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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

‘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 모델 논란

  • 노성두 | 미술사학자 nohshin2@naver.com

“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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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원통형 방건? 접어서 보관…각 안 사라져
  • ● 조선 철릭? 옷깃 동정 없는 중국 철릭 가까워
  • ● 1607~08년 제작? 루벤스 건강·재정 악화 시기
“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

<그림 1> 루벤스 ‘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 종이 소묘, 1617년경, 38.4 x 23.5㎝, LA 게티 미술관. <그림 2> 루벤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1617~18년, 5.35 x 3.95m, 빈 미술사박물관.

안토니오 코레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베니스의 개성상인’ 등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으로 동서양의 시대와 역사를 가로질러 흥미진진한 활약상을 펼친 조선인이다. 안토니오는 1600년경의 실존 인물로, 왜구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렸으나 운명의 무거운 수레바퀴를 스스로 돌려 개척한 풍운아로 알려져 있다. 특히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의 초상을 그렸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욱 살갑다. 루벤스는 ‘플랜더스의 개’ 마지막 배경으로 나오는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거장이다.

현재 미국 LA 게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복식을 입은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은 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의 책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푸른역사, 2004년)에서 비롯한다(그림 1). 2011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초상화의 비밀’ 전시회에선 루벤스의 그림이 대형 걸개그림으로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루벤스가 안토니오 코레아의 초상을 그렸다는 걸 상식으로 여기게 됐다.

“조선인 가능성 낮다”

게티 미술관이 개인 소장가로부터 구입한 루벤스의 소묘는 당초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머리에 쓴 관모가 방건(方巾,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 착용한 사각 건)이라는 곽 교수의 주장에 따라 조선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여기에다 상투를 틀고 조선 철릭을 입었다는 관찰이 덧붙으면서 게티 미술관 측은 곽 교수의 견해를 수용하고 작품 제목을 수정했다.

곽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일 뿐 아니라 다름 아닌 안토니오 코레아이며, 따라서 작품 제작 시점을 1607~08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아직 게티 미술관 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안트베르펜의 예수회 교회 주제단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동양인을 그리기 위한 준비 소묘로 알려졌다. 그래서 제단화의 주문 및 완성 시점을 고려해 제작 시점을 1617년쯤으로 보는 게 학계의 통설인데 이것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림 2).



안트베르펜을 떠나 현재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소장하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등장하는 동양인과 게티 미술관의 소묘 주인공은 옷차림과 생김새가 판박이 같아 동일 인물로 보인다. 학계와 곽 교수 모두 이에 동의한다. 두 사람의 얼굴만 비교해도 쌍꺼풀진 눈, 바깥으로 솟은 눈꼬리, 깡총한 눈썹, 내려앉은 콧부리, 단단한 콧방울, 돌출형 치아와 도톰한 입술, 동그란 광대뼈, 좁은 하관, 그리고 귓불의 모양이 같아서 같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계는 루벤스의 이 작품을 본격적인 유화 작업의 준비 소묘로 보는 반면, 곽 교수는 소묘가 독립 작품이며 루벤스가 로마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를 만나 챙겨둔 조선인 소묘를 10년 뒤 안트베르펜 제단화를 작업하면서 꺼내 베껴 썼다는 주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2011년 전시에서도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곽 교수의 주장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도록에 수록했다.

하지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루벤스 소묘의 주인공은 조선인일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은 더욱 낮다.

안토니오 코레아에 관한 문헌 기록은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일주기’에 간략하게 남아 있다. 카를레티는 △일본에서 조선인 노예 5명을 헐값에 사서 세례를 받게 한 뒤 인도 고아에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1명을 이탈리아로 데려왔는데 △그가 피렌체에 머물다 지금은 로마에 있는 것으로 알며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라고 밝혔다. 조선인이라는 의미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알려진 그의 나이나 생김새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엄연한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망건은 어디로 갔을까

곽차섭 교수는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 맞다면 혹시 그가 문헌에서 입증된 안토니오 코레아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그 가능성을 좁혀본다. 안토니오는 1606년 말 이후 로마에 체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루벤스는 1608년 가을까지 로마에 머물렀으니 화가와 모델이 1607~08년에 만나 소묘를 그렸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미술사의 미로(迷路)에서 실물과 문헌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곽 교수의 책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가 학계의 새로운 학설로 인정받았고, 역사학자가 분야도 생소한 서양미술사학의 오랜 난제를 해결한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껏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곽 교수는 그림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은 것 같다. 소묘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가장 큰 증거는 조선 방건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방건이 맞을까. 관모의 형태를 보면 윗부분이 넓어지는 둥근 원통형이다. 방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각진 형태가 특징이다. 둥근 방건은 ‘동그란 사각형’이라는 표현만큼 심각한 형용모순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곽 교수는 “언뜻 보기에 드로잉 속의 방건은 사각형이 아니라 둥근 모양인 듯도 하지만, 이는 여러 해에 걸쳐 사용함으로써 각진 부분이 완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책의 89쪽)고 완곡하게 해명한다.

방건을 오래 쓰면 세로로 각진 부분이 저절로 펴진다는 주장인데, 방건은 벗어둘 때 납작하게 접기 때문에 해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써도 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마에 밀착하는 부분은 각이 다소 ‘완화’될지 몰라도, 방건 윗부분까지 반듯하게 펴지진 않는다. 방건은 굵은 재료로 사각형 틀을 만들고 가는 올로 면을 엮은 다음 4개의 사각형 틀을 옆으로 연결해 제작한다. 방건을 오래 사용할 경우 사각형 틀을 묶은 부분이 떨어져나갈 수는 있어도 굵은 틀과 각이 사라져 둥근 모양으로 변할 수는 없다. 생선구이 석쇠를 오래 썼다고 가운데 망은 멀쩡한데 바깥의 굵은 틀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망건(網巾,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폭 10㎝가량의 그물처럼 생긴 띠)도 보이지 않는다. 망건을 안 두르고 방건을 쓰는 건 맨발에 정장 구두보다 각이 안 나오는 ‘난감 패션’이다. 17세기 북유럽 미술계를 이끌며 플랑드르 바로크 황금시대를 연 거장 루벤스의 눈이 방건 아래 망건을 놓쳤을까. 더욱이 ‘낡은 방건 이론’이 사실이라면, 빈 제단화의 주인공은 금실로 짠 비단 철릭과 값진 가죽 신발과는 어울리지 않게 각이 사라지도록 낡아빠진 관모를 보란 듯 쓰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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