대만의 동맹국 미국은 즉각 7함대 전체와 6함대 일부를 대만해협으로 출동시켰다. 항공모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등 미 해군의 대규모 선단이 대만으로 집결했다. 일본 주둔 해병대 3800명도 수십 대의 수송기에 나눠 타고 대만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중국군과 대만·미국 연합군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그런데 중국군은 진먼다오로 진입하는 대만 군함과 비행기만 공격했다. 미 해군 함정도 섬으로 들어가는 시늉만 했을 뿐 이내 선수(船首)를 돌려 대만 본토로 향했다.
1949년 중국군이 상륙작전을 벌이다 대패한 구닝터우 해안가로 가는 길에 세워진 기념문. 모종혁
중국과 대만 사이의 대만해협 지도.
미국의 속셈도 도긴개긴이었다. 한 해 전 소련은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려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중국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미 해군 함선은 대만해협을 떠돌며 군사시위만 벌였다. 10월 13일 중국은 돌연 포격 중지를 선언하면서 평화회담을 제의했다. 2주 뒤에는 대만 함정의 진먼다오 진입도 용인했다. 그 뒤로 중국군과 대만군은 짝수 날과 홀수 날을 번갈아가며 포탄을 쏘았다. 이듬해부터는 적지(敵地)가 아닌 바다를 향해 쏘아댔다.
2600여 명이 부상했다. 두 달 동안 진먼다오의 17개 섬에 떨어진 포탄은 무려 47만 발. 게다가 ‘진먼 포격전’은 1979년 1월 중국과 미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무려 21년간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포격전을 치른 것이다.
덩리쥔 노래로 심리전
수이터우(水頭)항 선착장에 도착한 여객선에서 내리는 중국인 관광객들. 모종혁
그중 자이산(翟山) 갱도는 다(大)진먼 서남쪽에 자리 잡은 해군기지다. 1961년부터 5년간 화강암 암반을 뚫어 만들었다. 바다에서 바로 안으로 연결될 수 있는 수로와 지하도로 등으로 이뤄졌다. 수로는 A자형으로 높이 8m, 폭 11.5m, 길이 357m에 달한다. 도로는 높이 3.5m, 폭 6m나 된다. 현(縣)정부 관광처 직원 왕허셰 씨는 “수로는 상륙용 주정(LST) 42척을 한꺼번에 정박시킬 수 있고 도로는 차량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고 설명했다.
대만군은 1958년부터 모두 12개, 총 연장 10여 ㎞에 달하는 지하갱도를 건설했다. 이 중 군대가 주둔하고 병기를 보관할 수 있는 갱도는 7.8㎞. 모든 섬의 면적이 153㎢(다진먼 135㎢)에 불과한 현실에서 얼마나 큰 공사가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하갱도는 1992년에야 공사를 끝냈는데, 전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과 바닷물을 담수로 만드는 시설까지 만들었다.
해안가 곳곳엔 방송탑을 세웠다. 필자가 찾은 구닝터우 방송탑은 4층 높이에 48개의 대형 스피커가 달려 있다. 이 방송탑은 1967년에 세웠는데 스피커 소리가 전방 25㎞까지 퍼져나가 샤먼시 전역을 아우른다. 왕씨는 “대만군은 낮에는 중국 정부 비방, 대만 경제 발전상, 사회·문화 최신 뉴스 등 다양한 소식을 방송했고, 밤에는 1970년대 중화권 최고의 여가수 덩리쥔(鄧麗筠)의 감미로운 히트곡을 틀어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자마자 덩의 노래는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特約茶室의 ‘侍應生’들
포격전이 이어지면서 진먼다오 주민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치웅린(瓊林) 갱도에서 만난 왕란(57·여) 씨는 “1958년부터 포격전이 끝날 때까지 20년 넘게 밤 10시 이후 점등과 통행이 금지됐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새로 짓는 주택에 지하실을 의무적으로 파게 해서 방공호로 겸용토록 했다”며 “섬 주민은 오랜 세월 동안 포탄 소리를 견뎌내고 자유를 포기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대만군은 20~30대 여성까지 예비군에 강제 편제해 군사훈련을 이수토록 했다.
대만 국방부는 방위 병력을 대폭 증강했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병력 수는 10만 명을 유지했다. 진먼다오 주민 수가 3만~4만 명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많은 군인이 주둔했는지 알 수 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섬에서 주민들은 어업을 포기해야 했다. 농사지을 땅도 군부대에 내줘야 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섬 주민을 먹여 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만 명의 군인이었다. 왕허셰 씨는 “대만 정부는 진먼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를 발행해 장병에게 월급으로 지급했고, 주민들은 군인을 상대로 한 장사로 살아갔다”고 말했다.
녹슨 포탄이 명품 칼로 탄생하는 과정을 시연하는 우정둥 사장. 15분 만에 멋진 포탄칼이 만들어졌다. 모종혁
1960년대에 들어서는 장병들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강화한다며 시응생 선발을 엄격히 했다. 이에 따라 △18세 이하, 30세 이상인 자 △배우자가 있거나 신체장애가 있는 자 △성병환자 △불량한 전력이 있는 자 △진먼방위사령부의 규정을 위반한 자 등은 제외시켰다. 장병들은 입장료와 같은 표를 사고 30분간 시응생과 성행위를 했다. 표값은 물가 시세와 장병 월급을 고려해 해마다 조정했다. 이 특약차실은 1990년까지 운영됐는데, 적어도 4000명의 시응생이 진먼다오 곳곳에서 일했다.
포탄 녹여 만든 칼
냉전이 끝나가는 국제 정세 속에 대만 행정원은 진먼다오 주둔군을 감축했다. 대만 본토에서 계엄령을 해제하던 해 방위군 철수를 시작했다. ‘불접촉·불담판·불간섭’의 삼불(三不) 정책을 완화해 대만인의 중국 내 친척 방문도 허용했다. 1992년에는 중국과 ‘92컨센서스(九二共識)’에 합의했다. 이는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會)와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海基會)가 홍콩에서 만나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면서 각자의 해석에 따른 명칭을 사용토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진먼다오 주둔군 감축은 급물살을 탔다.
2000년 4월 대만 당국은 군인들이 빠져나간 진먼다오의 개발과 주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리도(離島) 건설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는 ‘진먼으로 수입되는 상품관세 면제’ ‘불필요한 군사시설 이전’ ‘지역 개발에 필요한 예산을 중앙정부에서 편성’ 등을 담고 있었다. 특히 ‘주민이 다른 법에 구애하지 않고 중국과 자유롭게 왕래하고 상업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 진먼다오·마쭈다오(馬祖島)와 푸젠 간에 ‘소삼통(小三通)’이 허용됐다. 소삼통으로 두 섬은 중국과의 통항·교역·우편 거래가 가능해졌다.
이처럼 급변하는 상황에서 진먼다오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나섰다. 현정부는 먼저 영국과 프랑스 업체에 의뢰해 해안가에 설치된 지뢰를 제거했다. 국방부의 협조를 받아 옛 군사시설을 개조,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주민들도 이런 변화에 적극 대응했다. 특히 우정둥(吳增棟·58) 진허리(金合利) 사장이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 우 사장은 진먼 포격전으로 섬 곳곳에 박힌 수십만 발의 포탄 중 일부를 수거해 이를 소재로 다양한 형태의 칼을 만들었다.
11월 4일 오전 필자와 만난 우 사장은 “8·23 포격전 후 10만 대군이 진먼에 주둔하면서 대검, 부엌칼 등 칼 수요가 엄청나게 일어났다”며 “우리 진허리는 19세기 말부터 칼을 만들었고 1937년 회사를 설립해 기술력이 높았기에 군 당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주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군 당국이 포탄을 수거해 폐기했는데 이를 이용해 칼로 만들면 어떨까 싶어 수년간 시도한 끝에 1996년부터 훌륭한 상품을 제작했다”면서 “다른 관련업체는 모두 도산했지만 진허리는 포탄칼(砲彈鋼刀)을 앞세워 여전히 성업 중”이라고 자랑했다.
진먼고량주의 고향
진허리 공장은 그 자체가 흥미로운 관광명소다. 전체를 판매장, 기념관 및 사무실, 작업장으로 3등분했다. 작업장 앞쪽은 녹슨 포탄 껍데기를 가득 쌓아둬 인상적이었다. 우 사장은 필자에게 포탄이 명품 칼로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며 제품 생산을 시연했다. 먼저 포탄에서 용접기로 껍데기 일부를 떼어냈다. 이를 1300℃ 온도의 풀무에 넣었다가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형태를 잡아갔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칼을 각종 숫돌로 갈아 날을 세웠다. 이렇게 단순하지만 정교한 15분의 작업을 거친 끝에 멋진 포탄칼을 완성했다.
같은 날 오후 방문한 진먼술공장(酒廠)도 변신에 성공한 기업이다. 본래 진먼술공장은 1950년 설립된 진청(金城)술공장의 전신으로, 1956년 현 정부가 흡수·통합해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 회사가 내놓은 진먼고량주는 대만을 대표하는 전통주다. 한때는 대만 전통주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했고, 지금도 70~80%의 점유율을 유지한다.
진먼고량주가 유명해진 데는 군인들의 도움이 컸다. 린더궁(林德恭) 회장은 “진먼에 주둔한 장병들이 부대 회식 때 진먼고량주를 즐겨 마셨고 휴가를 나가거나 제대하면서 여러 병을 사갔다”며 “덕분에 진먼고량주의 뛰어난 술맛이 모든 대만인에게 알려졌다”고 밝혔다.
지난해 문을 연 양자이(陽翟) 거리는 다른 관광지와 차별되는 테마파크다. 진먼다오의 1960년대 번화가 모습을 복원했다. 본래 영화 ‘군중낙원’(2014)의 세트장이던 곳을 한 민간 기업이 현 정부와 함께 테마파크로 개조해 개장한 것이다. 후밍광(胡明光) 다허(大河)작업실 전시팀장은 “이곳에 오면 과거 대만 사회를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다”며 “대만에서 옛 건축물과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존하며 대만 국기로 뒤덮인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3월에 문을 연 진후(金湖) 광장도 눈길이 가는 곳이다. 진후광장은 대만 유일의 면세점 기업인 에버리치가 80억 대만달러(약 2812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개장한 아시아 최대 면세점이다. 우메이주안(吳美娟·여) 진후광장 홍보팀장은 “면세점과 호텔이 문을 열면서 섬 주민에게 7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제공했고, 중국인 관광객에게 대륙보다 30% 저렴하게 서구 명품을 구매할 기회를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11월 7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 마잉주(馬永九) 대만 총통이 66년 만의 첫 정상회담을 연 데는 전쟁터이던 진먼다오를 교류와 협력의 무대로 뒤바꾼 양안의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모종혁
● 1971년 경기 고양 출생
●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졸업
● 2000년부터 중국 전문 저널리스트, 방송 PD/VJ,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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